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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남동 심리카페 May 05. 2023

가족이 버겁고 날 슬프게 할 때,

안녕하세요, 숲길의 작은 비밀장소, 연남동 심리카페의 도인종입니다. 


관계를 어떻게든 좋게 유지해 가기 위해 '~~ 하기만 하면, 괜찮아질 거야. 좋아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아내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건 마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불편함을 떠안고 놓을 수 없어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게 되요. 안쓰럽고 안타까운 일이 이어지는 거죠.


이러한 모습을 잘 담고 있는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의 부분이 있어서 읽어드리고자 해요. 



 




"환자분, 정신이 들어요? 말소리 들리면 눈 깜빡여보세요."


은별은 웅성거리는 말소리에 눈을 뜬다.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 둘이 은별의 얼굴을 보고는 소곤소곤 대화를 시작한다. 


"근데 왜 또 수면제를 저렇게 먹었대?"
"몰라, 내가 쟤였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잘 살 텐데. 몇 달 전에도 실려 왔지?"
"응, 우리 병원에만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다시 아침이다. 방 안에 시계는 없지만 눈은 절로 떠진다. 불면증에 조용한 환경이 좋다고 해서 초침 소리가 거슬리는 시계도 치우고 침실 가구도 최소한으로 남겼다. 그런다고 불면증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삶과 다르게 은별은 현실에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없었다. 또래 친구나 마음 나눌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다.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여 사는 은별은 혼자 있는 시간에 날로 웃음을 잃어갔다. 돈도 벌고, 화려해졌지만 너무 외로웠다. 일이 없거나 혼자 있는 날이면 은별은 불 꺼둔 방에서 멍하니 울기만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있으니까.


'나한테 남은 건 가족밖에 없어. 가족이면 충분해.'






삼남매의 장녀인 은별에게는 치킨 한 마리 먹고 싶어도 부모님이 부담을 느낄까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돈만 벌면, 부모님이 싸우지 않고, 눈치 보며 동생들의 귀를 막지 않아도 될 텐데라고 생각했다. 돈을 벌어 월세방을 탈출하기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렇게만 하면, 가족 모두가 행복할 줄 알았다.


"은별아, 엄마 백화점 브이아이피... 그거 있잖아, 그거 한도 좀 늘려줘."
"아빠가 이번에 새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누나, 나 유튜브 할 건데 장비 사주고 처음엔 누나가 좀 해주면 안 돼?"
"언니, 구찌 백 신상 나왔는데 사도 되지?"


은별의 눈만 마주치면 온 가족은 돈이 들어가는 행위를 요구했다. 은별이 돈을 벌기 전에는 치킨 한 마리를 시켜도 서로 먹으라고 양보하며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요구가 버거워 거절할라치면 가족들은 합심한 듯 모두 은별을 비난했다. 은별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잃는다는 두려움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더 많은 돈을 버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너무 지쳤다. 울려대는 휴대폰 알람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고 전원을 껐다. 전원이 꺼지듯 화면에서 나도 사라지고 싶다. 종이처럼 가냘픈 몸에 딱 붙은 화려한 옷을 벗고 하얀색 포플린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천천히 화장대를 향해 몸을 움직인다. 서랍 깊숙한 곳에 모아둔 수면제통을 꺼내어 손에 쥔다. 이 모든 괴로움을 끝내고 싶다. 제발.





"쿨럭쿨럭... 아... 머리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깬 은별은 기침을 하며 깬다. 운전석 옆에 놓인 생수를 들이켜 마른 목을 적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젖혀져 있는 자동차 시트를 세우며 주변을 둘러본다.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린다. 


왜 내가 모르는 동네에 와 있는 거지? 아우 머리 아파. 익숙한 통증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언제쯤 괴로움과 아픔은 익숙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왼손을 들어 왼쪽 머리를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본다.


"세상에... 도시와 자연이 같이 있네... 와..."


오랜만에 보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감탄한다. 자욱한 안개와 희뿌연 하늘마저 편안하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기분 좋은 습기가 느껴진다. 


"여기 너무 예쁘다.... 세상의 끝에 온 기분이야."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몰려든다. 하루라도 사진을 올리지 않으면 팔로워 수가 줄어들까봐 불안하다. 강박과 불안이 어느새 편안과 기쁨보다 익숙해졌다. 현실의 나는 사는 게 즐겁지 않은데, 정방형의 화면 안에서는 자신이 가장 즐거워야 한다.


'어디서라도 즐거우면 되지 않나?'


지독하게 화려하지만 지독하게 외로워 공허가 밀려올 때마다 생각한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촬영이 없으면 불 꺼진 방에서 매일 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지만 알기 겁난다. 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하다 보면 끝나지 않을까. 그나저나, 일을 해야 하는데. 


마침 새카만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화려한 빨간 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지나간다. 


"저... 기요, 죄송한데 혹시 이 동네에 카페나 옷 가게 있나요?"
"카페? 여긴 없는데."
"아... 네... 제가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옷도 갈아입고 인스타 라이브도 해야 해서요."
"음... 그런데 옷 가게는 아니지만 옷 필요하면 내가 세탁소 하는데 빌려줄까?"
"진짜요? 완전 고맙죠! 빌려주심 제가 집에 가서 깨끗하게 세탁해서 보내드릴게요."
"있지, 마침 내가 지금 출근하는 길인데, 따라와 봐."
"네,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하는 지은의 팔짱을 끼며 은별은 종알거린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속에 있는 말을 전부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속내를 털어놓을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 그런가, 처음 만난 사람의 깊은 눈빛에 빨려 들어갈 듯, 감정이 벌거벗겨진 듯 무장해제된다.






지은은 새벽부터 은별의 차량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문을 열고 나왔는데 빨간색 스포츠카가 굉음을 내며 불안하게 멈추어 섰다. 이내 시동은 꺼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삶에 의지가 없어 보이는 저 눈빛. 꽃잎을 보내 여자를 데려올까 고민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깰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몇 시간 뒤, 스스로 차에서 나온 은별의 곁에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지나갔다. 길을 잃고 날개가 부러진 아기 새 같은 아이가 카페와 옷 가게부터 찾는다. 배가 고프니 편의점이나 밥집을 찾아야 정상 아닌가. 아니, 여기가 어딘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밥도, 위치 파악도 아닌 것이다. 생존. 생존을 위한 행위. 껍데기만 남은 아이는 생존을 위한 날갯짓을 한다.


삶에서 어떤 우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 되기도 한다. 그 순간에 꼭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만나고, 그곳에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저 아이가 지금 내게로 와야 하기 때문에 온 것이겠지. 지은은 은별이 마음 세탁소의 세 번째 손님임을 예감했다. 



"언니, 여기가 세탁소예요? 세상의 끝에 있는 카페 같아요."


안개가 희뿌옇게 낀 도시의 꼭대기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입구도 예쁘고 조명도 좋고 심지어 뷰도 아름답다. 들뜬 은별이 계속해서 조잘거린다. 마치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눈이 빛난다. 


어제까지는 왜 안 죽나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오늘은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신남이다. 온통 낯선 하루다.






"누가 뭐라고 하니? 뭐라고 하면 좀 어때, 내 인생인데. 갔다 아님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지. 눈치 보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정답이라 믿으면 그게 정답이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그렇게 해도 괜찮아."



낯선 도시, 낯선 하루, 정말 이상한 날이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긴, 안개가 구름처럼 뿌옇게 낀 이런 날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진 않다. 가장 이상한 건, 살고 싶어지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다. 살고 싶다. 지울 수 있는 마음의 얼룩을 지우고, 살고 싶다. 


"언니, 제가 가장 지우고 싶은 걸 지우면... 제 삶이 완전히 바뀌어요. 바라는 것이긴 한데... 너무 힘들어서 놓고 싶긴 한데... 한편으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저희 가족들은 저 없음 아무도 돈을 벌 줄 모르는데, 어떻게 살까요."




지은은 은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토닥 두드린다.


"있잖아. 다른 사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를 보살펴. 힘들 때 좋은 곳 가서 여행도 하고, 화나면 화도 내고, 맛있는 거 먹으며 스트레스도 풀고, 다른 사람 말고 자신을 위해 살아보기를 시작해 봐. 그럼 인생이 생각보다 아름답다. 살 만해."
"살만해요? 언니... 전 사실 살고 싶지가 않았어요."
"살고 싶지 않을 수 있어. 나도 많은 순간 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말이야,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살게 되더라. 살게 되니까 살아져. 살아지니까 별거 아닌 일에 가끔 웃게 되고. 웃으니까 또 살아져."
"그리고 너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어디에도 없어. 설령 그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


지은의 말을 들으며 은별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맞지 않는 신발을 오랫동안 신어서, 신발을 신으면 발이 아픈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보이는 너와 있는 그대로의 너를 동일한 인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까?"
"네, 알고 싶어요."
"먼저 다가가고 마음을 여는 연습을 해봐. 지금처럼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을 보여줘."
"그러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요."
"거절당하면 뭐 어때. 그 사람도 그 사람만의 사정이 있어서 거절하는 거겠지. 내가 마음을 주지 않는데 상대방이 마음을 주기 바라면 그건 망상이지. 욕심이고. 용기 내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을 나눠봐. 너를 위해서."
"언니, 그럼 우리는 지금 친구 된 거예요?"
"그럼, 우리 마음을 나누었잖아.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면 한 번을 만나도 친구가 될 수 있어."






"언니, 인스타 해킹당했어? 계정 왜 이래? 경찰에 신고했어?"
"은별아, 엄마 카드값 안 냈다고 정지당했대. 왜 이러니?"
"은별아, 아빠 이번엔 다른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사진 좀 찍으러 가자."


마음 세탁소에서 낯설고도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고 온 뒤, 은별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사라졌다. 계정이 사라지자 누구보다 가족들이 가장 먼저 괴로워하고 화를 냈다. 하지만 은별은 계정을 복구시키지도, 새로운 계정을 만들지도 않았다.


예전처럼 인스타 공구로 돈을 벌지 않자 아파트에는 차압 딱지가 붙었고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아빠의 사업도 당연한 수순처럼 파산했고 회생 신청이 기각되어 아빠는 사기죄로 2년간 수감되었다. 집이 차압되기 직전 은별이 타던 차와 가방들을 팔아 가족들은 예전에 살던 동네의 투룸 빌라로 이사를 시켜주고, 은별은 청년주거지원을 받아 원룸으로 독립을 했다.


우연히 벌게 된 많은 돈은 은별에게 모래성 같았다. 써도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돈에게 오만하게 구는 이에게 돈은 신기루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무너지는 모래성을 보며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족들은 인스타그램을 다시 운영하라고 난리인데 은별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나 회사 앞이야. 출근해야 해. 각자의 문제는 각자가 해결하자. 끊어."


전화를 끊은 은별은 목에 걸린 헤드셋을 머리에 다시 쓰고 소음을 차단한다. 


은별은 석 달 전부터 프리랜서 홈쇼핑 MD로 일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구성하는 상품마다 매출이 급상승 곡선을 이루는 덕에 은별은 일이 재미있다.


은별은 요즘의 삶이 왠지 몸에 잘 맞는 편안한 옷을 입고 사는 느낌이다. 일이 끝나면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고 제일 편한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걷는다. 목적 없이 걷다 보면 다리는 아프지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보인다. 가끔 뛰기도 한다. 한참 뛰고 나서 땀을 흠뻑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림을 느끼는 순간, 살아 있다고 느낀다. 살아있지만 살아 있는 날들이 별로 없었는데.



모든 것이 좋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이 좋다. 







숲길에 있는 작은 비밀장소의 보관할 적절한 런닝타임과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과 내용 전달에 초점을 맞춰 오디오 콘탠츠로 제작하기 위해 부분부분 각색하고 다듬었습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라는 좋은 책을 내주신 윤정은 작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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