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의 유럽 여행 #4. 2025년 9월 26일
플리트 비체를 출발한 버스는 깜깜해져서 스플리트에 도착했다. 예약한 아파트의 소개를 보면 터미널에서 아파트까지 10분 넘게 돌길을 걸어 와야 된다고 써 있어서 대형 캐리어가 두 개나 있는 우리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왠일인지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터미널에 안 가고 아파트에서 매우 가까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우리를 내려 줬다. (뭐 또 설명을 해 줬는데 우리가 안 들었겠지.) 깜깜했지만 아파트는 금방 찾았다. (구글맵 만세)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었는데 계단 오를 생각하면 힘들어 보였는데 다행히 우리 방은 1층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우리나라 1층을 0층 또는 G층이라 부르고 2층을 1층이라고 부른다. 난 한국식으로 쓰겠다. 주) 방에 들어 앉아 있으면 복도에서 다른 투숙객이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가끔 들렸다. 문을 나서다 윗층 투숙객을 복도에서 만난 적도 있는데 우리가 1층에서 나오는 걸 보며 '정말 부럽다'고 말을 해 줬다. '여행 하루 이틀 해보나. 그러게 우리처럼 미리미리 예약을 했어야지 후훗...'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함부로 까불면 안 된다. 나중에 피렌체에 갔을 때 묵었던 아파트는 계단 없는 건물의 3층이었다. 안지는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두 개를 다 들어 옮겨야 했다.ㅜ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두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랫층은 주방과 거실, 윗층은 침실과 욕실이었다. 계단은 불편하지만 넓어서 좋았고 TV는 넷플릭스가 나와서 좋았으며, 그땐 더울 때여서 에어콘이 필요했는데 에어콘도 잘 나와서 좋았다. 네스프레소 커피도 있었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묵었던 곳은 다들 하나씩은 문제들이 있었던 거 같은데 처음 묵었던 아파트인 스플리트 아파트는 불만이 없었던 것 같네. 그렇게 짐을 풀고, 햇반으로 저녁을 먹은 뒤 꿀잠을 잤다.
와이프가 내가 쓴 글을 읽고 첨언하길, 그녀는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지저분한 걸 못 참는 와이프는 내가 보기엔 깨끗한 것 같은데도 숙소에 도착하면 대청소와 그릇 설겆이를 빡쎄게 하곤 했다. 난 더러운 걸 참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해서 별로 도와주지 않았다.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되었으니 피곤해도 새벽에 눈이 떠진다. 아파트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그린 마켓이라는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과일하고 야채는 광장에 마련된 간이 부스에 물건을 갖고 와 쌓아 놓고 팔다가 시간이 되면 철수하는 전통식 구조이고 빵이나 고기는 가장자리 건물에 상설 매장이 있다. 과일, 야채 상인들은 무게 단위로 파는데 무게를 잴 때 저울이 아니라 천칭을 쓴다. 거기서 야채, 과일과 빵하고 고기까지 조금씩 샀다. 아파트에 묵으니까 조리를 해서 먹을 수 있다. 긴 여행이니 밥을 계속 사 먹으면 비용이 감당이 안 되니 해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해 먹어야 한다. 물은 안 샀는데, 여행을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아침을 해 먹었다. 여행 중에 식사를 할 땐 주로 아침엔 빵, 과일, 야채에 햄, 치즈, 우유 같은 걸 먹고 저녁엔 햇반을 데워 사온 반찬이랑 국이랑 같이 먹었으며 점심은 밖에서 사 먹었다. 햇반은 유럽 어디서나 팔았으며 아시아 마켓에선 항상 맨 앞에 까르보불닭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냥 자기 나라 일반 마켓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서 삼양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와서 시내 구경을 시작했다. 집에서 길 하나 건너면 나왔던 그린 마켓을 가로 지르면 스플리트에서 가장 중요한 관광지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나온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말 로마 황제였는데 이곳 일리리아(로마 제국 시대 크로아티아 지역 이름) 출신이라 한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 이상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 하는데, 5현제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전제정으로의 개혁을 통해 이후 서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동로마를 천년 이상 버틸 수 있게 만들어준 1등 공신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평가가 박했던 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평가는 중세기 때 많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크리스트교를 탄압한 황제였기 때문이라고... 노예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로마 황제까지 올라간 것도 극적이고, 말년에 스스로 황제직을 버리고 내려간 것도 멋있다. 근데 스플리트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황제직에서 내려온 이후에 고향에서 농사 지으며 살려고 만든 거라 한다. 궁전 짓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나 같아도 황제 내려 놓겠다 싶겠지만, 스스로 권력을 포기한 후에 후임자들끼리의 다툼 속에서 자신의 가족이 죽는 걸 막지 못했으니 아픔은 있다. 암튼 덕분에 스플리트는 궁전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했고 그렇게 건설된 도시는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천혜의 관광지로 각광받게 됐다. 아직도 상당히 잘 남아 있는 궁전과 알현실, 이후에 지어진 대성당의 벨타워, 지하 궁전과 해변으로 나오면 볼 수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는 현대화된 리바 거리를 보았다. 해가 중천에 뜨자 더위를 피해 숙소로 들어와 잠이 들었고, 카르카손 한 판을 하고 다시 나와 마르얀 언덕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며 와인 한잔을 마시고 구 시가의 야경을 보다가 스플리트 시내 여행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