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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인간

지정환, 무에서 유를 이루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by 김담유


벨기에 청년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 첫 선교지로 한국을 선택하다


1959년 12월 8일 부산항, 훗날 지정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Didier t'Serstevens)가 한국 땅에 도착했다. 당시 만 28세, 벨기에 사람이지만 대한민국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 뼛속까지 차가운 바람이 불던 날, 전쟁으로 피폐해져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땅을 일부러 찾아왔다. 유럽에서 출발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거친 뒤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경유해서 한 달 넘도록 배를 탔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전주를 향해 열 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차로 달렸다. 그의 앞길에는 자갈밭뿐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신의 축복이 가득했다.


1931년 1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2세기에 기사 작위를 받은 귀족 집안의 자제로 무던하게 성장했다. 살림이 풍족했어도 부모님으로부터 철저한 경제 관념과 절제의 미덕을 배우며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었던 꼬마 디디에. 그가 신부가 되겠노라 회심한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친가와 외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교 집안이라서 세대마다 한 사람 이상은 성직자의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전쟁 후 참혹한 세상에 뭐라도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런 그에게 사제 성소의 길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해외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가 처음부터 한국에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 성베드로 중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예비 신학생 시절,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갔다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틀어주는 주요 뉴스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반도가 어디지?’ 그날 디디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국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앞으로 자신이 한국에서 60여 년을 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한 디디에는 해외 선교 사제를 양성하는 루뱅대에 진학해 2년간 철학을 공부하면서 벨기에 가톨릭 전교협조회에 가입했다. 협조회는 소속 신부들을 해외로 자체 파견하기보다 선교지의 주교 밑에 교구 신부로 보냄으로써 그들이 주민들과 일치를 이루며 공동체를 꾸려나가도록 장려했다. 이런 사목 방향이 디디에와 잘 맞았다. 그때까지도 첫 선교지로 아프리카를 염두에 두었던 디디에를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한 한국으로 인도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루뱅대에서 만난 한국인 이효상(제6~7대 국회의장 역임)과 장병화 신부(마산교구장 역임)였다. 전쟁으로 늘 위험이 도사리는 곳,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고 외국인 신부가 많지 않으며 고국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 디디에는 그 황폐한 땅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다. 이후 그는 루뱅예수회 성알벨도 신학교에서 4년간 신학을 공부한 뒤 마침내 1958년 3월 사제 서품을 받고 런던대로 향했다. 그곳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습득한 뒤 한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정의가 환하게 빛나는 존재, 임실 치즈의 아버지가 되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전주에 도착하자, 김이환 부주교가 그를 맞아주었다. 부주교는 벨기에 청년 신부가 하루빨리 적응하기를 바라며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디디에의 이름 첫 자(우리말로 발음하면 가장 가까운 성이 ‘지’)와 김이환의 이름 끝 자를 합쳐서 지정환(池正煥). ‘정의가 환하게 빛나는 존재’라는 이름을 얻은 지정환 신부는 평생 그 이름처럼 살게 될 사목지를 배정받았다. 1960년 3월 전주 전동성당 보좌 신부를 거쳐,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부안은 전주와 달리 씨 뿌릴 땅이 부족해 굶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당시 부안성당은 미국에서 남아도는 밀가루를 매달 40포대씩 원조받았는데, 지 신부는 이 밀가루를 밑천 삼아 개간 사업을 펼쳤다. 원조받은 밀가루를 먹어서 오늘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부안 주민들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바다에 잠긴 땅 100정보(30만 평)를 개간하여 가구당 1정보(3000평)씩 나눠주었다. 그러느라 식복사 월급을 주지 못해 성당 근처 중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해야만 했다. 화교 주인이 보다 못해 저녁에 팔다 남은 만두를 아침으로 드시라며 지 신부에게 건넸지만, 매 끼니를 기름진 중국 음식으로 해결하다 보니 쓸개에 이상이 생겼다. 당시 한국에는 담낭 절제 수술을 하는 곳이 없었다. 결국 5년 만에 벨기에로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6개월 후 다시 건강해진 몸으로 돌아왔지만, 부안 사람들은 모두 땅을 팔아 떠나고 없었다. 이 일로 크게 상처받은 지 신부는 다시는 한국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한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1964년 5월 임실성당에 주임 신부로 부임하면서 물거품처럼 스러졌다. 군 소재지인데도 고등학교 하나 없는 곳, 부안보다 더 척박한 곳에서 지 신부는 고민이 깊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임실은 산악 지대여서 쌀이나 곡물을 키울 땅이 현저히 부족했다. 척박한 야산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마을 청년들은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때 지 신부는 한 생각 돌이켰다. ‘풀밖에 없다는 것은 곧 풀이 넘쳐난다는 뜻이 아닌가? 없는 것 한 가지를 있는 것 한 가지로 바꿔보자. 그래, 산양을 키워보는 거야!’ 당시 지 신부에겐 동료 신부가 나눠준 산양 두 마리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동물의 젖을 먹는 일이 낯설었지만 산양유가 환자들 회복에 좋다는 소문이 있었다. 지 신부는 청년 열두 사람과 산양을 키우기로 의기투합하고 조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자 산양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문제는 우유가 보편화되지 않았고 특히 산양유는 주변 환자나 병원에만 공급되어 청년들이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팔리지 않는 산양유가 너무 많아 매일 버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지 신부는 마음이 타들어 갔다. 그때 주님의 계시인 양 ‘치즈’가 떠올랐다. 치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청년들과 비눗갑, 약탕기, 다싯물 채까지 동원해 치즈를 만들고 벨기에 가족에게 돈을 융통해 성가리에 첫 치즈 공장을 세우며 악전고투하기를 3년, 결국 지 신부는 두 손을 들었다. 유럽 현지에서 제대로 배워오지 않으면 치즈로 임실을 일으킬 일이 요원했다. 1969년 8월, 그는 조합원들에게 3개월 후를 약속하고 떠났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를 거치며 카망베르, 체다, 모차렐라 치즈 제조법을 차례차례 배우고 희망에 부푼 채 지 신부는 정확히 3개월 후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사람들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열두 명 가운데 열한 명이 산양을 팔고 떠나버렸다. 단 한 사람, 부안 출신의 신태근만이 지 신부를 기다렸다.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를 구별하는 하느님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 단단한 알곡 신태근의 우유로 지 신부는 치즈를 만들었다. 더불어 임실 청년을 채용하여 유럽에서 직접 배운 치즈 제조 기술을 하나씩 전수했다. 훗날 자신이 임실을 떠나게 되더라도 치즈 산업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사람과 조직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간난신고 끝에 그들은 까망베르와 체다 치즈를 만들어냈고, 조선호텔에 납품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절마다 맛이 달라지는 산양유 때문에 치즈 맛까지 달라지는 위기가 닥쳤다. 지 신부는 이때 산양 우유를 젖소 우유로 바꾸는 혁신을 과감히 단행했다. 지 신부의 결정에 반신반의하던 조합원들도 젖소로 바꾼 뒤 우유 생산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치즈 맛까지 달라지자 모두 산양을 처분하고 젖소 사육에 올인했다. 이로써 치즈 생산과 판매가 안정화되었고, 조합원들은 신용협동조합과 임실치즈공장을 연계하여 임실치즈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된다. 한국 치즈의 메카 임실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농민과 장애인의 친구 지정환, 하느님 곁에 영원히 잠들다


임실 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치즈를 만드는 동안, 지 신부에겐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1976년 몸이 마비되는 다발성신경경화증이 찾아온 것이다. 이미 치즈 공장을 비롯해 소유권과 운영권 모두를 임실 주민에게 양도한 뒤였지만, 판로 개척과 농민 교육을 뒤에서 떠받쳐주던 그였다. 잡초뿐이던 천형의 땅 임실에서 농민들이 스스로 자립의 길을 걷도록 주야를 잊고 뛰어다닌 그에게 하느님도 참 무심했다. 지 신부는 또다시 벨기에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3년 후 어김없이 돌아왔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채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그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결코 좌절하는 법 없이 전주에서 제3의 삶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장애인들의 재활과 자립을 돕는 공동체 ‘무지개가족’을 설립하고 장학재단을 조성했다. 그를 돕는 일꾼도 하나둘 나타났고, 임실치즈신용협동조합과 지정환임실치즈피자에서 그에게 월마다 일정한 수익금을 보내주었다. 그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물적 지원을 무지개가족과 장학재단에 투여했다. 그렇게 2019년 하느님 곁으로 영원히 떠날 때까지 그들 곁을 지켰다.


한국에서 60여 년 동안 하느님의 정의를 환히 빛낸 사람 지정환, 이 험난한 길에서 바라던 것은 단 하나였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의로운 이들이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그는 언제나 흔쾌히 말했다. “치즈로 기적을 만든 임실은 내 고향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룬 것입니다.”



* 원광대학교 HK +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지역인문학센터, <전북의 무형 인문자산을 만나다 2>(이야기 마실 5)(2021) 기고


* 박선영, <치즈로 만든 무지개>(명인문화사, 2007) 참고

* 박선영, <지정환 신부>(명인문화사, 201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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