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처럼 시린, 사랑을 놓치다
칠흑 같은 밤바다 위,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남방한계선을 넘는 남자가 있다. 사람들이 무사히 남쪽의 어느 배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고 이번엔 북방한계선을 넘는다. 그 밤 밀입국을 두 번이나 한 이 남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녀의 가족이 무사히 탈북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바다에 섰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덧없는 고백이 그녀와 그에게는 덧없지 않았으리라.
스포주의
살구처럼 시린, 사랑을 놓치다.
미스터리 장르인가 싶었던 <왕세자 실종사건>은 메인 카피 ‘살구처럼 시린 사랑…’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을 말하는 뮤지컬이다. 왕세자가 사라지던 그날 밤, 궁궐의 어느 살구나무 아래 함께 있던 구동(동궁전 내관)과 자숙(중궁전 나인)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갑자기 자숙이 궁녀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게 되자 구동은 내관이 되어 그녀를 따라 궁으로 들어왔다. 왕의 승은을 입은 자숙이 임신하자 걱정된 구동은, 키가 닿지 않아 나무에 열린 살구를 따줄 수 없던 그때 ‘나중엔 꼭 따주겠노라’ 약속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살구를 선물한다. 둘이 시간을 보내는 새에 왕세자가 사라졌고, 책임을 묻다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 구동은 고문을 당하다 결국 죽는다.
시면서도 달큰한 살구처럼, 이룰 수 없어 아프지만 닿을 수 있어 행복했던 그들의 사랑이 배우들의 몸짓과 공허한 무대 위를 꽉 채웠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내관이 되어 그녀 곁을 지키려고 한 구동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함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다 문득 ‘여자라서’ 자숙을 좋아한다 대답한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던 것인가 가늠해본다. 그러다 요즘 읽고 있는 탈북자 관련 책에서의 어느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디 흔한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고백도 결국엔 덧없는 것이 되는데 그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생을 다해도 좋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는 마음은 부모가 되어서나 생기는 게 아닐까 했는데, 어느 곳에서 누군가는 이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공간을 채우는 연출과 배우들의 몸짓
텅 빈 무대에 덩그러니 몇 개의 소품이 놓여 있고, 일렬로 나타난 배우들이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슬로우모션을 건 것처럼 천천히 뛰더니 사선으로 방향을 튼다. 고정된 무대에서 배우들이 움직이자 카메라가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의 회상을 위해 그들은 무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무대를 비우고 소리와 몸짓을 활용했다.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휘파람이 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혹은 무대를 빙빙 돌며 슬로우모션처럼 걸었다.
처음 볼 때는 조금 어색했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각자의 이야기대로 조금씩 바뀌면서 반복되는 회상씬을 보며 이야기를 짜 맞추는 것도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공허한 공간일수록 울림이 더 크듯이,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왔다. 화려한 조명과 무대에서 선보이는 뮤지컬과는 다르게, 공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만나고 온 느낌이 든 건 아무래도 이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내겐 여전히 사랑은 덧없는 것이기에.
# 글 속의 탈북자 에피소드는 처음 언급한 그 바다 위의 남자 이야기. 책은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2012.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