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무료한 날이었다. 딱히 할 것은 없고 조금 심심하고.
어린 나는 그럴 때 괜히 이것저것 뒤적거리기를 좋아했다.
문갑, 장롱, 재봉틀장 등을 열어 뭐가 있나 보곤 했다.
그날은 사진이 끌렸던 모양이다.
엽서 크기의 비닐 사진첩과 노란 철제 상자를 꺼냈다.
철제 상자의 모퉁이는 노란 칠이 벗겨져 있었다. 군데군데 조금씩 긁히고 녹슨 부분도 보였다.
어느 영화에서 본 낡고 오래된 비밀 상자를 열던 장면을 떠올리며 살짝 호기심이 일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한참 사진을 보는데 어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내 어릴 적 사진인 것 같았다.
외할머니댁이었고, 이모들과 엄마의 모습이 다소 앳되어 보였다.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잡은 모양새가 아마도 나는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내 사진인가 보네...' 흥미로워하며 무심코 뒷면을 보았는데
“ㅇㅇ 야 얼른 자라서 이모와 함께 숨바꼭질하자꾸나”
라고 쓰인 글씨가 있었다.
작은 이모였다. 볼펜으로 써진 글씨는 꽤 오래된 듯 살짝 흐렸고 뿌옇게 번져있었다.
소풍에서 보물 찾기를 하다가 보물이 적힌 쪽지를 발견하면 그런 기분일까.
어?! 하며 정신이 확 들었다.
다른 사진들의 뒷면도 보았으나 그 한 장에만 적혀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좋았고 왠지 자랑하고 싶었다.
엄마엄마, 이것 좀 봐- 하고 자랑을 하고, 언니 오빠에게도 보여주었다.
그래도 끝나지 않았다. 그 이상하게 기분 좋고 자랑스러운 마음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커지는 것 같다.
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이모이자 고모가 된 지금까지도-.
오래오래 여운이 남고 그 여운은 물결처럼 밀려와 마음에 닿는다.
그렇게, 사랑받았다는 기억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준다.
세월이 흘러 내게 숨바꼭질하자던 작은 이모는 아들 둘을 낳았고, 큰아들은 직장인이 되었다.
작은 이모는 알까?
자기가 찍은 사진이, 조카에게 써준 글 한 문장이 어떤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