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고정관념 | 프랑시스 퐁주 지음
『장자』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오는 ‘성심(成心)’이란 단어가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돈다. 어떤 이루어진(고정된) 마음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시비를 가리는 사태란 “오늘 월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다는 논지 아래에 언급되는 이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결과적으로 머리가 아파진 나는 도리 없이 그 아픔을 응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인데, 그러고 있노라니 장자가 전하려 한 맥락과는 관계없이 한 생각이 스친다. 성심(成心)이란 그 자체로 자신의 극인 변화(變化)를 전제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을 붙잡아 더 나아가 보니 새삼스럽게도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전부 이런 대립쌍을 전제로 분화하는 세포분열체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끝을 모르고 분화하는 시시비비와 이분과 상대, 그것이 물리와 존재의 세계를 관통하는 일획의 창과 같고, 이 창으로는 만물의 변화 혹은 변화하는 만물의 진상을 결코 아우를 수 없으리라는 것 등을 말이다. 성심(成心)을 입에 올린 순간 변화(變化)가 역설적으로 환기되는 어법, 이 어법은 [성심(成心)을 경계키 위한] 부정의식의 소산이겠지만 그 부정의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이며 전체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부정태 안에서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실재, 이것이 언어의 운명일 수밖에 없는 건가? 되묻고 있으려니 문득 목이 멘다.
퐁주도 목이 메어서 글을 썼을까? 그것이 이유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알아듣기 힘든, 울음 같은 말들만 늘어놓은 것일까. 그가 쓴 글은 소설로도 볼 수 없고 평론으로도 볼 수 없어 시로 분류되었다고 하는데 오로지 시밖에 될 수 없(었다)는 작품들을 들추고 있으려니, 시의 본령이란 것이 ‘서정’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부정의식’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솟는다. ‘말’을 부정하고 ‘언어’를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시. 물론 이 시가 현재 시라는 형태로 씌어지는 것들과 반드시 일치한다는 순진한 주장을 할 생각은 없다. ‘시적인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 많은 이들 중에 퐁주를 시인으로 만든 자들이 속해 있고, 눈 밝은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퐁주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들의 연쇄)에 그저 감읍할 뿐. 이 감읍의 나날 동안,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신뢰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야…….
글 쓰는 이유
1
시인이 되거나 시인으로 남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떤 절대적인 이유들이 필요했었다는 사실이 납득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첫 번째 동기는 아마도 우리가 사고하고 말하도록 강요당하는 것들, 인간의 천성이 우리로 하여금 관계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한 환멸이었다.
일들의 되어가는 모양이 수치스러워서 우리 위를 지나가는 그 모든 화물 트럭들, 우리들 삶의 단순한 배경 그 훨씬 이상을 이루고 있는 공장들, 제조소들, 상점들, 극장들, 공공건물들이 수치스러워서, 우리의 주변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이 비열한 소동이 부끄러워져서, 우리는 인간들보다 훨씬 강력한 대자연이 열 배는 더 적게 소리를 내며 인간 속의 자연―나는 이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좋다! 우리가 한 인간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하는 것이 설령 우리 자신들이라고 하더라도, 침묵 속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그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말 속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말이다. 혹은 더 나아가서 말은 그저 말이다.
오 인간들! 무정형의 연체동물들, 거리로 무리지어 빠져나오는, 시간의 발걸음이 으깨어버리는 우글대는 개미떼! 당신들의 거처는 당신들 진정힌 피의 평범한 향기인 말밖에 없다. 당신의 심사숙고는 당신을 구역질나게 하고, 당신의 호흡은 당신을 숨 막히게 한다.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표현은 서로를 먹어치운다. 이런 말들, 저런 풍습들, 오 사회! 모든 것이 말일 뿐이다.
2
말 자체라기보다는 말이 수많은 더러운 입술에 물들여놓은 관습 때문에,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말하기를 결심하는 일에도 어떤 용기가 필요하다. 너무나도 불결한 넝마 더미, 그것이 우리에게 뒤적거리고, 흔들고, 위치를 바꾸어놓도록 주어지는 것이다. 내심 우리는 침묵하고 싶다. 좋다! 도전에 응하자.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어떤 한 인간이 도대체 왜 말을 해야만 하는가? 흔히 그렇게 말해지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 침묵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나는 침묵하는 사람들에게만 말을 하고 있다―선동의 작업―뒤이어 그들을 그들의 말에 따라서 판단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말해지지 않는다면 나는 예의 질서와 연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다. 경험에 의해 알고 있지 않다면 그런 말은 내게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매순간 말의 깜부기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체계 속에서는 침묵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
유일한 출구는 말에 대항하여 말하는 것이다. 말이 스스로를 왜곡함으로써 우리를 몰고 가는 수치 속으로 말을 우리 자신과 함께 이끌고 가는 것.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일단 납득하기만 하면 그 이유는 단연 절대적이고 위협적인 것이 된다. 인내는 나의 취미에 맞지 않는다는 식의 자존심을 꺾는 비겁함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더 이상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