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되지 않은 여행, 뜻밖의 즐거움
갑작스러운 일은 늘 부담스럽다.
계획에 없던 일정은 일상의 리듬을 깨뜨리기 마련이라 대부분 피하거나, 슬쩍 빠져나올 구실을 찾곤 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우선 가는 인원이 적었고, 제안을 주도한 사람의 열정이 거절하기 미안할 만큼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같이 가시죠?”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평소처럼 일어나 밥을 먹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뉴스에서 기온이 17도까지 오른다고 하니 따뜻하게 입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가벼운 겉옷만 걸치고 그대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바람이 많이 분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춥구나! 다시 집에 가기가 귀찮아 그냥 가기로 했다.
"어차피 걸으면 더워질 텐데 뭐."
하지만 예상과 달리 더워지긴 했어도, 땀에 젖은 옷 때문에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걸으니 좋았다. 아침 일찍 걸으니 더 좋았다.
길은 간간히 등교하는 학생들과 산책하는 어르신들 빼고는 고요했다.
물론 출근차량들은 여전히 부지런했지만.
40여분을 걸어 도착한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책을 좀 보고 있자니 나머지 일행이 도착했다.
9시 5분, 구례로 출발했다.
가는 길은 쾌청했고 시간은 적당히 잘 흘렀다.
화엄사 입구에 도착해 직원이 추천한 맛집을 찾았지만 간판이 바뀌었는지, 가게가 사라진 건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올라가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도 예전에 왔던 곳이라고는 하는데...
그렇게 들어선 가게 안 벽에는 '6시 내 고향' 로고가 박힌 사진 한 장이 걸려있었다.
지금은 TV에서 불 수 없는 연예인과 젊은 시절의 주인아주머니가 웃고 있는 빛바랜 사진만이 이곳의 시간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사진 속 푸짐한 한상차림은 우리가 받은 음식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차려져 나온 상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물 몇 가지와 손가락 세 개를 합한 크기의 조기 몇 마리, 간장에 조린 감자, 아무렇게나 담아낸 그저 그런 반찬뿐이었다.
그조차 간이 맞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억 속의 ‘맛집’은 영수증 한 장과 함께, 기억 속에서도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어쨌든 우리는 점심을 해결하고 사성암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사성암을 향하는 길은 내내 평화로웠고, 차 안을 비추는 햇살은 식당에서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듯 부드러웠다.
사성암 주차장에 차를 놓고 100여 미터의 가파른 도로를 걸어 도착한 그곳의 전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벌교 읍내와 섬진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 야트막한 돌담길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선사하고,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붉은 담쟁이는 가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는 풍경이 아닌, 가슴이 탁 트이면서도 뒤에서 부드럽게 안아주는 연인의 품 같은 곳.
앞은 장쾌하게 너른 들을 지나는 섬진강이 보이고 뒤에 우뚝 솟은 암벽은 따스한 가을햇살을 머금어 부처의 손길처럼 아늑했다.
그렇게 한참을 경치에 빠져 있다 내려오는 길, 소원바위를 지나게 되었다.
바위틈 곳곳에 끼워져 있는 동전을 보니 무언가를 비는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우리도 가지고 있던 동전을 꽂으려 더듬거렸지만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위 중간정도에 턱이 진 곳이 보였다.
"저기다 던집시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성공!!
그 모습을 보던 아주머니가 다가와 "그럼 나도", 아주머니의 계속되는 실패,
우리는 동전을 주워다 주며 “다시 해 보세요!”라고 응원했다.
마침내 성공! 고요하던 암자에 ‘와! 올라갔다!’는 환호가 퍼졌고, 이어지는 아주머니의 낮은 목소리
"우리 엄마, 건강하게 해 주세요."
보통 자식들의 성공, 가족의 건강 등을 빌던데, 콕 집어 엄마의 건강을 비는 아주머니의 마음이 특별했다.
내려가는 우리의 등뒤에 대고 "덕분에 고마워요"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기쁨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내 머릿속을 맴도는 건 사라진 식당에 대한 아쉬움과 달라진 맛에 대한 서운함이 아니라 아주머니의 낮은 기도소리였다.
시간은 모든 걸 바꾸지만, 사람의 간절함과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여전히 그 제자리를 지킨다.
난 여전히 계획된 일정이 좋고 집을 벗어나면 돌아갈 생각부터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야말로, 소소한 행복과 깊은 감동이 숨어 있다는 걸.
모든 것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어떤 마음은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킨다는 걸.
그렇게 이번 사성암 여행은 내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선물이 되었다.
2022.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