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아찔했던
로마 공항 배낭 분실 사건

호미의 유럽 여행 #9. 2025년 10월 2일

by 호미

두브로브니크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공항까지 가는 우버를 불렀고, 정들었던 라파드 마을을 떠나게 됐다. 로마까지는 비행기로 간다. 두브로브니크 공항은 온라인으로 체크인을 끝낸 승객을 위한 셀프 백 드랍 시스템이 있다. 여권을 스캔하고, 행선지를 확인하고, 중량을 재고 나면 기다란 스티커가 나오는데 그걸 손잡이에 감아서 붙이고 벨트 위에 올리면 끝이다. 체크인 부스에서 항공사 직원이 해 주던 것을 내 스스로 하는 것이다. 중간에 '뭔 일 나면 다 니 책임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 있었던 거 같고, '예스' 누르면 된다. 줄 서는 거 싫어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딱이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공항 카페 같은 곳에서 시간을 오래 때웠는데 비행기도 한시간 쯤 딜레이 됐다. 난 특히 비행기 탈 때나 기차 탈 때 혹시라도 늦으면 낭패를 볼까봐 시간 여유를 많이 잡고 미리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데 와이프가 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옛날 일이지만 난 미국에서 국내선을 탈때 연결편을 놓쳐서 갈아타는 공항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내가 지나간 옛날 일을 너무 곱씹는다는 점도 와이프의 불만 중 하나이다.)

탑승이 시작되어 게이트를 통과하자 공항 건물 밖으로 나온다. 탑승교 연결 없이 걸어서 비행기까지 가야 한다. 바람이 너무 세서 걸어가는데 좀 고생을 했다. 라이언 에어라는 유럽 저가 항공인데 리뷰를 보면 콤플레인이 많은 편이지만 싸고 노선이 많아서 피해가기 어려운 항공이다. 이제 기내에선 이탈리아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약간은 점잖은 크로아티아 어와 달리 억양에서 느껴지는 이탈리아어의 경망스러움은 중국어를 능가한다. 캡틴의 기내 안내방송 말이 정말 기관총처럼 빠른데 가만히 들어 보니 뭔가 있다. 말하다 막히면 멈추지 않고 "아부르부르부르..." 이상한 말로 뭉개면서 계속 소리를 내다가 다시 언어같이 들리는 말이 이어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앞에 "아부르..."는 무슨 뜻이 있는 말 같진 않다. 한참을 떠들다가 말이 끝나고 나면 그제서야 "뒷부분은 영어였나?" 어리둥절하게 된다. 탑승이 끝나고 비행기 문이 닫히고 나니, 캡틴이 또 영어로 뭐라고 얘기한다. 크루 중에 한 명이 다음주에 결혼한단다. (그래. 꼭 들었으면 하는 얘기는 이렇게 영어로 또박또박 해준단 말이지.) 누군지는 모르겠고 승객들이 막 박수를 쳐서 우리도 따라 축하해 줬다. 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로마까지 비행기는 잠깐이다. 욕하는 사람 많았는데 라이언 에어 괜찮았다. (이타카에선 한줄에 네 좌석 있는 프로펠러 비행기도 타봤는데 그거보다 훨씬 좋더만) 한시간 반 쯤 날았나? 로마 공항에 무사히 내리긴 했는데... 라이언 에어는 짐 찾는데 하세월이란 리뷰도 봤지만 우린 매우 빨리 찾았다. 그렇게 무사히 짐도 찾긴 했는데... 로마 공항에서 우리 숙소까지 가려면 공항에서 테르미니(중앙역)까지 기차를 타야 한다. 차표 판매기에서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표를 구입하고 기차도 잘 타긴 했는데... 그렇게 삼십분 정도 달려서 기차는 테르미니까지 잘 왔고 "테르미니..." 안내방송이 나오고 기차 안에서 테르미니의 플랫폼이 보이던 즈음에...

내 배낭이 안 보였다. 메고 있었어야 할 배낭이 어깨에 없고, 그 순간 언제부터 그 배낭이 안 보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없다.

"안지, 배낭이 없어."

멘탈이 나가고 있는게 피부로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여권과 핸드폰은 목에 걸고 있어서 없어지지 않았는데 배낭엔 오래되긴 했지만 여전히 쓸만한 내 노트북과 e북 리더기 그리고 카드 지갑이 들어 있었다. 여행 중 사용할 카드 또한 핸드폰에 붙어 있어서 카드를 다시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배낭을 가져간 거라면 카드는 정지 신청을 해야 한다. 와이프가 "정신차리고 잘 생각해 봐" 뭐 이런 말을 한 거 같은데 처음엔 멘탈이 나가서 아무 생각도 없다가 차츰 정신이 돌아오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소매치기 당한 게 아니라면...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은 공항 짐 찾는 곳."

"비행기에 두고 내린 건 아니고?"

"선반에 안 넣고 안고 있었어."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와이프가

"일단 공항으로 돌아가자."

기차 테르미니에 도착하자 마자 우린 내렸고 다시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플랫폼과 시간을 알아 봤다. 방금 기차에서 내린 그 자리에서 다시 공항행 기차를 탔는데, 기차가 곧 출발을 해서 표를 안 사고 탔다. 모바일로 기차표를 살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와이프가 결제를 해 보겠다고. 모바일 기차표 결제를 시도하는데 자꾸 에러가 나고 잘 되지 않았다. 표를 못 샀는데 검표원이 닥치면 무임승차 벌금이다. 그나마 정신줄을 유지하던 와이프도 핸드폰을 움켜쥐고 점점 맛이 가기 시작한다.

"걍 냅둬. 아까 공항에서 올 때도 표 검사 안하더만. 설마 하겠어?"

결국 와이프도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앉아 있었다. 공항으로 가고는 있지만 배낭을 다시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기 누가 오는 게 보인다. 검표원. 아 오는구나. 점점 가까이 오는 구나. 내 앞사람 꺼 검사하는 구나. 이제 우리한테 왔구나.

"표."

잠시 멍하니 검표원을 쳐다 보다가, (헤헤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기차 안에서 모바일로 사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무임승차 벌금은 인당 50유로입니다. 그거 물리는 게 내 임무예요."

"공항에서 짐을 두고 온 걸 알아서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상황이 급해서 표를 미리 살 수가 없었어요."

검표원이 보더니 불쌍했는지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럼 여기서 15유로에 표를 결제할 수 있게 해 줄께요(탑승 전에 미리 사면 14유로다.)."

"감사합니다.ㅜㅜ"

"짐을 꼭 찾길 바랍니다."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다 있나. 공항에 다시 도착해서 아까의 기억을 더듬어 배기지 클레임으로 갔다. 그냥 슥 들어가보려고 했는데 누가 막는다. (당연하다.) 짐을 두고 왔다고 얘길 하니, 윗층에 인포메이션으로 가라고 한다. 올라가서 얘길 했더니 종이를 한 장 써 주는데, 'lost and found'라고 써 있는 입구가 따로 있다. 분실물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그 곳에서 지키는 사람한테 종이를 보여주면 배기지 클레임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나 뿐이 아닌 거야.) 그래서 내려가 봤더니...

아까 내가 짐 찾았던 벨트 바로 앞, 와이프가 앉아 있던 벤치에 내 배낭이 그대로 있더라. 생각해 보니, 배기지 클레임에서 나오는 짐을 기다리느라 와이프 옆에 배낭을 잠시 내려 놨는데, 우리 캐리어 두개가 다 나오자 그것만 가지고 그냥 걸어 나온 것이다. 배기지 클레임에서 나와서 기차 역까지 걸어서가는데 한 이십분은 걸리고, 역 앞에서 표를 사는데 십오분은 쓴 거 같고, 표를 사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삼십분은 더 걸리는데 그렇게 테르미니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있어야 할 배낭이 없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럴 땐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여행하는 게 참 도움이 됐다. 혼자였다면 빠져 나간 멘탈을 다시 회복시키느라 고생했을텐데 옆에서 (내 배낭 없어진 거에 아무 감흥이 없는) 와이프가 정신줄을 잡아 줬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갈 판단을 하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숙소 관리인한테 연락을 하고, 표 없이 검표원을 만났는데도 차근차근히 설명을 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다 와이프 덕이었다.

29년 동안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해 봤다. 난 1996년 배낭여행 때 뒤셀도르프 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손가방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유일한 정보 소스인 여행 안내서를 그때 잃어 버려 그 후로 난 약 5일 동안 뒤셀도르프 근처에서 시체처럼 지냈다.

"어쩌면 그때... 29년전 뒤셀도르프. 내가 소매치기를 당한게 아니라 그냥 내가 어디서 흘리고 온 건지도 모르겠어."

다시 무사히 테르미니로 왔다. 기차를 한번 더 왕복했기 때문에 58유로가 더 지출이 됐고,두 시간 정도가 더 지체됐던 것 같다. 그렇게 로마 아파트에 도착했고, 관리인을 만나고, 짐을 풀었다. 상황은 무사히 종료됐지만 아까 느꼈던 그 간 떨어진 상황에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로마의 아파트에서 잠이 들었다.

IMG_7960.jpg 두브로브니크 공항에서 트랩으로 라이언 에어를 탔다. 바람이 엄청 쎄게 불어서 날아갈 뻔
IMG_7963.jpg 마리오 집주인 아저씨한테 선물 받은 딩가츠와 두브로브니크 공항에서 산 마디라차 포십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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