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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유 Mar 20. 2019

봄, 한 소식

쉬! | 문인수 지음

시인이 보내온 편지를 펼쳐드니, 4차선 도로변을 둘러치고 있는 옹벽에 구불구불 가 있는 금, 그 상처의 길섶마다 봄이 깃들고 있다. 명아주, 바랭이, 참비름, 강아지풀 같은 이름들. 이 초록 정강이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이 거대한 위압 아래가 한동안 고요한 때가 봄이다./ 상처에 자꾸 손이 가고 슬픔이 또 새파랗게 만져지는 것처럼/ 금간 데를 디디며 풀들이 줄지어 돋아나 자란 것이다.”라고 한 소식 전하고 있는데, 살짝 맛이 간 여자처럼 꽃들 뒤숭숭 피어나는 이 계절에 ‘고요’의 공간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국보급 ‘눈’은 여전하구나……, 반가운 마음 뭉클하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옹벽의 금은 공중에 뿌리내리는 길로서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풀들은 그 길 따라 또 제 자신인 풀들에게로 넘어가고 있는데, 시인은 그 길을 천산북로라 명명한다. 이때 천산과 북로를 이름 안에 갇힌 사물로 읽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나는 그 ‘이름’들의 함정에서 벗어나보고자 백지 한 장을 꺼내놓고 (시의) 공간을 기입해본다. 옹벽을 둘러친 후, 구불구불 금을 그어놓는다. 그리고 그 금 너머에 산머리 하나를 삐죽 세운다. 그래놓고 보니 구름 위 저 공중의 산을 향해 텅 빈 금, 길 하나가 들어서는 게 아닌가. 문득, 초록이 허공을 향해 내딛은 무수한 금들을 향해 “생이 곧 길이어서 달리 전할 말이 없는 풀들”이라고 쓴 시인의 심정을 알 것만 같다.


『쉬!』에 대한 답장을 쓰고 있는 지금, 황사 낀 바깥의 하늘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창을 열어볼 마음이 아릿아릿 진동한다. 이 마음이 나로 하여금 알게 하겠지, 세상의 모든 창은 이미 열려 있었다는 걸. 대저, 답장이란 것들은 왜 늦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벽의 풀


풀들은 어떻게 시멘트를 삭이는가, 사귀는가

이 도시의 4차선 도로변을 따라 높게 둘러쳐진 옹벽엔 오래 전부터 깊은 금이 구불구불 길게 가 있다.

이 거대한 위압 아래가 한동안 고요한 때가 봄이다.

상처에 자꾸 손이 가고 슬픔이 또 새파랗게 만져지는 것처럼

금간 데를 디디며 풀들이 줄지어 돋아나 자란 것이다.

산야의 풀들에 비해 물론 몹시 지저분하고 왜소하지만 명아주 바랭이 참비름 강아지풀 같은 제 이름, 초록 정강이의 제 중심을 잘 잡고 있다.

생이 곧 길이어서 달리 전할 말이 없는 풀들,

흙먼지며 매연, 저 숱한 차량들의 소음까지도 꽉 꽉 다져넣어 밟으며 빨며 더듬더듬 더듬어 풀들은 또 풀들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천산북로,

누더기의 몸들이 누대 누대 닦아가고 있다.





민들레의 학명 ‘Taraxacum Officinalis’는 그리스어로 ‘질환’을 의미하는 ‘Tarax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치료’, ‘고통’을 뜻하는 ‘Takos’ 또한 예부터 뛰어난 치료 효과를 가진 민들레를 염두에 둔 단어라고 하고, 이와 유사하게 ‘Troglmon’은 ‘먹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랍어로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라 한다. 시인이 이런 맥락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이것은 별 문제도 아니지만, 민들레를 노래한 다음의 절창을 읊고 있노라면 생래적인 통찰의 (온기 가득한) 촉수를 가진 자들이 좋은 시인이 아닌가 하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가져본다.





밝은 구석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살림살이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뭉개지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색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꺼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밝은 구석이 있다, 끝끝내 붙박인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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