눈 | 막상스 페르민 지음
눈에 기갈이라도 들린 것인지, 더디긴 하지만 분명 오고 있는 봄날 한켠에서 눈 소식 뜸했던 올 겨울의 뒤꽁무니를 자꾸 흘끔거리게 된다. 오랜 실연의 나날을 뒤채던 이가 봄 새싹처럼 뚫고 올라오는 새 사랑을 다시 감지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이 뒹굴던 날들이 절망의 한복판이었음을 깨닫게 되듯이, 봄이 와야만 겨울은 비로소 겨울로 거듭나게 되는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겨울이라는 계절이 갖는 ‘궁기’를 뼛속 깊이 체험한 이들은 봄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폐허나 황량함과는 좀 다른 삶의 궁기―절망 이전에 생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어떤 위축이나 주눅을 경험한 이들 말이다. ‘세계’라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존재’에게 절망이란 차라리 하나의 ‘의지’이자 ‘행위’이다. 의지와 행위 이전의 어떤 결사적인 웅크림, 꽉 움켜진 태아의 손 모양이 잔뜩 표출하고 있는 본능의 위태로움은 굳이 절망이라는 관념의 외피를 두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존재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사람[절망]이 아니라 짐승[궁기]이다. 삶의 여러 계절들에서 그 짐승이 가장 극적으로 발견되는 때는 바로 궁기의 계절이며, 궁기의 계절은 풍요의 계절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다.
겨울은 그럼 점에서 의미심장한 계절이다. 궁기와 풍요를 모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은 눈이라는 풍요를 가지고 있다. 궁기의 겨울을 가장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마술 상자. 모든 물상을 뒤덮고, 보존하다, 끝내 물이 되어 모든 것 위로 흘러내리는 눈. 궁기를 살아 있게 하고 본질적인 것이 되게 하는 매질.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 자살자 수가 유난하다는 통계 수치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궁기와 풍요는 죽음과 생처럼 짝지어 몰려다닌다. 그 짝패의 이치를 탐구해보고 싶다면 ‘눈’이라는 화두를 과감히 붙들어도 좋을 것이다. 막상스 페르민의 《눈》은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매우 짤막한 소설이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고원의 만년설이나 알래스카 등지의 순백의 세계를 진한 여운과 함께 펼쳐준다. 눈[雪]이라는 글자를 쓰는 방식에만 1만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학청년 유코의 시 쓰기와 사랑에 대한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다디단 명상의 시간까지 덤으로 와 있고…….
유코는 자신의 생일날 아침, 은빛 강가에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거기에는 이미 깊은 실망이 배어 있었다. 햇빛이 강물에 일렁이면서 은빛 무늬를 그렸다. 개복치 한 마리가 강가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 나무다리 밑으로 사라졌다.
“시를 쓰는 것은 직업이 아니다. 그건 시간이나 보내는 오락이지. 시라는 것은 흘러가는 물과 같은 거야. 이 강물처럼 말이다.”
유코는, 고요하게 흘러 사라지는 강물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12~13)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인생을 살고, 즐기고, 그리고 죽는 사람들.
인생의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오직 미묘한 균형을 잡을 뿐인 사람들.
연기하는 배우들이 있다.
그리고 삶의 곡예사들이 있다.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