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성벽

호미의 유럽 여행 #8. 2025년 9월 29일

by 호미

어젯밤에 라파드 해변을 구경했을 땐 사람들이 적당히 있어서 좋았다. 9월 말이기도 하니까 여름도 거의 끝났고 그래서 구시가도 비슷하게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직접 가 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는 (조사를 별로 안 한)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게 볼 게 많았지만 그 만큼 사람도 많았다. 두브로브니크는 두브로브니크 패스를 사면 몇 개의 예외만 빼고 구시가의 주요 관광지를 그냥 들어갈 수 있고 거기에 시내버스까지 공짜다.아침에 구 시가를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갔더니 사람이 정말 많다. 버스를 과연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글바글했고 그들 모두의 행선지는 같아 보였다. 일단 버스가 정류장 표지판에 정확히 정차하지 않기 때문에 줄 서는 게 무용지물이 된다. 관광객들이 줄 서서 기다렸는데 버스가 엉뚱하게 줄 중간 쯤에 정차를 하니 기다리던 사람들이 왕왕거린다. 그랬더니 버스 기사가 나와서 "여기 있는 사람 다 태울 수 있으니 진정해라!" 하고 뭐라고 한다.

두브로브니크의 버스 기사는 무섭다. 버스는 우리나라처럼 앞에서 타고 뒤에서 내리는데 우리나라는 어차피 뒤에도 카드 단말기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을 땐 뒷문으로 타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그걸 짜증내는 기사가 있긴 하다.) 두브로브니크에선 언젠가 승객 한명이 뒷 문으로 타는 걸 봤는데 기사가 차를 세우고 벌떡 일어나서 가더니 그 승객의 팔을 잡고 버스 밖으로 쫓아 내더라. 어느 할머니는 노약자석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앉아 있자 바로 "일어나!" 하고 자리를 뺏는 것도 봤다. 나는 시민들이 건전한 방향으로 어느 정도 분노를 표출할 수 있으면 그게 사회 정의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이런 면이 있고 때로 긍정적으로 작동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지랄할 때 그걸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경우가 많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올드타운에서 내리면 웅장한 감시탑과 함께 두브로브니크의 성곽이 보인다. 구시가 전체를 둘러싼 성곽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고 그 안에도 옛날 건물과 거리로 가득차 있어서 정말 눈이 즐겁다. 이제는 물이 거의 없는 해자를 지나는 도개교가 있고 그 길로 필레 게이트를 지나면 바로 성곽투어가 시작되는 입구가 보인다. 여길 들어가면 일단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라간 뒤 성벽을 따라 구시가 전체 한바퀴를 걸어서 보는데 한 두 시간 쯤 걸린다. 내가 높은 데서 내려다 보는 유럽 도시의 전경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완벽하게 보존된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내려다 보기 정말 좋은 성곽을 통해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는 7세기 후반에 건설된 라구사가 기원이며 동로마, 베네치아, 헝가리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는데 14세기부터 공화국 체제를 만들었고, 헝가리에 돈을 내는 대신 자치권을 확보해 다양한 민족을 수용하는 개방적 문화와 아드리아해 무역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한다. 대서양 무역 길이 열리면서 쇠퇴의 조짐이 생겼고 1667년 지진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1808년 나폴레옹 군대에 멸망한 이후 1990년대 유고 내전을 통해 독립할 때까지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보존이 잘 돼 보이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17세기 지진 이후 복구한 것이고 그 이전엔 더 찬란했다고 하니... (뭐 옛날 도시들이 다 그렇겠지) 결정적으로 유고 내전에서 세르비아 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그 때 도시가 파괴될 고비를 넘긴 것이 컸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업으로 잘 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는 한때 엄청난 히트를 쳤던 <왕좌의 게임> 촬영지로 유명한데(킹스랜딩의 배경이 되었다 한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시즌이 용두사미로 끝나는 바람에 팬을 다 잃어버려서 그 혜택은 별로 못 누리고 있는 듯하다. (왕좌의 게임 박물관도 있다는데 가볼 생각도 안 했다. 아, 두브로브니크가 아니고 스플리트였나?) 영화 한편 덕분에 60년 째 우려 먹고 있는 잘츠부르크와 상반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브로브니크는 왕좌의 게임 따위 없어도 충분히 인기가 많다. 크로아티아는 인구가 워낙 적은 나라다 보니, 호텔 숙박 일수 나누기 인구 수라는 특이한 지표로 측정한 관광 순위에서 유럽 1위를 한 적이 있다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1등을 먹냐 싶기도 하겠지만 난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성곽 투어를 끝내고 내려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렉터 궁전을 봤다. 구시가를 좀 돌아다녔는데 금세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어차피 버스도 공짜고 하니 더 놀고 싶으면 다시 오고 일단 숙소로 들어가서 쉬자고 들어갔다. 숙소가 있는 라파드의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핑거리커(손가락 빠는 사람?)'란 이름의 식당에서 San Servolo라는 크로아티아 로컬 맥주와 시푸드 튀김으로 점심을 먹었다. 한달 넘는 여행 동안 레스토랑에서 밥 먹은게 손에 꼽는데... 그날은 왠일인지 평소 같으면 와이프가 몸에 안 좋다고 꺼릴 음식을 기꺼이 시켜서 너무나 감사하게... (아니 근데 왜 내가 감사?) 숙소에 들어와서 쉬었다.

숙소에 들어와서 와이프가 조용히 얘길 꺼내는데...

"쭈, 내가 이 얘길 너한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세탁기를 돌렸는데 세탁을 마치고 세탁물을 다 꺼내고 난 뒤에 세탁조 안에서 똥이 발견됐다고 한다. 엄청 딱딱한 상태의 똥으로 일단 똥은 확실하며 우리가 보미를 키우면서 보던 것과 같았다고 한다. 고양이 똥이 원래 딱딱해도 세탁조에 돌리면 풀릴 거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딱딱함이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세탁을 마친 (주로 내) 속옷들은 특별히 똥을 처바른 느낌은 없고 깨끗해 보여서 그냥 말리고 넘어갈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하여 나한테 얘기하는 거라고... 짐작컨대 먼저 숙박한 손님이 뭔가 한 거 같다. 주인 아저씨 말로도 그 손님이 개를 데리고 왔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우린 개를 안 키워서 잘 모르는데 개똥도 고양이 똥처럼 딱딱한가? 암튼 이런 더러운 얘길 이렇게 오래 할 건 아니고... 결국 우린 세탁을 다시 했고 똥은 잘 치웠으며, 주인 아저씨가 알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와이프가 문자를 보냈더니 밤에 주인 아저씨가 미안하다며 와인을 한병 선물로 주고 가셨다. 근데 이 와인이 대박이었다!!! 당도, 산미가 나한테 딱 맞고 너무 진하진 않지만 향이 정말 풍부하다. (달단 얘기지.) '딩가츠'라는 이름의 레드 와인으로 크로아티아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와인이라고 한다. 근데 크로아티아 와인이 생산이 많지는 않아서 거의 수출을 안 한다고 하니 아마 한국에선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세탁기 똥 땜에 귀한 경험을 한 셈이 됐다.

숙소에서 쉬고 나니 퍼져서 구시가로 다시 갈 맘은 없어졌고 대신 어제 늦어서 구경하지 못했던 라파드 해변의 일몰을 보자고 걸어 갔다. 라파드의 해변은 크진 않았지만 주변이 다 예쁘고 깨끗하다. 크로아티아는 정말 물이 깨끗하다. (말하는 것도 이젠 지겨울 정도) 날은 아직 덥긴 했는데 그래도 수영하기엔 조금 추운 날씨가 됐다. 더군다나 일몰이 다가오는 시간엔 더욱 그랬고. 저녁 여섯시 전후에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삼삼 오오 모여서 바닷가에 앉아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도 그 무리 중 하나가 됐다. 조용히 앉아서 평화롭게 해를 삼키는 두브로브니크의 바다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집주인 아저씨가 얘기해 주신, 라파드 북쪽의 바빈쿡 야경을 보러 갔다. 비치가 있는 남쪽과는 달리 이곳은 요트를 정박해 둔 부둣가였다. 일단 구경은 잘 했는데, 해가 진지 한참이 지나 깜깜해진 시간에 버스 타기 싫어서 걸어서 숙소까지 가보겠다고 구글 맵으로 지름길을 찍었는데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지나가느라고 진땀을 뺐다.

다음날엔 다시 구시가로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구시가가 끝나는 지점에 여행안내소가 있고 거기서 케이블카 티켓을 파는데 와이프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보다 2유로가 비싸다며, 여기서 사지 말고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사자고 끌고 올라간다. 두명이면 4유로니까 아끼면 좋겠다고 올라갔는데 탑승장에서도 같은 가격이다. 탑승장 줄이 길지 않았기에 난 조용히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면 구시가 끄트머리에서 출발해 그 옆의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산꼭대기에서 보면 구시가 전체가 정말 잘 보인다. (사실은 꼭대기보다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는 중간에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산이 높아서 산 꼭대기에서 보면 구시가가 너무 작게 보인다.)

예전에 와이프랑 산토리니에서 케이블카를 탄 적이 있는데, 그때도 왕복 티켓을 팔고 있었지만 일단 편도로 올라간 뒤 걸어서 내려오자고 했다가 참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산토리니 꼭대기에서 케이블카 ᅟ출발지점까지 내려가는 길은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게 당나귀차 지나다니는 길이다. 당나귀차가 너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당나귀들이 지나가면서 계속 똥을 싼다. 뭐 열심히 치우겠지만 실시간으로 나오는 똥들을 치우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길을 걸어서 내려가는 인간은 우리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 길이 생각보다 엄청 길다. (한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내려 오는 내내 당나귀똥 본 기억, 당나귀똥 냄새 맡은 기억밖에 없다. 참고로 당나귀똥은 고양이똥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암튼 다음엔 절대로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는데 그때 그 난리를 겪고도 무슨 배짱인지 이번에도 편도로 올라가서 걸어서 내려가자고 한다. 꼭 그래야 하냐고. 그래 맘대로 하라고. 똥에 파묻히든 같이 죽지 나만 죽는 것도 아니니 맘대로 하라고... 그래도 주변에 당나귀차 같은 건 안 보이니 고생을 해도 다른 걸로 하겠지. 당나귀 똥보단 낫겠지 하며 도보 하산을 시작했다. 걸으면서 뷰를 좀 더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했고, 똥 같은 건 없었다. 걷는 건 힘들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려 오는 길에 '끼니(Kkini)'라는 간판을 단 엄청 작은 아시아 마트가 하나 있었고 거기서 햇반을 샀다. 더 걸어 내려와 구시가에 다시 들어온 후 어제 성곽 보느라고 다 못 본 두브로브니크 거리를 구경했다. 설명 같은 건 이제 귀찮고 옛 건물들을 감상하다 배가 고파져서 뷰렉이라는 걸 사먹었다. 전통 음식이라고 한다. 츄러스를 조금 닮긴 했는데 약간의 시즈닝을 해서 구운 밀가루 스틱인데 맛있다. 숙소로 돌아와서 카르카손을 두 판했는데 두 판 모두 내가 지고...

나중에 이탈리아에서도 봤지만 호텔이 아닌 아파트 숙소에 조금 특이한 주방 기구가 있다. 뚜껑 없는 엄청 작은 주전자와 가스렌지에 그 작은 주전자를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받쳐 주는 와이어 스탠드가 그것이다. 난 유학 시절 박사 1년차 때 4인이 셰어하는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하우스메이트 중 한 명이 그리스 학생이어서 그 친구가 끓여 준 그리스 커피를 한번 먹어본 적이 있다. 주방 기구를 보자 그 생각이 떠올라 유튜브를 검색하니 만드는 법이 나온다. 그리스 커피는 커피를 거르지 않고 미니 주전자에 라면 스프처럼 넣고 그대로 끓인 다음에 가라 앉혀서 마신다. 좀 걸쭉해지기도 하고 가루가 씹히기도 하여 사실 호불호가 갈릴텐데(우리나라에선 아마도 호보다 불호가 많을 듯) 또 이게 색다른 맛이 있다. 은근히 만드는 재미가 있어서 나중에 이탈리아 가서도 여러 번 만들어 먹었다.

(도착한 날을 첫째 날이라 치면) 넷째 날은 구시가에서 와이프가 보고 싶다고 해서 간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로브리예냑 요새를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일몰도 봤고 내일이면 짐을 싸서 로마로 날아가야 하니 오늘은 쉬기로 했다. 난 뭔가 아쉬워서 혼자 동네 커피숍에서 라떼를 한잔 사 마셨다. (전에 말했듯이 난 유럽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로망이 있고 와이프는 커피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거짓말처럼 날씨가 흐려지더니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왔다. 기온도 갑자기 떨어져 10월이 되니 이제 여름은 완전히 끝났나보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10월 1일이었다.) 암튼 우린 집에 틀어 박혀서 하필 오늘 같은 날 날씨가 안 좋아서 우린 너무 다행이라고 룰루랄라했다. (카르카손도 한판 이겼다.) 이렇게 크로아티아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tempImageyjE0Hx.heic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 바라본 구시가. 옛 교량과 건축물 보존이 잘 되어 있다..
tempImage3nzKh3.heic 성벽. 밖은 아드리아해이고 안은 구시가라 전망이 환상적이었다.
tempImagex2TWqL.heic 계속되는 성벽 아래 구시가에는 현대적인 운동 시설도 보였다.
tempImageB0360a.heic 필레 게이트 근처에 있는 제일 높은 성벽 탑
tempImageH9FRjv.heic 구시가 골목
tempImageRpy1C9.heic 성당 같았는데 무슨 성당인지는...
tempImagekkyRSp.heic 구시가 골목. 사람 많았다.
tempImageMomoKq.heic 핑거리커에서 먹었던 점심. 맥주도 맛있었다.
tempImagezhPf4v.heic 라파드 선셋비치에서 본 일몰
tempImageoNOz7w.heic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
tempImagew86pau.heic 가루를 넣고 거르지 않고 끓여 먹는 그리스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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