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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남동 심리카페 Aug 14. 2023

오래 사는 게 이기는 거야 (제시의 일기)

"외할머니가 자주 이런 말을 하셨던 것이 떠오르네."



"오래 사는 게 이기는 거야."



"20대 때는 짧고 굵게 살고 싶었거든, 그래서 할머니가 해주시곤 했던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새로웠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어제 외국에서 살고 있는 사촌 누나랑 오랜만에 통화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제가 갔었던 토크 콘서트가 전화를 받게 된 이유였죠.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사촌 누나를 통해 외할머니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 외할머니가 자주 하셨던 말이라며 들려준 '오래 사는 게 이기는 거야'라는 말이 저에게는 깊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앞에 놓여 있었던 노트북에 바로 타이핑을 치고 통화하는 내내 모니터에 타이핑 친 문장을 보고 있었죠.



오래 사는 게 이기는 거야.


마치 이렇게 말해주시는 것만 같았거든요.



지금 여유를 잃고, 초라하고 그래도 살아. 괜찮아.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그럴 때도 있어.




아마 저 말이 더 크게 와닿았던 것은 외할머니가 어떤 삶을 보내셨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래서 저 한 문장의 말 안에 담겨 있을 많은 순간들과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빠랑 결혼해서 고생만 많이 한 거 후회하지 않아?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어보셨다고 하세요.



"엄마가 90세 가까이 되셨을 때 여쭤봤었어. 아버지랑 결혼하고 고생만 많이 하신 것 후회하지 않냐고. 그랬더니 외할머니가 이러시더라"



"아니, 고생은 뭐.... 내가 해야 될 일을 한 것인데."



어머니가 할머니에 대해 들려주신 이야기들에는 할머니는 결핵성 임파선염으로 수술을 수차례 받으셔야 했었고, 콩팥염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하셨는데 전시여서 큰 수술을 받으실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참고 계실 수밖에 없으셨다고 해요.




"지금 생각해도 엄마가 너무 고생스러운 삶을 사신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와"



어머니는 이 말과 함께 다음에 집에 오면 보여주시겠다며 외할머니의 결혼반지를 사진 찍어 보내주셨었죠.


18금의 가느다란 외할머니의 결혼 금반지. 어머니가 보내주신 사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 이 금반지를 받고 임시정부에서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의 삶을,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 한 개인으로써의 삶을 사셨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갔었던 토크 콘서트는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열렸던 저의 외할머니에 관한 토크 콘서트였습니다.



토크 콘서트 사진


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저의 이모와 어머니를 낳아 키우는 순간을 일기로 적었답니다.





1938년 10월 3일, 광동성 불산


제시는 이제 손으로 잡아당겨 볼 만한 거리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끌어다가 들춰 보기 시작한다. 지금도 배를 덮어 준 기저귀를 끌어다가 입으로 빨아 보기를 수차례 하고 있다. 세상 속에 들어온 걸 깨달은 건지 한 세상 함께 지니고 살아야 할 자신의 도구들을 점검해 보고 있다.


(중략)


제시에겐 이곳이 고향이 아닌 낯선 중국이란 사실이, 평생을 믿고 살아야 할 나라를 빼앗겼는지가 하나도 중요치 않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 더욱 중요한 눈앞의 문제인 것이다. 문득 우리 아가를 볼 때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일기장을 외할머니가 오랜 시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고, 외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던 사촌 누나가 외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며 우리가 읽어보기 쉽게 정리해서 한 권의 책을 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사천성 중경



제니는 웬셈인지 요즘 침을 많이 흘리고 있다. 그러나 놀기는 여전히 잘 하며 한참씩 앉아서 잘 놀고 있다. 밥알을 하나씩 입에 넣어 주면 '냠냠'하며 제법 먹는 흉내를 잘 내고 있다.



제시는 오늘 아침, 키가 지난 삼사 삭 만에 비로소 좀 커진 성적을 나타내 보인다. 겨울이 되어서 키가 자라지를 못하는 건지 다소간 의문이다. 놀기는 잘 하는데?



오늘 새벽 한 시에 미일전쟁이 폭발되었다고 한다. 어느새 일본 비행기가 하와이 진주만 항구를 폭작했다는 호외 신문이 배부되어 세상이 모두 놀랐다. 이를 쫓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좋은 기회가 오리라고 고대하며 기뻐함을 마지 아니한다.






참고로, 저의 이모의 이름은 제시이고, 저의 어머니의 이름은 제니입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시의 일기>라는 뮤지컬이 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검색해 보니 며칠 뒤에 공연을 하더군요. 한번 가서 봐야겠어요.


<제시의 일기> 뮤지컬 포스터



1941년 12월 31일, 사천성 중경



여러 날 만에 오늘은 날이 개이고 오후에는 태양도 나타나 보였다. 길거리 상점에는 대서특서의 광고지가 붙어 있고, 각 사회층에서도 연말 활동이 퍽 많이 있다. 하여간 고와 락을 같이 하던 이 해도 오늘로 끝난다고 하니 말 못 할 느낌이 무한히 우러난다. 어느새 일 년이 달아났다고 하는데 무상하다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방공호 안에서 이 해를 다 보내 버린 모양이다. 끈질긴 생명이다!



그 위험하고 견디기 어려운 상태에서 살아남아 1942년을 맞이하게 되는구나 생각할 때, 이국 땅에서 조국을 광복해 보겠다고 많은 고초를 겪고 있는 우리들을 하느님께서 긍휼히 여기어 안전하게 보우하신 은혜이리라 믿는다. ... (중략) ... 1941년이여, 안녕! 축복된 1942년을 빌며, 안녕히 가시오!






내일은 8월 15일입니다.


외할머니가 평소 자주 말씀하셨던 "오래 사는 게 이기는 거야"라는 말과 일기장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쓰셨던 말들과 생활들을 한번 그려 보면 어떨까요? 8월 15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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