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그대로 두면 낭만이 된다.

잊힌 것은 그대로 잊어도 괜찮은 것일까.

by 정춘필

사라진 풍경, 변질되는 기억

인간은 자신이 닿는 어느 곳이든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든, 인간은 기어코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숨 쉬는 자연이건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이건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손길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빠르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길을 향해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산은 깎이고, 물은 메워져 새로운 땅이 되며, 싱그러운 농작물이 자라던 들은 무참히 밀려나고 말았다.

발아래 부드럽던 흙 대신 단단한 아스팔트가 깔리고, 갈대가 넘실대던 평화로운 갯가는 시커멓게 빛나는 태양광 패널로 뒤덮였다.

굽이굽이 돌아가던 정겨운 옛길은, 아름다운 곡선을 잃고 직선으로 반듯하게 펴졌다.

그 길 위에 드리워졌던 오래된 나무의 그림자, 이름 모를 풀꽃들의 숨결도 이제는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지고 없다.


지나는 길가의 초등학교는 어느새 농산물가공지원센터라는 낯선 이름을 달았다.

햇살이 가득 쏟아졌을 2층 교실은 거대한 간판에 가려져 낮에도 어둑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운동장엔 자동차들만 빽빽하다.

한때 그곳을 누비던 작은 발자국들이 남긴 이야기는 이제 차가운 엔진 소리에 쫓겨 흔적조차 없다.

우리가 더 빠르게, 더 많이 소유하려 애쓰는 동안, 세상의 많은 것들은 제각각의 속도와 빛깔을 잃어간다.


추억은 그대로 두면 낭만이 된다

어떤 것들은 먼지 쌓인 사진첩 속 오래된 풍경처럼,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것을 비효율적이라 여기며 새로움이라는 이름 아래 무언가를 끊임없이 부수고, 덧칠하고, 지워버린다. 그 결과 어제의 추억 위에 현재가 덧칠해지고, 기억은 점차 흐려지며 변질된다.

이렇게 한번 변질된 기억은 모호해지며, 결국 소중했던 추억마저 우리에게서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다.

추억은 그대로 두면 낭만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는 추억을 지워버려 낭만도 잃어버렸다.


저기 보이는 태양광 패널 너머에 한때 푸른 바다가 갯내음을 품고 있었고, 이 아스팔트 아래에는 작고 여렸던 우리가 함께 웃으며 뛰놀던 놀이터가 있었다는 것을 누가 기억할까.

수몰된 마을은 길도, 집도, 우물도 그대로 품고 물속에서 오래된 추억을 간직한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깎이고 메워져 버린 산과 길은 그 어떤 기억도 품지 못한 채 사라질 뿐이다.

그곳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정취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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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다는 슬픔

잊힌 것은 그대로 잊어도 괜찮은 것일까.

잊힘은 사람뿐 아니라 길도, 산도, 물도 서럽게 만든다.

그들에게도 한때는 고유한 시간이 있었고, 숱한 삶의 이야기가 스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잊힌 것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슬픔 위에, 또 다른 무심함이 덧칠된다.

덧칠된 무관심은 상실을 낳고, 그 상실은 시간과 장소를 바꿔가며 반복된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장소, 하나의 풍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손으로 지워버린 그 자리에 깃들어 있었던 수많은 인연, 삶의 흔적, 그리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깊은 숨결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잊힌 기억만큼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지녀야 할 감정과 연대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지워진 풍경 앞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묻는 일.
적어도 '있는 그대로 두는 일'을 하지 못한 우리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표하는 최소한 예의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잊힌 것들은 정말 그대로 잊어도 되는 것인가.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우리가 시작해야 할 기억의 첫걸음이 될지 모르겠다.


2021. 5월, 도대길을 지나며 사라진 것을 추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