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의 유럽 여행 #2. 2025년 9월 24일
우리가 자그레브에 머물기로 한 건 9월 성수기 이탈리아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이탈리아 일정을 10월로 미루기 위해서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육로로 이탈리아까지 차근차근 내려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프랑크푸트르에 내리자 마자 크로아티아로 직행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생긴다. 스플리트나 두브로브니크에서는 9월 말에 수영을 할 수 있다. 비행기로 자그레브에 내리는 것이 비용과 시간 면에서 가장 좋았고 내린 김에 머물며 구경까지 하자고 정해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는 과감히 버렸는데 자그레브까지 버리기는 좀...)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지만 크로아티아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자그레브가 고향인, 플리트비체 여행 가이드 분의 말에 의하면 자그레브 시가 관광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지는 1~20년 정도라고 한다. 그 전에는 관광할 것이 하나도 없는 도시였다고 하는데, 잠깐.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과 독립전쟁을 한 것이 1991년부터 1995년까지라 하는데 전쟁 직후에 관광을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마도 유고 내전은 크로아티아의 긴 역사에서 잠깐이었나보다. 크로아티아라는 이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아마도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겠지만 사실은 훨씬 오래 전부터 고유의 언어와 독립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티토 한 사람의 하드캐리로 번영했던 유고연방은 티토의 사망과 공산권의 붕괴를 계기로 해체 수순을 걸었으며, 연방에 속한 나라들이 하나 둘 씩 독립하는 과정에서 오랜 내전이 있었고 많은 희생과 상처를 남겼다. 크로아티아와 유고연방 종주국이었던 세르비아는 내전 이후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나라지만 희한하게도 두 나라 사람이 대화를 하면 각자의 언어로 말을 하면서도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을 먹고 시내를 구경하러 나왔다. 담배 가게에서 트램 표를 사서 올라 탔다. 한국엔 없지만 유럽에서는 흔한 트램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트램 표값이 많이 쌌다. 59센트? 이탈리아는 1.5유로 정도, 오스트리아, 독일은 2유로가 넘어간다. 올라 타면 종이 티켓을 기계에 넣고 찍어야 되는데 잘 안 돼서 해보다 나중엔 표만 사고 안 찍고 타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면서 장소에 얽힌 이야기들을 검색해 읽으면서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유고 내전의 역사를 조금 알게 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독립전쟁을 기억하는 모습과 인구 400만의 작은 나라임에도 월드컵에서 (좀비?) 축구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모습에 강한 조국애가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고연방에 속해 있을 때도 독립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었던 나라지만 그렇게 국민이 뭉치게 된 데에는 아마도 전쟁의 영향이 컸을 거라 짐작한다. 국가가 생명력을 얻는 데 전쟁이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국민들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로, 좀비 축구란 객관적 전력이 앞서는 팀을 상대로 체력과 정신력으로 상대가 질릴 때까지 버티고 버텨서 연장까지 간 후, 공격 몰빵으로 한점 내고 잠그기 또는 승부차기에서 될대로 되라 해서 이기는 축구를 말한다. 2002년 한국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상대할 때 이 방법을 썼으니 한국은 월드컵에서 어쩌면 좀비축구의 원조이다. 물론 크로아티아는 우리나라보다 축구 수준이 월등히 높다.)
자그레브는 대단히 인상적인 게 있진 않지만 차분하고 편안한 곳이다. 물가도 싸고 음식도 맛있으며 길거리가 깨끗하고 사람이 많지 않아 복잡하지 않아 좋았다. 나중에 로마나 피렌체에서 미어터지는 인파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여긴 천국이었다. 중앙역까지 트램을 타고 가서 토미슬라브 광장과 즈리네바츠 공원, 반 옐라치치 광장을 구경했고 돌라체 시장, 성 마르크 성당, 글리치 터널, 스톤게이트를 차례로 걸어다니며 구경했다. 이렇게 주요 관광지를 깨알 같이 챙기며 찍고 돌아다니는 건 여행 초기 단계의 습성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엔 체력도 바닥나고 엄청난 건물을 봐도 무덤덤해져서 중요한 것들을 안 보고 지나치는데 망설임이 없어진다. 로트르슈차크 탑에서 받은 자그레브 한국어 여행가이드는 버리지 않고 잘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책이어서 이후 냄비 받침으로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탑에서 본 자그레브 전경은 멋있었다. 혼자 온 한국 여행자분이 우리 두 사람 사진을 찍어 주고 갔다. 난 이런 데서 내려다 보는 역사 깊은 유럽 도시의 전경을 정말 좋아한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입장도 안되고 커버로 덮여 있었다. 비교적 모던했던 트칼치체바 거리가 예뻤으며 그곳의 바탁 트칼치체바 식당에서 사먹은 크로아티아 로칼 맥주인 칼로바코 맥주와 크로아티아 전통 소세지 요리가 맛있었다. 커피를 사 먹고 싶어서 호텔 근처 카페로 보이는 곳으로 갔는데 알고 보니 술집이었다. 낮 시간이라 술 손님은 적었지만 그 곳에서 어울리지 않게 커피를 마시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