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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유 Nov 01. 2020

사막에 뿌리는 비

동아닷검, 2001년 11월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고등학교 시절은 아직까지도 내게 최악의 시절로 기억된다. 지방사립명문고에다 미션스쿨이라는 전통과 개성과는 상관없이 그곳은 아직까지도 내게 사막이다. 밤 열두시까지 강제로 도서관 지정 좌석에 앉혀져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정석을 들쳐보는 일들은 숨이 막혔다. 그곳은 당위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무엇이 어찌됐든 책상머리에 앉아야만 했다. 왜, 왜 그곳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나를 '은선이 동생'(같은 학교를 졸업한 언니 때문이다)이라 부르던 지리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나를 호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혜도 아니고 아녜스(내 또 다른 이름이다)도 아닌 은선이 동생! 일어나서 왜 이곳에 사막이 생겼는지를 말해봐! 칠판 위에는 남아메리카가 떡하니 누워 있었다. 선생님이 분필로 툭툭 두드리고 있는 곳은 소시지처럼 기다랗게 내리뻗은 칠레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페루와 만나는 칠레 북부 지역, 바람 한 점 없고 비 한 점 없을 아타카마 사막이었다. 


당시 그곳은 나의 오아시스였다. 세계사 시간엔 매번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위력에 눌려 진도상 생략되곤 하던 안데스 문명. 그러나 태양의 아들이 세웠다는 잉카의 나라. 아직까지도 거리마다 금과 은이 번쩍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삭막한 사막을 옆에 끼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매혹시켰다. 황금족이 사라진 까닭을 저 아타카마는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풍요로움의 배면에 자리 잡은 사막을 나는 동경했다. 아마도 그러한 낭만적 동경만이 당시의 내 오아시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내 오아시스가 발원한 까닭을 발설하라니, 이런 행운이 나에게도? 볕 좋은 날 봉당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개의 그것처럼 까무룩 감기던 눈이 번쩍 뜨였다. 저기, 그러니까 칠레의 서쪽 해안에는 페루 해류가 흐르고 있거든요? 페루 해류는 한류인데요. 한류의 영향을 받는 해안은 대개 고기압권 내에 들거든요? 더군다나 동쪽엔 안데스 산맥이 버티고 있잖아요. 거긴 고립 지역이에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요. 그래서 거긴 사막이고 앞으로도 사막일 것이고 그리고 또……. 


그날, 되는 대로 지껄인 효과는 상상보다 컸다. 지리 시간만큼은 같은 교실 어딘가에 앉아 있는 전교 1등이 부럽지 않았다. 은선이 동생이라 부르던 선생님은 어느새 나를 지혜라 부르고 있었다. 물론 그런 호명에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지만, 나는 지리가 좋았다. 지리책, 이쪽저쪽 조각 퍼즐처럼 놓여 있는 지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기이하게도 판이 보였고, 맥락이 보였고, 미래가 보였다. 나는 그런 분명함이 좋았다. 분명함과 자명함 속에 놓여 있을 때 나는 편안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시는 그런 안심에게서 퇴출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확히 언제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시가 나를 찾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긴 하다(이 점에서 나는 분명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 사적 토로담을 여기에 다 담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지루하고, 지루한 만큼 괴롭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형식을 빌려야 할 것 같으므로. 다만 시와 조우하면서 내가 추구했고 또 추구하는 것들을 일괄하면서(아, 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다니! 이건 순전히 이 글을 청탁하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담당기자의 그 거부할 수 없는 열정 때문이다)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분들과 잠시 말벗이라도 된다면 다행이겠다. 


매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풍요로움이나 아름다움에 대해 쓰든 고통이나 괴로움에 대해 쓰든, 시를 쓴다는 것은 우주와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 안에서 과거는 채색되고 현재는 변주된다. 그래서 시는 미래이다. 그 미래가 열리는 순간, 눈감고 졸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새 세상은 온 힘을 다해 몸과 마음을 열어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가 열리는 순간은 거의 매번 찰나이고, 또 그래서 매번 잊혀지니까. 남아 있는 것은 환영뿐이다. 환영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목 졸라 죽인 알튀세르의 고백처럼, 환영 또한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또한 그것은 맥락과 서사에 대한 맹신에서 멀어질 때 가능해진다. 시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망원경이 아닐까. 어느 한때, 한 곳을 고정시켜 치밀한 묘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런 연유였다. "나는 어찌어찌 했었노라"식의 진술을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더불어 했다. 지금은 비록 목소리를 버리지만, 그래서 비루하고 누추한 삶의 편린들만을 하릴없이 그려나가겠지만, 마침내 그 편린들이 삶을 완성시킬 '우주적 순간'이 나에게도 오지 않겠는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내 그런 생각에 불을 지펴주었다. 작년 여름 분단 50년을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피카소 게르니카전의 충격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작은 아니었지만 원작의 크기 그대로 놓여 있는 <게르니카>. 전시관 중앙부 얇은 조명에 모습을 드러낸 <게르니카>는 생각보다 그 위용이 압도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게르니카는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폐허가 다시 살아나다니! 사지를 늘어뜨린 아이를 붙들고 통곡하는 여자, 머리가 잘려나간 소, 목을 비틀며 포효하는 말, 부러진 칼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 병사의 힘줄 등이 한결같이 향하고 있는 곳엔 비명도 울부짖음도 없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비명이 아니라 울부짖음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폐허의 조각들을 무심히 이어 붙인 듯한, 그러나 그 무심 속에 감춰진, 오랜 시간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벼린 칼날을 느꼈다. 그 '거리(距離)'가 나를 감동시켰다. 그 거리는 <게르니카> 옆에 다닥다닥 놓여 있는 수십 장, 수백 장의 습작품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세기의 천재 화가 피카소가 벼린 칼날의 파편은 인간적이었다. 나는 그 지루하고 고되었을 노동이, 그리고 그 지점에 다다르기까지 무수히 많이 극복해야 했을 그의 '청색시대'가 폐허를 부활시켰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내 인생에도 <게르니카>를 완성시킬 날이 와준다면 이런 모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사막과도 같은 내 내면에 불을 질렀다. 그런 충동에 도리 없이 사로잡히는 날 꾸역꾸역 시를 썼다. 그리고 써나가고 있다. 



불규칙적으로 남아메리카 서해안에서 발생되는 엘니뇨현상을 두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기상 이변이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불안을 일깨우는 것일까. 그 불안을 마주할 때마다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귀지옥이 아닐 수 없다. 불안은 때로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면 위로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들의 시체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어부의 마음은 여러 번 죽임을 당하리라. 그러나 나는 엘니뇨가 사막에 비를 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엘니뇨의 반대편에서 라니냐가 꾸역꾸역 물을 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그 어떤 현상이나 사안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할 수 없어졌다. 당신이 옳다면 나는 그른 것이고 내가 옳다면 당신은 그른 것이다. 물론 둘 다 틀릴 수도,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둘 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런 것이다. 나는 '권태'로 출발했지만 당신의 시작은 '패기'나 '열정'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그래서 생겨난다. 당신의 시작이 나의 권태를 가차 없이 묵사발로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세상이라는 <게르니카>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 무쌍(無雙)한 파편이었으면 좋겠다. 이 시간(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자정이 넘었다), 잠들지 못하고 있는 무수한 사막들에 바닥까지 촉촉이 적시는 거센 빗발을 기원하며, 또 내 몫의 빗물까지 퍼다 줄 요량으로, 불행조차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시인을 기대해본다. 아, 정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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