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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유 Nov 05. 2020

다시 서정시를 옹호하며

문학과창작, 2008년 여름호

서정시(抒情詩)의 요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이 내 시 쓰기에서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부끄럽게도 얼마 되지 않는다. 10여 년 남짓, 마음의 병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끝없이 안으로만 침윤해 들어가는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그런 나는 세상은커녕 나 자신과도 섞이지 못했다. 이를테면 물과 기름처럼 ‘분열’만이 있었다. 고통의 리듬, 산문의 리듬이 방안 가득 보초병처럼 둘러싸며 짓누르던 그때, 내 마음속엔 무엇이 살고 있었을까. 살아 있는 게 있기나 했을까. 마음이 만들어낸 헛된 분별의 구조 안에서 온전히 나를 나이게 하지 못하던 시절, 그 암담하기만 하던 어느 봄날 천운처럼 한 사람을 만났다. 목련이 하늘거리고 수련이 수런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돼온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동일성’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던 것 같다. 둘 이상의 사물이 서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성질이 같은 일.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결코 불가능했던 그 일이 우리를 보고 있을 때는 가능했다. 이 ‘단순한 사실’이 바로 ‘위대한 진리’에 속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뒷목이 서늘했다. 코 앞에 와 있는 진실을 뒤통수에서 찾고 있었던 셈이랄까. ‘우리’에 집중하면서부터 나는 아플 겨를이 없었다. 내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이 뭉클뭉클 솟아올랐고 안면 가득 웃음이 번졌다. 고뇌하고 번민하는 시인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나는 치유되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시가 나를 떠나갔다. 붙잡지 않았다. 다시는 못 만날까 안타까워하는 마음조차 놓아버렸다. 놓아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철저히 빈속이 되기를 시도했다. 시를 쓰지 않아도 살 만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까닭은 그때 나를 떠나간 시는 언젠가 꺼지고 말 거품의 언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다렸다. 거품이 아닌 생명을, 참된 물결을. 세상의 모든 슬픔과 세상의 모든 기쁨, 그러니까 언어로 받아 적을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받아 적을 수 있을 때를. 그것이 가능할 만큼 넓고 깊은 존재가 되기를. 아니 지극히 거대해서 밖이 없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다[至大無外 至小無內―장자]는 신묘한 세상 그 자체가 되기를.


고도를 기다리는 부랑자들처럼 기다림에 지쳐 적막해질 때도 있었다. 공허감으로 꽉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풍선처럼 나라는 존재가 허공 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런데 이 적막이 온 곳을 가만히 추적해보노라면 기다림이라는 행위 자체에 깃든 인내의 세월이 주범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일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자는 여전히 행복하다. 소망할 것이 있고 갈망할 것이 있는 자는 지금, 어디선가, 여전히, 생을 살아갈 것이다. 오로지 기다림뿐인 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문제는 생이 다 지나간 자의 내면이다.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 여전히 숨을 쉬는 자의 영혼이다.


세상이 총천연색 컬러에서 단조로운 흑백의 스크린으로 뒤바뀌는 때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는 들려주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간섭하지 않는 것이 그의 최후의 윤리였는지도 모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났고, 세상은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도리 없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보았다. 끝없이 안으로 침윤해 들어가는 한 사람을. 그는 내가 아니었다. 너도 아니었다. 여자도 아니었고 남자도 아니었으며 아이도 아니었고 노파도 아니었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 어둠이되 어둠이 아닌 것, 그런 묘한 흐름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서정시의 요체는 서정이다. 시가 아니라 서정이다. 그렇다면 서정의 요체는 무엇일까.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시 작품 안에서 기능하는 목소리 혹은 시선의 주인공을 서정적 자아라고 정의한다. 이 자아는 시 속에 형상화된 사상과 감정의 주인으로 개인과 세계,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는 일종의 영매로 기능한다. 작품 가득 황폐한 사막뿐인 시가 있다고 치자. 이 작품에서 사상과 감정의 주인인 서정적 자아는 과연 누구일까. 사막일까, 사막을 바라보는 시선일까, 사막을 전하는 목소리일까. 서정적 자아란 인간의 신체라는 제한된 조건과 환경을 넘어서 있는 존재(활동이 가능한 무엇이)다. 그러니 굳이 사람일 필요도 없다. 이국타향 머나먼 사막으로 지금 당장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안의, 혹은 밖의 무엇이다.


서정의 요체는 서가 아니라 정이며, 정의 요체는 그렇다, 마음이다, 그중에서도 푸른 마음이다[心+靑]. 푸른 마음이란 살아 있는 마음, 생명 그 자체다. 서정시는 바로 이것과 관계하는 언어의 산사다[言+寺]. 언어란 기능 면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속세의 것일 수밖에 없는데 속세와 산사의 경계에서 씌어지는, 쉽게 해독되지 않는 이것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언어라 할 것인가, 언어가 아니라 할 것인가. (산사의) 불립문자라 할 것인가, (속세의) 시장통 문자라 할 것인가. 탄생 자체가 불온하고 존재 상태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시는 그래서 딜레마다. 경계선이고 사선이며 최후의 보루다. 이 지점에 서 있는 자들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배팅할 필요가 있다. 시란 언어 이전의 체험 없이는 획득되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체험이 진부해진 자는 언어가 진부해진다. 체험을 얻지 못한 자는 언어가 빈약해진다. 때문에 서정시인은 서정시를 쓰는 일보다 서정시를 사는 일에 열정과 에너지를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시가 쓰이지 않는 시절의 적막은 시를 살지 않는 시절의 나태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나도 세상도 암흑으로 가득 찼을 때 내 안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 입 다무는 물결을 보았다. 그 물결이 당신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대도 순전히 내 안의 무엇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바라보고 있는 시선, 품고 있는 마음, 그런 것들이 내 안에 당신이라는 물결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튤립을 바라보았다. 나는 튤립이었다. 책상을 바라보았다. 나는 책상이었다. 구름을 바라보았다. 나는 구름이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하늘이었다. 발견하는 순간 사물 그 자체가 되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온 마음을 모아 응시해보라. 거기에 튤립과 책상과 구름과 하늘과 똑같이 생긴 당신이 있을 것이다. 온 마음을 모아 귀 기울여보라. 튤립과 책상과 구름과 하늘의 심장 박동소리가 내 것처럼 크게 들릴 것이다. 눈을 감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귀를 막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물결은 가슴에서 몰려와 가슴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가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심연 속으로 되돌아가 고요해진다. 참된 서정시는 분열이 아니라 화합, 동일을 낳는다. 오로지 동일성으로만 기능한다. 니체가 일찍이 꿰뚫어 보았듯이 신의 덕목으로서의 자기동일성, 그것이 바로 서정시의 본래 면목이다.





물결


물결은 가슴에서 인다

듣는 자의 마음에서 인다

눈을 감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먼 고장 해변가 낯선 방에서

수녀도 비구니도 아닌 여자가

순례의 한 생을 끌어안고 눕는다

귀를 막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물결은 가슴에서 몰려와

가슴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가

가슴속 오래된 홀 뚜껑을 열고

물결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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