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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영원히 복구되지 않는 애인

위기의 여자 |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by 김담유

내가 오랫동안 진실이라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고, 내가 거짓이라 규정했던 무엇들이 사실은 진실에 더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때 거울 너머로 바라보이는 나 또한 내가 아닌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 때, 그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확신할 수 있으며 무엇을 단정지을 수 있을까. 유일무이하게 믿어온 가치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그렇다고 미쳐버릴 수도 없는, 즉 '도피구조차 원천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견고한 정신 구조를 가진' 사람의 충격과 망연자실을 우리는 과연 제대로 측량할 수 있을까. 점점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한, 누군가의 시구처럼 '한번 떠나간 애인은 영원히 복구되지 않는' 그런 원천적 상실의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 우린 과연 망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또다시 무언가를 신뢰할 수 있게 될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위기의 여자』를 통해 쉽지 않은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20여 년간의 행복했던 결혼생활.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신뢰가 강했던 한 여자가 남편의 부정을 알게 되면서 진행되는 정신심리가 긴장감 있게 진행된다. 열정과 신념으로 만나 한 가정을 꾸린 남녀가 20여 년만에 맞게 되는 분열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문제는 부정한 관계를 아내 모르게 8년간이나 지속해온 남편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남편에겐 자신의 일에 무심한, 자식과 가정 생활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여자 외에 자신의 업무와 자기의 성취 결과를 바라봐주고 인정해줄 또 하나의 타인이 필요했던 것! 또 하나의 타인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바로 여자와의 결별을 의미함은 아니라는 것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다.


남편은 여자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여자 또한 남편과 헤어질 생각이 없다. 그러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남편이 8년간 지속해온 온갖 거짓말과 배신 행위들. 남편의 그러한 행위는 그녀가 믿어온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짓밟고 뒤흔드는 그 무엇이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여자의 숨통을 조르는 행위나 다름없다. 여자는 순식간에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단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역할들. 남편의 옷을 챙기고 남편의 식사를 챙기고 출가하거나 독립한 딸자식을 돌보는 일들, 그 사이에서의 여자는 사랑 받고 사랑하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기(自己)가 확연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란 찾아볼 수 없는, 어떤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난 듯 허깨비일 뿐인 여자는 송두리째 자기 존재 자체를 위협받게 된 것이다.


여자는 탄식처럼 내뱉는다.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음을 정작 자신만 몰랐었다고. 시간은 멈추어 선 그 무엇이 아니라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이며 그래서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부서지고 마모될 수도 있음을 자신만 몰랐던 거라고. 그것이 나의 불찰이었다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고정불변의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한 순수한 영혼의 균열 현상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 문제 또한 제기다. 어느 글에선가 그녀는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의 관습과 통념에 길들여지는 겉껍데기 같은 역할을 벗겨버린 자리에 오롯이 알갱이처럼 남는 여자의 모습은 바로 인간의 모습일 터이다. 『위기의 여자』는 균열 앞에서 끝없이 추락할 수도 그렇다고 다시 비상할 수도 없는, 망연자실한 한 여성의 모습과 한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조명한다. 이 책을 붙들고 있는 동안은 그 여자의 밑도 끝도 없는 자기의심과 자기확인 작업에 어느 누구도 채무관계유효상실처럼 그렇게 쉽고 간편하게 훌훌 풀려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문을 바라본다. 모리스의 서재와 우리들의 침실 문을. 문은 닫혀져 있다. 그 문 뒤에서 무엇인가가 엿보고 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절대로. 시간과 생명을 정지시킨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움직이리라는 것을. 그러면 문은 천천히 열릴 것이며, 나는 그 문 뒤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다. 서서히, 가차없이. 나는 지금 문지방에 서 있다. 내 앞에는 이 문과 그 뒤에서 엿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두렵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구원을 청할 수는 없다. 나는 두렵다.


―『위기의 여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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