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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남동 심리카페 May 08. 2023

아버지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연남동 심리카페입니다. 


살아가다보면, 나를 서럽게 만드는 사람들 속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되면, 해결책만을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카페를 하다보니 이런 분들이 평생 놓치고 있는 것이 보이게 되더라고요. 


정작, 당신에게 계속 필요했던 것은, 해결책이 아닌, 마음 이해받고 회복할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을요.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에 나오는 한 부분을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연자야, 우리처럼 사랑 못 받고 자란 년들끼리 부대끼면서 사랑해주고 살아야 돼.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애들 구김 하나 없이 밝잖아? 우린 그늘이라 그 옆에 가면 눈부셔 타 죽어. 얘, 난 타 죽기 싫다. 우리끼리 서로 그늘 해주면서 살자. 나 외로워. 니가 내 옆에 있어주라. 너보다 내가 더 니가 필요해."


연자가 얹혀사는 걸 미안해 할 때마다 햇살 같이 따뜻하고 웃음이 많은 정순은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있어 달라'든가 '네가 필요해' 같은 말들은 연자가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연자의 속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정순의 말이라기엔 너무도 가슴에 사무쳤다. 햇살 같은 정순의 아픈 속을 연자는 자신의 아픔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잘 살고 싶었다.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남들처럼 평범'이라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연자는 일찌감치 알아버렸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돈을 버는 재주가 없는 남자는 아이를 생산하는 일에 일조하는 재주만 있다. 무책임한 남자. 일용직으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착하고 힘 없는 어머니는 평생 가난했다. 


동생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언제나 반에서 1등을 하던 연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1등을 해도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연자가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 다섯 명의 동생들을 부양하는 일을 부모가 자신의 몫으로 돌릴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나 대학 안 걸거야."


연자의 말에 아버지는 '왜'인지를 묻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 하던 행동을 멈추고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다. '왜'를 물어 무얼 한단 말인가. 이미 답이 정해진 것을.


연자는 방으로 들어가 말 없이 단촐한 가방을 꾸려 그 길로 집을 나와 공단으로 왔다. 먼저 취직해 있던 옆집 언니 정순의 소개로 두부 공장의 생산 라인에 들어갔다. 지긋지긋한 가난, 그 가난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집이 지겨워 현실에서 도망쳤다. 






"연자야, 오늘 회식 한대. 같이 가자."


연자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며 정순이 신나게 말했다. 정순은 예쁘다. 취직을 한 뒤부터는 귀를 뚫어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미니스커트를 사 입는 정순에게는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난다. 


좋은 사람, 다정한 사람, 정이 많은데 순하기까지 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 곁에 있으면 누구나 편안해지는 사람. 정순은 그런 사람이었다. 






재하를 낳은 뒤로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오던 남자는 결국 아예 짐을 싸서 돌아섰다. 네 살짜리 재하가 바짓가랑이에 매달려도 남자는 가버렸다. 


연자는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식당 찬모, 남의 집 가사도우미, 공장 생산직 등,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며 살던 어느 날, 연자가 일하는 식당에 정순이 찾아왔다.


"연자야, 니가 어쩌다 이렇게...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산거야..."


그리고 한 달 뒤, 연자는 정순이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왔다. 정순은 재하와 연자에게 방을 내주었다. 


연자는 식당 찬모로 일하며 정순의 집 살림을 해주었다. 정순한테 폐 끼치는 줄 알았지만 염치 불구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밥을 같이 먹으며 재하를 함께 키워냈다. 정순도 함께 살며 재하도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연자는 정성스레 정순을 위해 밥을 했고 옷을 다렸다. 밤에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정순의 목욕 물을 받았다. 




연자와 정순은 나이 터울이 두 살 밖에 나지 않았지만, 서로의 부모가 되어주었다. 







정순이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던 날, 연자도 같이 따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재하가 있어서 연자는 살아야 했다. 



"사장님,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지요? 미안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게 풀려요. 고마워요."


울음을 그친 연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처음 보는 분 앞에서 울다니, 실례인 거 알지만 한참 울고 났더니 오히려 개운하네요. 오랜만에 울었어요."
"괜찮아요. 재하 어머니, 이런 일 하다 보면 제 앞에서 안 우는 게 오히려 어색한 걸요?"


"있지요, 전에는 내 불행이, 내 아픔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모두 아픔을 간직하고 살더라고요. 제 불행만 불행이 아니었던 거죠. 저는 요즘 사는 중 가장 행복해요. 편안해요. 저녁 버스를 탔는데 노을이 너무 예쁜 걸 보면 눈물나게 행복해요. 어떨 땐 낮에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 저 혼자 있어요. 전세 낸 것처럼, 어디 여행 간 거 같더라고요. 사장님 버스 타보셨어요?"
"아... 버스요? 제가 집이랑 세탁소가 가까워서 어디 갈 일이 없어요."
"갈 일은 만들면 되죠. 다음에 버스 타고 시내 한번 나가보세요. 낮에 이 동네 풍경이 얼마나 좋은데요. 큰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연자의 말에 지은이 고개를 끄덕인다. 버스 여행이라. 이 생에서 하고 싶은 게 늘고 있다.


"행복한 일은 천지에 널려 있어요. 늦잠을 자서 출근해야 되는 줄 알고 허겁지겁 눈을 떴는데 알고 보니 주말이야, 안도하며 눈을 감아요. 마저 자는 잠이 얼마나 달큰한지. 저는 그냥 지금 이런 일상이 좋아요. 불행하다 느꼈던 상처를 지우고 싶던 순간이 물론 많았지만 그날들이 있었으니 오늘이 좋은 걸 알지 않겠어요? 불행을 지우고 싶지 않아요. 그 순간들이 있어야 오늘의 나도 있고, 재하도 있으니까요."


"나는 내 인생 싫어하지 않아요. 전엔 나마저 내 인생 싫어하면 너무 안쓰러워 좋아하려 애썼는데, 이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좋아졌어요. 좋다고 생각해보면 내 인생이 너무 예뻐 보여요. 그래도 아들이 엄마 위해서 선물 주고 싶다니까 받을게요. 지우지는 않을 건데, 떠올릴 때 덜 아프게 주름만 조금 다려주세요."






숲길에 있는 작은 비밀장소의 보관할 적절한 런닝타임과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과 내용 전달에 초점을 맞춰 오디오 콘탠츠로 제작하기 위해 부분부분 각색하고 다듬었습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라는 좋은 책을 내주신 윤정은 작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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