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미·이란 전쟁이 던지는 경고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호모데우스"에서 인류가 기아와 역병, 그리고 전쟁을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였다고 낙관했다. 그러나 2026년 2월, 테헤란의 하늘을 가르는 미사일 궤적은 그 낙관론이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나는 그날 '속보'라는 붉은 자막이 흐르는 화면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을 먹었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기도 했다. 그렇게 무감각은 나를 전장에서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인터넷에서 마주친 사진 한 장이 그 안일한 거리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폭격으로 숨진 175명의 아이들이었다. 테헤란 타임스의 기사 제목은 단 한 문장이었다.
“트럼프, 이들의 눈을 보라.”
그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전쟁이 내 옆으로 성큼 걸어왔다.
우리는 지금 '평화의 시대'가 아닌, 압도적인 힘에 의해 잠시 억눌려 있던 '전쟁의 유예기'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다. 이 전쟁은 단순히 영토나 자원을 뺏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재집권한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대한 자아(Ego)와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이어진 민족적 자존심이 충돌하며 빚어낸 인류학적 비극이다
도널드 트럼프를 단순히 전쟁을 즐기는 광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그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이자,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에 집착하는 '브랜드 메이커'다.
과거 19세기 영국이 '영광스러운 고립'을 택하며 실리를 챙겼던 것처럼, 트럼프 역시 미국의 피를 흘리는 '영원한 전쟁'에는 관심이 없다. 그에게 이번 전쟁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낸 비즈니스'여야 한다.
그는 이란의 항복 문서라는 형식적 절차보다, "미국을 위협하던 핵 시설을 내 손으로 파괴했다"는 '임무 완수'의 서사를 원하는 듯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압도적 파괴를 공언하면서도, 정작 금지된 무기 사용에는 주저할 것이다. 이는 인도주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금지된 무기를 다시 사용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순간, 평생 일궈온 '트럼프'라는 브랜드 가치가 실추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파괴자보다는 승리자로, 전범보다는 "냉혹하지만 유능한 해결사"로 기억되길 원하는 철저한 장사꾼이다. 그래서 그의 전쟁터는 전장이 아니라 결산 보고서 위에 있다.
이란을 마주한 미국이 범한 가장 큰 실수는 그들을 단순한 '독재 정권'으로 봤다는 것이다.
이란은 1953년 CIA와 MI6가 개입했던 '아약스 작전'의 치욕을 기억하고 있으며, 1979년 스스로의 힘으로 왕정을 뒤엎은 혁명의 기억을 공유하는 민족이다.
또한 이란은 시아파로서 수 세기 동안 외부의 적에 맞서며 '생존의 근육'을 키워왔다.
7세기 카르발라 전투에서 순교한 이맘 후세인의 서사는 오늘날 미군의 공습 아래서 다시 부활할 조짐을 보인다. 만약 미국이 지상군을 진입시키면 이란인들은 이를 정권 교체의 신호가 아니라, 페르시아라는 민족적 자존심에 가해지는 엄청난 모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의 '동장군'과 민족주의 앞에 무릎 꿇었듯, 미군이 만약 지상군을 투입해 '인간의 늪'으로 들어간다면, 그들은 첨단 무기가 아닌 9,000만 명의 결사 항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힐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모즈타바를 정점으로 한 이란의 지도부는 신전의 기둥을 밀어버리는 '삼손 옵션'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이는 단순한 자폭이 아니라, 혼자 죽지 않겠다는 고대식 복수의 재림이 된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지만, 인류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존재한 적이 없다.
로마가 지배하던 '팍스 로마나'나 2차 대전 이후의 '팍스 아메리카나' 역시 압도적인 제국의 힘이 공포를 통해 전쟁을 억제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하는 제국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판을 흔드는 체제 교란자가 되었다. 특히 '한쪽의 절멸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은 중동에서는 제국의 억제력이 사라진 자리를 광기와 증오가 채워가고 있다. 이처럼 제국의 질서가 흔들리는 순간, 그 여파는 언제나 가장 민감한 단층선으로 번져 간다. 불행히도 그 충격파는 중동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반도에서도 감지된다.
중동에서 발생한 이 거대한 태풍의 눈이 언제든 한반도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다음 타깃은 북한이라며 공공연히 목소리를 높인다.
이번 전쟁에서 예상되는 '트럼프식 전쟁'—타격 후 승전 선언—은 휴전선을 마주한 우리에게는 차원이 다른 생존의 위협이다. 전쟁은 언제나 지도자들의 말에서 시작되지만, 그 말 끝에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하는 시민들의 삶이다.
우리는 미국의 강경과 일부의 선동에 동조하며 북한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는 대신, 사태의 이면에 숨겨진 통치자들의 속내와 선동꾼들의 정치적 계산을 명확히 읽어내야 한다. 넘쳐나는 프로파간다 속에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객관성을 지키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다.
일면 '처세'라는 말이 나약해 보일 수 있겠으나, 거대한 고래들의 싸움에서 새우의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가장 필요한 건 '시대를 보는 눈'과 '흐름을 타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강자는 '전쟁'에서 살아남지만, 처세를 잘하는 나라는 '역사'에서 살아남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이전에, '끝내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너무 경계하며 적대감을 키우지도, 너무 낙관하여 무방비 상태에 놓이지도 않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야말로 씁쓸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이 가야 할 '처세의 미학'이다.
현대에 들어서며 전쟁은 군인들끼리의 전유물에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이 그러했듯, 2026년의 이란 전쟁 역시 무고한 시민들의 삶을 볼모로 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오만과 자존심이 전쟁을 만들지만, 그 전쟁의 끝을 결정하는 것 또한 인간의 냉정한 생존 본능이라는 점을.
트럼프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승리라는 이름의 퇴장'을 선택할 때, 우리 역시 그 혼란의 끝에서 살아남을 준비를 해야 한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거친 전쟁의 파도를 읽어낸 자들만이 가까스로 얻어낼 수 있는 '일시적인 고요'이기 때문이다.
* 아약스작전 :1953년 CIA와 MI6가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 정권을 전복, 팔레비 국왕을 복귀시킨 사건으로 이란에 뿌리 깊은 반미감정을 남김
* 이맘 후세인: 7세기 수니파 세습 왕정에 맞서 장렬히 순교한 인물
* 삼손옵션: 원래 이스라엘의 최후의 날 시나리오
대문사진: Unsplash의 Saifee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