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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유 Dec 28. 2020

가을날 오후에 불러본 노래

2007년 글

일주일에 두어 번 나가는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작가 두 분과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섰다. 일행 중 한 분의 차에 올라탄 우리는 하나같이 아침잠을 설친 탓에 밥 생각이 절실하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너무나 당연하게도, 가을의 끝자락이 선사하는 선물인 양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땡땡이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 전부터 물색해놓은 서해 등지를 주워섬겼고, 차를 몰던 선배 작가는 여주 남한강 근처에서 카페를 한다는 친구분 소식을 궁금해했다. 함께한 또 한 작가는 박학다식의 총람이라 할 만해서 다른 이가 늘어놓은 장소에 추가 정보들을 이것저것 보탰다. 하지만 결국 차는 늘 가던 수리산 근처 손두부집으로 향했고, 한번 들어선 길은 우주가 변심하지 않는 한 그대로 내달릴 터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젠 유턴을 시도하기엔 다소 피로한 차에 올라 타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일행은 늘 시켜 먹던 대로 비지찌개와 팥칼국수로 헛배 부른 속을 또 한 번 부풀렸다. 그리고 조각 시간에 쫓겨 들이켜는 자판기 커피 한 잔과 담배 두어 대. 담배 태우는 맛을 통 잃어버린 나는 두 사람이 차 안에서 담배를 사르는 동안 손두부집에서 사이렌인 양 틀어놓은 태진아의 가락을 기계적으로 따라 흥얼거려보는데…….


화창하고 푸르렀던 정오의 휴식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어디로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던 높고 푸른 가을날, 딴따라 셋은 정해진 궤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행성처럼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의무와 복무에서 벗어나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맘껏 가르며 달려가는 건 열일곱 열여덟 청춘에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일까. 어디로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벅찬 설렘은 그저 그것을 꿈꿀 때만 눈부실 수 있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도 떠나지 못했지만 모두 일심으로 떠나고 싶었던 그날 오후, 나는 짧은 드라이브 길에 늘어선 은행나무의 노란 속살을 파고드는 그보다 더 노란 빛을 바라보며, 이 우주에는 시로 옮길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찰나일지언정 그저 이렇게 눈감고 그 빛을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따스한지, 혼자 되물으며 떠나지 못한 현실을 자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되물음을 가능케 한 그날 오후의 설렘을 무엇으로 옮겨볼까, 행복하고도 지난한 고민을 붙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쨌든 살아야만 한다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의무감은 대체 어디서 오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것이 노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명부 세계가 갈라놓은 아내와의 이별을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었던 오르페우스는 이 세상의 질곡을 타 넘기 위해 리라를 켜며 노래를 불렀다. 요동하는 세계의 균열을 메우는 인간의 유일한 힘은 바로 그 원초적 리듬에서 비롯한다는 듯이. 사정이 이러하니, 리듬이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무궁무진한 영적 파워를 지금 이곳에 불러내는 첫 관문, 최초의 주문일 것이라는 내 생각이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겠다. 그것은 곧 생물체 본연의 파장에 다름 아닐 터이므로. 가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시, 노래, 리듬, 이런 것들 안에 머무는 우주의 숨결을 잠시 눈을 감고 좀 더 느껴봐야겠다. 투사였지만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아니 투사였기에 노래 부를 수밖에 없었던 고정희의 슬픔론도 한 자락 곁들이면서.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 편지 11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는 갈 것입니다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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