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숲길에 있는 작은 비밀장소 연남동 심리카페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소중한 것을 시시해 보이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고, 지나가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죠.
그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소중한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 과연 좋은 걸까요?
심리카페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저런 사람과 함께 있어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리고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그의 의도보다 그의 성격에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죠.
혹시 지금, 당신이 좋아하고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 시시해 보이게 만드는 사람과 있다면, 김보통 님의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책에 나오는 한 부분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셨으면 해요.
행복이란 바나나와 같다. 내겐 그렇다.
너무 달지 않고 시지 않으며 껍질은 까기 쉽고 씨도 없다. 부드러워 먹기 편하고 양도 적당하다. 과일의 왕이다. 바나나를 먹으면 자연히 행복해진다. 중학생 때 바나나가 너무 좋아 바나나에 대한 시를 썼을 정도다.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아버지와 이야기하다 말했다.
"바나나가 너무 좋아서 무인도에 떨어지더라도 바나나 나무만 있다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는
"그래서 넌 바보야."
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그 어떤 것을 좋다고 하건,
'그래서 너는 바보다'
라는 말을 했다. 그림이 좋아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글이 좋아 관련 학과로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렇기 때문에 너는 바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머릿속에 '아들이 무슨 말을 한다 -> 그래서 너는 바보다'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이 입력된 것 같았다. 그날도 그랬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과일이 있는데 겨우 바나나가 제일 좋다니, 한심한 녀석. 두리안도 먹어보고, 애플망고도 먹어보고, 패션후르츠도 먹어보고 한 다음에야 어떤 게 제일 맛있는가를 결정해야지 먹어본 것도 별로 없으면서 그런 흔한 과일을 최고라고 하는 건 어리석은 거야."
나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엔 그래도 바나나가 제일인데"
라고 말했지만,
"그럼 너는 그냥 평생 바나나만 먹고살게 되겠지."
라는 핀잔을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새로운 과일을 먹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중에선 명백히 바나나가 최고였지만, 그래도 다른 과일을 먹기 위해 노력했다.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과일가게에서 새로운 과일을 발견하면 사 먹었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국내에 들어오는 과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제대 후 유럽에 가게 되었다. 부모님께는 열흘 정도만 다녀온다고 말했는데, 그럴 마음은 애초부터 없어서 귀국하는 항공기를 서너 달 뒤로 잡아놓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원래 귀국하기로 한 날 아버지에게 통보했다. 아버지는
"이 바보새끼야!"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무섭지 않았다. 단순한 문자 한 줄이었을 뿐이니까. 잡으러 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터키까지 전 유럽을 떠돌며 한국에서는 먹을 수 없던 다양한 과일을 먹었다. 돈은 다른 관광객들이 먹고 버린 와인병을 모아 고물상에 팔거나 설거지와 호객 행위 등을 하면서 벌었다.
그렇게 몇 달, 길고 긴 과일 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어떤 과일이 최고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과일을 한 번씩 다 먹어보았으니까. 적어도 아버지가 평생 먹어온 과일보다 훨씬 많은 종류를 몇 배나 다양한 품종으로 먹어보았으니 아버지보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건 분명했다.
단발에 가까워진 머리에 부랑자같이 기른 수염을 한 채 배낭을 메고 돌아오는 공항철도 안에서 나는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열차가 서울에 들어설 때쯤 최고의 과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역시 바나나였다.
마음속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만점을 주었다. 긴 시간에 걸쳐 얻은 결론이 흔히 먹어온 과일이라는 점에서 여행 자체가 낭패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알아냈다. 바나나가 최고의 과일이라는 것을. 내게 그 이상의 과일은 없었다.
물론 세상엔 아직도 못 먹어본 과일이 많을 테고, 어딘가에서 과일계의 권위자들이 모여 '올해의 과일' 같은 것을 선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내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 최고의 과일이라는 사실뿐.
살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그런 것을 좋아하니? 그런 것에 만족하다니, 바보구나."
라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방심하고 있었는데, 세상엔 그런 사람이 아주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주며 어떻게든 내 손의 바나나를 시시해 보이게 만들려는 사람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말을 듣지 않는다. 먹어볼 만큼 먹어봤어도 내겐 바나나가 제일이었고, 지금까지 못 먹은 과일은 앞으로도 먹을 일이 없을 테니까.
숲길에 있는 작은 비밀장소의 보관할 적절한 런닝타임과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과 내용 전달에 초점을 맞춰 오디오 콘탠츠로 제작하기 위해 부분 부분 각색하고 다듬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라는 좋은 책을 내주신 김보통 작가님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