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의 푸른 보물 옥정호를 찾아서

by 김담유

그리운 임들의 마을, 맑고 푸른 옥정호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물이 맑다고 했던가. 살아서는 남원, 죽어서는 임실이라는 전라도 속담도 떠오른다. 산세와 물색이 뛰어나다는 임실을 찾아가는 날, 지명의 유래가 궁금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 백제 시대에는 잉힐군(仍肹郡)이라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금의 임실군(任實郡)으로 정착되었는데, 한자에서 소리만 빌려왔을 뿐 ‘임’은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을, ‘실’은 골짜기 마을을 각각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그리운 임이 사는 골짜기 마을, 아니 골짜기여서 사람이 귀하고 그래서 누구라도 깊게 정들었을 마을. 그래서 영원히 묻히고 싶은 땅. 그곳 임실의 랜드마크인 옥정호(玉井湖)가 여정의 최종 목적지다.


스마트폰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옥정호를 확대해서 들여다보니, 과연 푸른 용이 승천하는 상이다. 아니 승천하기 전에 열 번 이상 용트림하며 골과 골 사이를 휘젓는 모양새다. 가상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보는데도 물길의 기운이 범상치 않다. 그런데 이름은 옥처럼 푸른 호수 옥정호라니, 형세와 이름 간의 간격은 어찌 된 사연일까?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옥정호는 원래 자연 호수가 아니었다. 운암이나 갈당이라 불리던 낮은 저수지였는데, 1965년에 섬진강 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수위가 높아지고 가옥과 경지가 수몰되면서 형성된 인공 호수다. 옥정이라는 이름도 사연이 있다. 조선 중기에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옥정(玉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에는 댐이라는 기술문명의 산물이 없었으니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섬진강 줄기만 보고 지금의 깊고 넓은 호수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터, 산골 중의 산골인 옥정의 앞날을 짚은 스님의 도력이 엄청났나 보다. 이후로 운암호나 섬진호로 부르던 것을 옥정호라 고쳐 부르게 되었고, 동네 이름도 옥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더 확장해서 옥정호를 갈피갈피 살펴보니 임실군 동북쪽 머리에서 시작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흘러내려 가는 섬진강 물길이 어마어마하다. 유역면적 763㎢, 저수면적 26.3㎢, 총저수량 4억 6,600만 톤. 이 호수에 담긴 물이 5억 톤에 가깝다면 댐 아래 지역은 가뭄에도 큰 걱정 없겠다. 이 엄청난 호수 가운데 섬 하나가 안온하게 놓여 있다. 원래 산마루 능선이었는데 섬진강댐 건설로 주변이 잠기면서 섬이 되어버렸다. 꼭 붕어처럼 생겨 붕어섬이라 불린다는데, 원래 이름은 ‘산 바깥 능선의 날등’을 뜻하는 외앗날이라고 한다. 이 외앗날의 운무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고 소문이 났다. 특히 해가 뜨기 전에 솜처럼 부풀어 오른 운무를 국사봉에서 바라보면 신령스럽기 그지없단다. 그러다 산등성이로 해가 솟아오르고 운무가 서서히 걷히면서 외앗날이 드러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탄성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평야 지대에서 온 사람에게는 산정에 이리 깊고 넓은 호수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광경 자체가 이미 신비롭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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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를 닮은 신비로운 섬, 외앗날을 엿보다


옥정호와 외앗날을 한눈에 조망하기 좋다는 국사봉(國士峰)에 올랐다. 임실군 운암면에 위치한 국사봉은 해발 475미터의 작은 산인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국사봉전망대주차장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목책 계단을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는 옥정호가, 오른편으로는 노령산맥이 펼쳐지면서 시야가 시원스럽게 트인다. 산 위의 산을 걷고, 물 위의 물에 떠 있는 기분이랄까. 산정에 인공 호수를 품고 있는 충주나 단양도 단연코 아름다운데 임실의 옥정호는 그곳보다 사람의 손발을 덜 타서 내밀한 속내가 잔잔하게 잘 간직된 모양새다.


20분쯤 오르니 외앗날 전망대가, 40분쯤 오르니 국사봉 정상 표지석이 나타났다. 두 곳 모두 외앗날을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다. 해맞이 관광객이나 등산객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상황도 염두에 두었는지 바닥에 목재를 깔아 널찍하고도 안전하게 잘 정비했다. 전망대 가장자리는 깎아지르는 듯한 벼랑이라서 아찔한 느낌이 들지만, 난간을 붙잡고 서면 시원한 미풍이 얼굴에 와 닿는다. 햇볕도 알맞게 따사롭다. 어느결에 마음의 긴장이 풀렸는지 난간에 기대 외앗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 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붕어섬 안에 붉은 벽돌로 지은 집 한 채가 보였다. 집 주위로 신경 써서 조경한 나무들과 너르게 잘 관리한 땅도 보였다. 물에 갇혀 고립돼 보였던 붕어섬은 농사도 짓고 꽃도 가꾸는 곳이었던 것이다. ‘와, 저기 사람이 사는구나. 누굴까? 어떻게 건너갔지?’ 사람의 집이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신비가 손안에 잡히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날의 백미는 단연코 호수의 윤슬이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물안개와 운무를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옥정호를 가득 메운 채 반짝이는 잔물결의 파노라마에 입이 벌어졌다. 선경이 따로 없었다. 닥터피쉬 가라루파가 사람의 피부를 핥아서 죽은 세포를 먹고 새 살을 남겨주듯이, 수면 위에서 온몸을 뒤채며 반짝거리는 물결의 언어가 호수의 깊은 아픔과 슬픔을 대신 쓸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울지 마, 괜찮아. 우리는 빛나는 존재야.’ 그러고 보니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고요한 진경이 다름 아닌 아픔과 슬픔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수몰된 마을과, 쫓겨난 사람들과, 잠겨버린 경작지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품고 오랜 세월 멍든 가슴을 간직해온 옥정호. 너무나 잔잔해서, 한없이 고요해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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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공원 망향탑 앞에서 호수의 눈물을 보다


옥정호의 윤슬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더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뿐해진다. 마음이 잔잔한 빛무리 속에서 설핏 잠들었다 깨어난 느낌이다. 붕어섬을 더 가까이 보고픈 마음이 들어서 국사봉 아래 옥정호 마실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국사봉 전망대를 천천히 내려와, 주차장 밑 팔각정을 지나, 3차선 도로를 건너 바람의 언덕에 섰다. 국사봉에서 맞았던 바람과는 또 다른 결의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바람도 다양한 톤이 있구나.’ 물론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내가 맞이하는 바람의 톤을 결정할 터이다. 적어도 지금 옥정호에는 매섭고 묵직한 칼바람이 아니라 은은하고 잔잔하고 미풍이 불었다. 신의 가호처럼.


언덕 바로 아래 오른편에 마실길로 안내하는 목재 계단이 보인다. 천천히 내려가니 호수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다. 한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기 좋은 오솔길이 쭉 펼쳐지고, 그 길 따라 걸으니 호숫가 바위 지대에서만 핀다는 민대극의 붉은 꽃들이 어여쁘다. 뱀이 출몰하니 지정된 길로만 가라는 안내판을 보고 몸을 움츠리기도 했는데,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할 때마다 잔잔한 호수로 시선을 돌리면 또 스르르 이완된다. 이 고즈넉한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 요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공원의 언덕배기로 바로 오르려다가 오른쪽 수변 산책로로 길을 잡았다. 이 길을 걸으니 마실길로 내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사봉에서 옥정호를 한눈에 담는 것도 좋았지만 지근거리에서 호수를 느끼는 일도 특별했다. 인체는 소우주여서 항시 삼라만상 대우주와 감응하고 상응한다는데, 거대한 흐름과 속도가 느껴지는 강과 바다와 달리, 호수는 어떤 출렁임도 없어서 시공이 멈추는 느낌을 준다. 얕고 비속한 인간 세상의 모든 출렁거림을 잠재울 정도로 옥정호가 크고 넓고 깊은 존재여서 더 그럴 것이다.


마침내 요산공원을 빙 둘러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에는 물에 잠긴 마을과 실향민을 달래고 위로하는 기념비가 한 주 서 있었다. 비에 새긴 절절한 추모시를 읽으니, 와야 할 곳에 비로소 왔다는 생각이 든다. 산정에 물을 가둠으로써 가뭄 걱정을 덜고 전기를 만들어 문명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물 속에 묻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는 갈 수 없는 내 집이 그리울 때, 내 고향의 바람과 공기가 그리울 때, 사람들은 이곳에 와 서성이고 거닐겠지. 그러다 옥정호의 한없이 잔잔한 미소에 위로를 받겠지. 그러고 보니 옥정호 전체가 거대한 눈물인 것만 같다. 먼 옛날 그 스님은 옥정호의 눈물까지도 미리 내다보셨겠다 싶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여정을 위해 차에 올랐다. 정읍 방향으로 리아스식 강기슭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데, 그 길을 따라 도보 여행자를 위한 옥정호 물안개길이 펼쳐진다. 그리고 물안개길 위편으로 운암리와 마암리를 잇는 749번 지방도로가 내달린다. 이 호반 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될 만큼 빼어난 드라이브 코스다. 이 길을 따라 천천히 달리면서, 옥정호 섬진강의 눈물이 썩지 않고 푸르디푸른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한번 길을 잡은 물은 고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쉼 없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 가 닿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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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광대학교 HK + 동북아다이멘션연구단 지역인문학센터, <전북의 유형 인문자산을 만나다 2>(이야기 마실 4)(2021)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