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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인간

기찻길 옆, 순례길

용산을 걷다 | 보보담 2019년 겨울 통권 35호

by 김담유

한국 가톨릭교회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자생한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유학의 국풍이 서슬 퍼런 시기에 서학에 눈을 뜬 평신도들이 스스로 공부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인 만큼, 기나긴 박해와 순교의 역사는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792년 신해박해, 1795년 을묘박해, 1797년 정사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처형된 사람 수가 1만 명을 헤아린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 순교자까지 더하자면 한국의 천주교는 그야말로 피로 지어 올린 성전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의 이 같은 자생적 탄생이 전 세계에서도 매우 드문 사건임을 알고 있는 바티칸 교황청은 1984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를 성인품에,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비롯한 124위를 복자품에 올렸다.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가 고문당했거나 처형당했거나 매장되었던 서울 순례길을 2018년 국제 순례지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화려한 용산의 뒤안길엔 순교 성인들의 발자취가 가득하다.



믿음의 길, 처형의 길


천주교 서울 순례길 중 ‘일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날은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빗줄기가 종일 내렸다. 소설 지나 대설을 앞둔 시기여서인지 굵지 않은 빗줄기에도 등골에 한기가 느껴졌다. 손과 발은 그보다 일찍 시렸다. 앞으로 들이치는 비바람을 막아보려 우산을 자주 앞으로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한 번 젖은 자는 두 번 젖지 않는다 했던가. 운동화가 젖고 바짓단이 젖기 시작하자, 젖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마음 자체를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차도를 내달리는 바퀴들 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귀는 물론이고 몸 전체가 공명통이 된 듯, 무자비한 바퀴들 밑에 깔려 수만 갈래로 부서지는 빗줄기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꽂혔다. 때마침 다행하게도 약현성당 정문이 보였다.


중림동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보다도 먼저 축성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기나긴 박해 시대를 지나 1886년 한불 수교가 체결된 이후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자, 한국 천주교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조선의 대표 처형지였던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다 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약초가 많이 나던 고개여서 약현(藥峴)이라 불렸다고. 그러고 보니 약현성당은 유독 아픈 이들이 자주 찾는 성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쪽 언덕길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을 올랐다. 약현성당의 백미는 단연코 이 십자가의 길일 것이다. 예전에 중림동 근처에서 일할 때 심신이 지칠 때면 자주 찾았던 터라 몸이 머리보다 먼저 기억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처형당하는 장면을 묵상하는 제12처에 이르러서야 한숨 돌리던 내가, 제5처와 제6처에서 그만 발길이 묶였다.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는 키레네 사람 시몬과, 피땀으로 얼룩진 예수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는 베로니카가 눈에 낯설었던 것이다. 예수가 사람 낚는 어부로 키우려고 함께 수도했던 열두 제자는 모두들 어디론가 도망가고,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만이 예수의 마지막 처형 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왜 이 장면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일까. 문득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아포리즘이 떠올랐다.


역사 속 조연들을 새롭게 발견하며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나자, 언덕마루에 소담하면서도 기풍 있게 서 있는 고딕풍 대성전이 보였다.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 잠시 신자 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아무도 없는 성전에 들어서면 신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처럼 강하게 느껴진다. 신인합일이 이런 거라면 나는 거의 매일 그분과 합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상 속에 있지만 결코 섞이지 못하는 성품을 지닌 내게 외로움은 숙명 같다. 하지만 외로울수록 고요하고, 고요할수록 평화로워지는 신비를 텅 빈 성전에 홀로 있어본 이는 알 것이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다시 걷고 싶어졌다.


성전을 나와 뒤뜰 오른편에 위치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으로 향했다.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약현성당 바로 앞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을 기념하는 곳. 순교자 명단에는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도 있었다. 그들은 교인들이 위험에 처하자 일부러 자수하여 처형당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믿음 때문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너를 살리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는 의인이 세상에 의외로 많다는 사실. 200여 년 전, 왕을 따르지 않고 신을 믿은 이들을 거침없이 효수하며 맹위를 떨쳤을 서소문 형장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내 머리와 가슴에 십자 성호를 긋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역사가 된 유명 씨와 미처 역사가 되지 못한 무명씨들을 함께 기억하며.


예수의 마지막 처형 길에는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이 함께했다. 약현성당 기도 동산.


아무도 없는 성전에 들어서면 신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처럼 강하게 느껴진다. 약현성당 내부.



문명의 길, 신심의 길


다음 순례지 당고개 순교성지로 가기 위해 약현성당을 내려와 청파로로 접어들었다. 빗줄기는 그새 더 굵어졌다. 예전에 서부역이라 불리던 철도 소화물 취급소를 좌측에 두고 걷고 있으니 서울역으로 수렴되는 다수의 시커먼 철로가 언뜻언뜻 보였다. 플랫폼에 서면 어디론가 떠날 생각에 마음이 두근대는데 바깥에서 건너다보고 있으려니 위화감이 들었다. 문명의 길, 근대의 길, 산업의 길. 아니 그 눈부신 길들의 뒤안길. 건물과 골목 사이를 우후죽순 가로지르는 전선마저 내내 위태로워 보였다. 두 발로 걷는 자의 위치란 이런 것이구나. 메가시티 서울은 대체 언제쯤 건설의 역사를 멈출까. 철로의 뒤안길은 여전히 산업화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근대 문명과 현대 문화가 뒤섞인 청파로에는 피로한 순례자가 잠시 쉬어갈 만한 벤치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명상하기 좋은 길이었다.


상념 속에 30여 분 넘게 걷고 있으니 어느덧 남영역 사거리였다. 당고개 성지로 가려면 오른쪽 원효로로 들어서야 하는데, 좌측에 위치한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 눈길이 머물렀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신념 때문에 누군가 수없이 죽어나간 길 위에 성지가 들어서고 기념관이 들어선다는 것. 과거의 피울음을 오늘 우리가 무심코 딛는 발걸음이 오히려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그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며 봄이 돌아오고 꽃이 핀다는 것.


원효로에 들어선 뒤에도 내내 어둡던 마음은 당고개 순교성지에 이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걷혔다. 성지는 삭막한 철로 주변과 달리 쾌적하게 잘 조성된 용산e편한세상아파트 단지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데 무슨 성지가 있겠나 싶은 곳에 동굴처럼 안온하게 들어서 있어 놀라운 곳. 그래서였을까. 비녀 꽂고 한복 입은 성모상이 꼭 나를 위해 팔을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서 오렴, 아이야. 이리 와 내게 안기렴.


성지 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아홉 분의 성인과 함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가 참수된 곳으로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땅이었다. 최양업 신부가 누구인가. 그는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로서, 매년 2800킬로미터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다 그야말로 길 위에서 순직한 ‘땀의 순교자’다. 그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남편 최경환이 매를 맞다 순교하고 젖먹이 막내가 감옥 바닥에서 죽어가자 남은 아이들이라도 살리고자 신앙을 부정하고 감옥을 나온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마카오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수감되자 이제는 모성애마저 극복하고 신앙을 지켜낸다. 최양업의 동생 야고보는 어머니가 처형되기 전날 사형집행인에게 동냥한 돈을 건네면서 그녀가 고통을 덜 느끼도록 단칼에 목을 베어달라 부탁했다고.


잠깐의 배교로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어머니와, 어떤 성인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았던 아들 신부와, 그의 갸륵한 형제들 이야기가 지친 순례자를 위로하는 곳. 철로의 뒤안길을 걷느라 어수선해진 마음이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어머니 신심을 묵상하며 향초 세 개에 불을 밝혔다. 하나는 노쇠한 나의 어머니를 위해, 하나는 그날 마침 운명을 달리한 지인의 어머니를 위해, 하나는 어머니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 모든 여인들을 위해.


어서 오렴, 아이야. 이리 와 내게 안기렴. 비녀 꽂고 한복 입은 성모상이 꼭 나를 위해 팔을 벌리고 있는 것만 같다.


모성 신심이 가득한 당고개 성지 성당.



교육의 길, 신학의 길


어머니의 안온한 품에서 기운을 회복한 뒤, 용산 성심신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용산 성심신학교는 성심여고 교내에 위치해 있었다. 당고개 성지에서 멀지 않았지만 여러 번 꺾였다 휘도는 골목길을 걸었다. 성지와 성지 사이를 모세혈관처럼 잇고 있는 원효로동 골목을 걷노라니 고즈넉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사람 사는 동네로구나. 동네 내과, 동네 미용실, 동네 제과점, 동네 세탁소. 그렇게 동네의 속살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툭 트인 언덕마루에 두 팔 벌린 예수 성심상과 성심여고 교사가 보였다. 정문을 지나 그 길로 내처 쭉 오르니 고딕풍 예수성심성당과 성심기념관이 나왔다. 그리고 두 건물 사이에 성모 언덕이 다소곳이 들어앉아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매년 성모의 달 5월이면 이 언덕이 꽃으로 물들겠구나, 꽃보다 예쁜 소녀들로 재잘재잘 꿈동산을 이루겠구나, 싶었다.


용산 성심신학교는 현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의 전신으로, 제천에 있던 최초의 신학교 배론 신학당이 병인박해로 폐쇄당하고 그 뒤를 이은 여주 부엉골 신학교가 1887년에 이곳 용산으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가톨릭 신학교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이니, 깃들어 있는 역사도 남달랐다. 세 번째 한국인 사제인 강도영 신부를 비롯해 105명의 사제를 배출했고,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박해 시대 순교 성직자들과 제1~8대 조선교구장들의 유해를 모셨다고. 브뤼기에르, 앵베르,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리델, 블랑, 뮈텔…. 한국의 평신도가 순교의 역사를 써나가는 동안 그들을 끌어주고 밀어주던 외국 성직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조리고 있으려니, 놀랍게도 평화가 감돌았다. 피부색을 넘어서고, 국경과 언어를 넘어서며, 세월과 망각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될 것 같았다.


한국 천주교 신학의 발상지, 예수성심신학교와 예수성심성당.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정갈하니 아름다운 예수성심성당.



길 끝의 길, 침묵의 길


스테인드글라스가 정갈하니 아름다웠던 예수성심성당에서 성체 조배를 마치고 나오니 사위가 제법 어두워지고 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했다. 마지막 순례지 새남터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그전에 왜고개 성지를 빼놓을 수 없었다. 왜고개는 옛날에 기와와 벽돌을 굽던 곳으로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지을 때 이곳 벽돌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현재 군종교구청과 국군중앙성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새남터에서 순교한 일곱 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두 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곳이다. 또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미리내 성지로 이장되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관청의 눈을 피해 순교자들의 시신을 몰래 옮기고 매장해야 했을 교우들의 시린 손과 발, 무거운 어깨가 애쓰지 않아도 절로 상상되었다. 왜고개의 역사를 알고 나니 서소문과 새남터를 잇는 용산이 그 자체로 성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로서 허위의 상징 같던 이곳의 문물과 풍요가 처음으로 그 안에 숨겨진 고요의 서사를 드러내면서 마땅하게 느껴졌다.


원효로동 골목을 빠져나와 청파로로 들어서니 멀리 용산역이 내려다보였다. 고단한 운명을 왜고개에 잠시 의탁했을 옛 순교자들을 생각하며 걷다가 어느덧 용산역을 지나 지하도를 건너 한강대로로 접어들었다. 국군중앙성당은 다행히도 문을 닫지 않았다. 정문을 지나 오르막을 돌아 만난 가파른 절벽 위에, 옛날에는 매장처였을 기도처가 보였다. 요즘 거의 사라지고 없는 장괘가 놓여 있어, 정말이지 오랜만에 무릎을 꿇었다. 젖은 숲에서 젖은 새가 날아올랐다. 내 두 무릎도 젖었다.


새남터를 향하는 길은 춥고 어둡고 배고팠다. 아이러니했다. 순례의 끝에 이르러 인간적 본능이 심신을 갈마든다는 것. 종일 거룩했던 영성이 추위와 허기로 가볍게 무너져 내린다는 것. 정말이지 이런 인간에게 순교란 무엇인가? 어떤 믿음이라야 추위와 배고픔 따위를 훌쩍 뛰어넘어, 압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가? 무엇이 어린 피붙이마저 떨치고 죽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나의 믿음은 그 정도로 강력한가? 지금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충만한가? 아니 나는 진정 무엇을 신앙하는 사람인가? 몸이 칭얼대는 소리와 마음이 부르짖는 소리를 다독이며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새 강바람이 콧속에 스며들었다. 한강변 백사장, 억새와 나무가 무성해서 새나무터(준말 새남터)라 불렸다는 그곳에 기괴할 정도로 높이 솟아 있는 누각이 보였다.


새남터 순교성지는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열네 명의 성직자 가운데 열한 명과 초기 교회를 이끌던 평신도 지도자 세 분이 순교한 곳으로, 1984년 103위 시성식과 함께 한국 천주교 200년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하고 이곳을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높고 귀한 존재일수록 도성에서 가장 먼 곳까지 시전하듯 끌고 가 처형하고 싶었을 관가의 의도를. 가장 처참하게 죽여 압살해야만 했을 기이한 믿음에 대한 그들의 공포가. 이곳은 1456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이 충절의 피를 뿌린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


형장 터는 어디일까?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성당 앞뜰을 두리번거리다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라는 붉은 말씀을 만났다. 그 위를 “삶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사랑입니다”라는 흰 말씀이 감싸고 있는 것도 보았다. 두 문구가 새겨진 재단 앞쪽에는 형장을 재현한 모래판이 유리로 봉해져 있었고, 유리 속 하얀 모래 위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맨발이었다. 길 끝에 이르면 무엇이 보일까? 일치의 길을 걷는 동안 내내 궁금했는데, 이걸 보려고 여길 왔구나 싶었다. 맨발의 발자국이 향하는 곳을 눈으로 좇아가니 참수로 머리를 잃은 몸이 빛의 세계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교자 형상 앞에서, 그저 한참을 서 있었다. 추위도, 배고픔도, 질문도 잊고. 성호 긋는 일조차. 그러고 보니 빗줄기가 그쳤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젖은 두 발이 먹먹했다.


목숨을 내놓고 빛의 세계로 들어올려진 존재들을 묵상하다. 새남터 형장.


순례자의 맨발. 서소문성지 대공원 벤치 위에 누워 잠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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