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남사친
강한 여름 볕이 쏘아대는 날이 계속되었다. 시간은 아지랑이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시간의 흩어짐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건조하고 무더운 시간을 인내하는 것은 해결이 안나는 문제와 씨름하며 답을 찾는 마음과 같다. 견디기 힘든 인내심만 필요하다. 노력에 대한 보상조차 확실할 수 없다. 무의미한 노력은 아닐까 의심하는 시간말이다. 걷기 힘든 여름날 나는 학교로 향했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정오였다. 하숙집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정문에 다다른다. 그다음 신작로가 길게 뻗어 있고 두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익숙한 길로 계속 걷는데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고향 광주에 있었다면 집에 널부러져 있을 나였다. 방학이었지만 고향 광주에 내려가지 않았다. 서울에 머물면서 도서관을 매일 오고 갔다.
함께 어울리는 오빠들은 이미 도서관에 도착해 있었다. 정문에서 다시 15분을 더 걸어서 나 또한 도서관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점심시간이었다. 각 자의 책상 밖으로 나와, 도서관내 우리가 늘 상 모이던 자리에 모두 모였다. 복학생 오빠들 7명은 비슷한 시기에 군에 입소했다. 제대 후 약속한 사람들처럼 학교로 함께 되돌아왔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붕어빵처럼 닮아버린 서로의 변화였다. 오빠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나는 전공 강의보다 관심 있게 들었다.
“야 이제 너 속 좀 차렸네.”
“당연하지. 야 지금 3학년 아니가. 너도 마찬가지인데.”
“그래 1, 2학년 때처럼 놀다가 이제 인생 망하지.”
“그래도 이거 원, 매일 ‘도서관 죽돌이’ 신세네.”
“와 이라노? 여기 우리 여신도 있다. 도서관 여신”
'여신'은 공대에서 홍일점이었던 나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여신이라는 말에도 개의치 않는 표정의 나였다. 자연스럽게 다음 대화를 더 듣겠다는 표정과 감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입학하고 3학년 될 때까지 계속 홍일점이었던 나는 그런 대우에 대해 오히려 식상했다. 무표정한 느낌이었지만 실상 다른 고민으로 복잡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방학인데 놀러 한 군데를 못 가는 거야?"
"그러네."
"수근이 너네 시골집으로 우리 다 같이 놀러 가는 건 어때?"
"와? 가서 고추 따고 논밭에서 일 좀 할래? 농활활동! 부모님은 완전 좋아하시겠다. 자는 곳도 불편할 텐데... 생각 있으면야 우리 부모님은 대환영이지. 안 그래도 일 손 부족한 철인데."
"아 이 더위에 농활? 하하하"
"그래? 그럼 우리 집에 가자."
부산이 고향이었던 서진 오빠의 말은 우리 모두의 지루한 일상에 늦은 비와 같았다. 자비로운 비가 시원스레 다시 내려온다는 소리처럼 신선했다. 나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나의 요즘 고민거리의 주인공도 다름 아닌 서진오빠였다. 서진오빠 화법은 매사에 ‘츤데레’ 같았는데 '우리 집에 가자'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의미를 담은 문장도 아닌데 ‘또 다른 사적인 의미는 없는지?’ 오빠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놀랬던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내가 돌아와서 보니, 휴가는 계획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날짜도 10일 후로 정해졌다. 남은 기간 동안 '휴가, 부산, 바다'라는 화제로 서로 기대를 담아 수다 떠는 일만 남았다.
즐거운 일! 이걸 기다리는 느낌은 이중적이다. 기다림으로 채워가는 시간은 처음에는 더디다. 막상 눈앞에 닥쳐왔을 때는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새 와 버렸나 싶다. 주춤거린다. 나에게 여행은 매 번 이런 다중적 느낌을 준다. 여행을 위해 계획하고 상상하는 시간에는 출발 시간이 빨리 오기만 바란다. 그렇게 바라다가도 막상 출발 전날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상한 마음.
사랑을 할 때도 그럴까? 대학 입학 이후로 오히려 남자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진지하게 만날 상황이라는 게 부담되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가볍게 만날 시기가 아니었다. 반항심이나 약간의 '놀이'의 개념으로 만날 조건이 내게서 사라져 버렸다. 홍일점이라는 조건이 그렇다. 누굴 만나도 그 만남이 뉴스거리가 될 게 뻔했다. 차라리 여대를 다녔다면 연애를 죽자고, 수시로, 다양하게, 가끔은 더블로 했을 나였지? 않나 싶다.
택시를 탔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응 엄마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아니 저렇게 큰 딸이 있어요? 저는 언니랑 동생 사인 줄 알았어요. 엄마가 너무 젊으시네."
택시 기사 아저씨와 미래씨는 얼굴이 더 밝아지더니 뻔한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이미 너무 자주 들어온 대화였다. 대화 내용은 안 들어도 외워질 정도였다. 택시 기사님처럼 처음 만나서 낯선 사람과 친하게 얘기하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도착할 장소에 이르렀다. 미래씨와 기사님은 서로 헤어지는 인사까지 정겹게 주고받았다.
다음으로 미래씨가 나를 데려간 장소는 정확하지 않다. 거기 앉아 있었던 사람의 얼굴만 역력히 기억에 남는다. 엄마의 소개에 의하면 고향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남사친이었다. 나에게는 셋이서 함께 있었다는 기억만 남았다. 그 시간이 얼마 정도였는지, 어떤 대화를 서로 주고받았는지, 나의 감상의 키워드라든지, 이런 종류의 세세한 것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나는 감정을 굳이 얘기하라면, 하나 정도 얘기할 수 있다. 익숙하면 별 수 없이 낯섬보다 좋은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처럼. 사춘기 전이라 가능한 느낌일 수도 있다.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과 미움이 시작된 시간은 중학교 이후부터였으니까. 바쁜 아버지와 관계에도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에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이 순간 들었다. 그 남사친의 존재를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낯설었다. 반갑지도 않았다. 그분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이 안 가는 얼굴'이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는 나이였다.
관심이 없다 보니, 그가 별로였다.
'내일이네. 아~ 가방 어떻게 싸?'
여행 가방 싸는 일조차 '이삿짐'을 정리하는 것처럼 거대한 작업으로 여겨졌다. 여행 출발 전 날마다 나는 '증후군'증세가 나타난다. 이중적 감정이 샘솟는다. '싫어? 좋아?'의 이중주가 내면에서 계속된다. 나의 마음은 방황을 계속한다. 익숙하지 않은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야 할 여행지를 생각하면 익숙한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어진다.
그 시간 이런 마음은 여행에 대한 심정만은 아니었다. 서진오빠를 향한 나의 마음도 오락가락이었다.
'좋아? 몰라! 싫어? 그건 아닐걸. 몰라! 결국 귀찮아.'
“아~ 하긴 부산은 갈 때마다 좋긴 했어. 진아언니도 함께 간다니까. 싸자. 싸! 으아악~”
진아언니는 민호오빠의 여자 친구였다. 언니와는 몇 번 만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언니 성격이 좋아서 그룹 오빠들도 언니를 좋아했고 나는 특히 여자를 좋아했다. 항상 홍일점이었던 지라, 그룹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더 생기는 일로 너무 즐거웠다.
진아언니는 민호오빠와 동갑이었다. 이미 동네 친구로 알고 지낸 건 오래전이었고, 연인으로 만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우리와 함께 알기 시작할 즈음, 진아언니는 스튜어디스였다. 세계 방방 곳곳을 돌아다녔고 셀러리도 높았다. 위험수당이라는 것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때는 지금과 달리 항공사도 몇 개 없었다. 물론 코로나도 없었다.
처음에는 민호오빠가 쭐래쭐래 진아언니를 쫓아다녔다. 진아언니는 단발머리가 너무 잘 어울렸다. 눈이 커서 호수 같은 눈으로 웃으면 정말 예뻐 보였다. 민호오빠 키가 185cm, 농구선수 같은 느낌이었고, 진아언니도 오빠와 나란히 섰을 때 잘 어울리는 외모였다.
나처럼 언니는 빨간 립스틱을 사용했다. 다만, 나는 화장할 줄 몰라서 (베이비)로션을 바르고 그 얼굴 위에 '빨간 립스틱'만 덧붙였다. 피부톤이 매우 하앴던 나는 하얀 종이 위에 입술만 화장 흉내낸 꼴이었다. 화장에 능숙한 진아 언니는 조화로운 화장을 한 후에 입술도 더 예쁘게 발라주었다. 어색함과 조화의 차이가 나의 립스틱과 언니의 립스틱 차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의 부조화도 존재했다. 내가 생각하는 언니의 부조화, 단점은 딱 한 가지였다. 연애라는 인간사에 서툴었던 당시 나로서 그런 민호오빠와 진아언니 사이가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은 내 앞에서 부조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커플이었다.
이번 여행에도 동참하겠다는 진아언니 민호오빠가 부산에서 만들 요란스러움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 말할 친구가 늘 그리웠던 나로서 언니의 동행은 무척 신나는 일이었다. 시간 지나 생각해 보니 서진오빠와 민호오빠가 나를 배려하고 싶어 진아언니도 초대한 것 같다. 짐작이다.
가방 싸는 일에 속도를 붙였다.
10대부터 남자친구가 꾸준히 있었다. '남성편력'을 가졌던지 싫증을 잘 냈다. 나는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는 '노는 십 대 아이'였다. 십 대의 연애는 '연애'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친구 만나다가 맘 바뀌면 새로운 애랑 페스트 푸드점, 오락실, 노래방 함께 다니는 수준이었다. 남자친구를 만나는 이유가 '호기심'이 반이었고 '아버지 몰래 하는 일'이라는 전제가 반이었다.
숨어서 하는 '복수'의 심리였다. 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이고 나를 나무라실 때 폭언이 심했다. 아파트 5층 집에서 소리치시면 1층 아파트 정원에서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유는 비슷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상태로 내가 행동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시도하는 게 싫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사춘기 딸의 복수심'이었다. 하지 말라고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심리다. 게다가 몰래 하면 훨씬 흥미진진해진다.
'놀던 사춘기'도 멈출 때 멈추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대학교 가겠다고 맘먹고 공부 시작한 건 고 2 때부터다. 그때부터는 '맹수에게 쫓겨 곧 잡아 먹힐 위험에 처한 기린'처럼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다음 달 내가 따라잡을 등수를 정했다. 정해진 등수를 이미 차지하고 있었던 친구랑 가까이 지냈다. 친해지면서 그 친구의 공부량이나 학습 방법을 관찰했다.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따라잡는 것이 목표였다. 결과는 원하는 대로 나왔다. 다음 타깃을 정했다. 비슷하게 반복했다. 나의 포지션이 계속 높아졌다.
그러다 턱 하니 벽에 부딪혔다. 다음 타깃은 드디어 반에서 부동의 1등, 전교 1등은 80% 정도 차지하는 강소나였다. 소나와는 이미 친했다. 그전까지 해본 적 없었던 관찰을 시작했다. 관찰한 데이터에 의하면 소나의 학습법은 학습량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유아기부터 시작해서 족히 15년 이상 쌓인 삶의 습관이었다. 15년 동안 성실함으로 쌓아 올린 철옹성을 단 1-2개월 만에 점령한다? 어렵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이미 고 2였고 2학기 과정을 지나고 있었다. 정신적인 유익을 누리는 방향을 선택했다. 소나를 타깃 설정에서 내려놨다. 다음 할 일은 포지션 유지와 마인드 관리가 핵심이었고 해냈다.
'놀 줄 아는 끼 있는 학생'의 이미지는 나에게서 사라졌다. 종아리가 붓고 체중도 15kg 정도 늘었다. 남자친구랑 오락실 가는 일 따위에는 흥미조차 없어졌다. 당시 같은 반 친구들이 내가 성적을 올렸던 방식을 이제라도 알게 된다면, 나에게 '네가 기린이라고? 오히려 맹수가 너 아냐?'라고 말할 것 같다. (하이에나 같았던 나라면 미안하다 친구들. 새삼스럽지만 ㅠ.ㅠ)
학대를 통해 상처와 결핍이 많은 성장기를 가진 사람에게 의외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 사람의 두뇌는 무척 발달된다. 살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유전적인 이유가 아닌데 상황판단에 빠르고 집중력이 뛰어나서 머리가 좋아 보이는 성향을 가진다. 생존본능이 발달되어서 그럴 것이다. 귄위의 대상들에게 칭찬이 아니라 오히려 두들겨 맞고 폭언을 듣다 보면 그 억눌린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두뇌회전이 빨라지는 것이다. 쉬운 말로 그 사람은 늘 머리를 굴린다.
기린처럼 달아나는 사람이었다가도, 언젠가는 살기 위해서 맹수로 변할 줄도 아는 머리.
부산 여행 호스트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서진 오빠였다. 나와 진아언니를 위해서도, 다른 오빠들을 위해서도, 잠자리, 먹을거리, 놀 거리 등 모든 일정을 흠없이 진행하려 했다. 우리끼리 가라오케를 가는 밤이었다. 한 날 밤에 서진 오빠는 오빠들을 위한 서비스를 준비했다. 나중에 사건으로 기억될만한 이벤트를 주최했다. 생각지 못한 분을 우리 방으로 초대했다. 한 '언니'가 등장했다. 그 언니는 한 손에 탬버린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 시절 나이트 부킹을 하거나 드라마에서 보는 '살롱'의 장면들과 유사한 시작이었다. 드라마에서야 남성 직장인들의 사치스러운 스트레스 푸는 시간이거나 회사 영업을 위해 상대바이어를 꼬드기려는 수단으로 연출되는 장면이다. 가끔은 지하 조직의 일상적인 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언니'들이 엑스트라로 남자 연기자들 사이에 한 명씩 앉아 있는 흔한 장면 말이다. 그 언니를 처음 보는 나는 드라마의 한 장면 속 언니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가라오케 방에는 오빠들 7명, 탬버린을 든 언니 1명, 진아언니 그리고 내가 함께 있었다. 남성과 여성 비율로 보자면, 7대 3이었다.
우리만의 가라오케 방에 또 다른 붉은 립스틱의 여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 여인의 입술에 발라진 붉은 립스틱도 그녀에게 매우 잘 어울렸다. 타이트한 옷 위에 화사한 화장은 나무랄 데 없었다. 진아언니와는 다른 느낌의 밝음을 가진 언니였다. 그녀의 밝은 성격이 직업 정신에서 나오는 건지 타고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붉은 립스틱을 나는 유심히 바라봤다. 세 개의 비슷하지만 다른 립스틱이 서로의 화장을 통해 한 자리에서 만난 격이었다. 나와 진아언니 그리고 7명의 남학생들 속에 여전사처럼 홀로 서있던 탬버린 언니. 전혀 기죽지 않는 밝은 미소로 탬버린을 자꾸 흔들었다. 묘한 연민을 느꼈다.
나는 비행기를 자주 타는 진아언니에게도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연민은 다른 종류였다. 탬버린을 들고 있던 여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가책감의 심리도 포함되었다. 만약 '내가 그녀였다면?'이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고 서진오빠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자본주의의 원리로 형성된 유흥생산과 소비의 일종이니까.
가라오케 방에서 나의 당혹스러움도 멈췄다. 그 순간 서진오빠가 야속하게 생각되었다. 그룹원 7+2명이었으니까, 각 각 한 명씩 호스트와 호스티스를 초대해 줬다면? 나는 그 방 누구도 연민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테니까. 초대받은 사람이 1명이다 보니, 그 여인이 내 친구나 나의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놀아본 사람들은 서진 오빠, 민호 오빠, 진아언니였다. 나는 공식적으로 나의 놀아본 사춘기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오빠들은 내가 공부만 열심히 하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또 순수하게 살고 있는 여대생으로 짐작했다. 그 누구도 내가 만나왔던 남자 친구 얘기를 몰랐다. 내가 다녔던 오락실, 락카페, 뮤직비디오 카페도 몰랐다. 나의 부모님 다음으로 나를 몰랐던 사람들이 오빠들이었다. 놀아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남은 5명 오빠들은 어색해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말문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 언니가 탬버린을 흔들 때마다 우리는 당혹스러움과 어색함을 함께 처리해야 했다. 나는 노선을 결정했다. 대학 선배언니 중에 '나이트 죽순이'로 지내는 언니를 만나는 것으로 결정했다. 같이 일어나서 리듬에 맞춰 함께 웃으면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잘 놀고 나서 딴 소리 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니까. 나도 탬버린을 들었다.
다른 오빠들과는 달리 그 방을 나와서도 나는 서진오빠에게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서진오빠는 부산 여행을 마치고 나서 시간이 더 지난 후에 내 마음을 물어보았다. "당황했지? 그날 내가 미쳤지."
나는 늘 그렇듯 웃으면서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만 지었다.
숙소였던 오빠네 집, 큰 아파트로 돌아와서 오빠에게 지었던 나의 표정과 유사했다. 서진오빠는 집에 도착한 후로는 '예비군 재소집일'을 마치고 군복을 벗은 '대학생'처럼 또 다른 정신의 소유자가 되었다. 나와 진아언니 주무실 자리라며 무척 정성을 보였다. 나도 가라오케의 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은 사람처럼 친절한 오빠에 태도에만 대응했다.
진아언니는 민호오빠와 튀격태격하면서 싸우고 화해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그들에게는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그 점이 두 커플의 단점이었다. 일상이니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토닥거리는 커플의 소음을 못 들은 척하면 그 순간도 지나가는 법이니까.
아직도 그 탬버린 여인이 기억나는 이유는 연민 때문이리라.
지금도 나는 망설인다. 어릴 적 그 소녀가 망설였듯이. 글이 될만한 이야기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엄마의 허물이 내 허물이고 나의 허물은 그냥 내 허물로 여겨질 만큼 나는 나이를 먹었다.
허물 같은 당혹스러운 바위를 꺼내와서 다비스상처럼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고 싶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위대한 미켈란젤로였으면 좋겠다. 미켈란젤로는 아니니까. 큼지막한 그 바위는 그냥 두는 게 옳을까? 이 작업이 나와 애정을 보여주는 독자들에게 좋을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무덤까지 덮어두는 게 좋을까? 갈등한다. 미켈란젤로도 수많은 작업을 통해 위대해졌다. 그래 꺼내 보자. 아름다운 다비드상이 이번에 만들어진다면 감사한 일이고 아니면 과정으로 인정하면 된다.
그날 밤 나는 굳은 채로 잠시 서 있었다. 얼음 땡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스스로 '얼음'이 되었다. 얼음의 규칙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술래가 아닌 나와 같은 팀을 먹은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야 한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팀 친구가 술래 몰래 몸 어딘가를 터치해줘야 한다. 동시에 "땡"이라고 외쳐야 한다.
하지만 그날 밤 주변에 나랑 팀먹은 사람은 없었다. '땡'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다가와 줄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만져 주면서, 같이 웃어줄 나의 팀 말이다.
내가 거기 서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 채 움직이는 사람들만 눈앞에 있었다. 그들은 술래 팀이었다. 함께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미래씨 그리고 같이 편먹은 시골 동창, 남사친이 같은 팀이었다.
나이는 분명하지 않다. 8살이나 9살 정도였다. 나는 지금 당시의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더 먹은 상태다. 자, 장미래씨와 첫 딸 사이의 '관계의 성장'을 숫자로 가늠해 보자. 엄마와 딸이었지만 시작은 어땠을까? 24살과 1살의 관계로 시작했다. '소녀와 아기'수준의 관계이지 않았을까? 그들은 7년을 보냈다. 31살과 8살이 되었을 테고, 그다음은 43살과 20살의 관계로 성장했을 테다. 20살 아가씨와 42살의 중년 여성사이에 오고 가지 못할 대화라면 무엇이 있을까?
그날 밤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날이었다. 어쩌다 잠이 깨버렸는지 모르겠다. 내 남동생은 나보다 2살이 어린데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엄마배를 만져야 잠이 들었다. 이유가 있겠지만 엄마 배를 그렇게 다 큰 나이까지 그리워하는 게 '참 안 됐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동생이 큰 방 엄마 옆이 아니라 방 밖에 눕혀져 있었다.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렸다. 기분은 안 좋아졌다. 심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큰 소리가 난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아니라 가게 점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느낌을 눈치챈 나 또한 방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궁금해서 멈출 수 없었다. 다시 나갔다.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걸음걸이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부엌 싱크대 옆에는 인테리어 공사를 통해 만들어 둔 다용도실 같은 게 있었다. 그곳에는 안 쓰는 식기류나 전자제품 혹은 풍부하게 사놓은 라면박스 같은 물품을 보관했다. 싱크대 쪽에는 미닫이로 열리는 문이 있고 다용도실의 다른 한 벽은 화장실의 쪽 유리창과 연결되었다. 그 다용도실 특징은 2단 구성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쪽에서 다용도실 윗 칸으로 한 남자가 자신의 몸을 구겨서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옆에서 그 과정을 도왔다.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길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장면_베드신, 액션물인데 잔혹한 장면 혹은 무서운 장면_을 봐도, 부모님이 자신의 성대에 핏줄을 높여 가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우는 장면을 봐도,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과 다른 반 유부남 선생님 사이의 불륜 관계의 쪽지 전달에도 나는 거의 비슷하게 반응했다.
나의 반응은 외부, 저기 멀고 먼 은하계에서 날아온 외계인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외계인은 지구의 언어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다. 오래전 영화 주인공 E.T.처럼 자신의 표정에 감정을 담을 필요가 없는 존재.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 곁에서 단순히 마네킹처럼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분석할 이유도 없었다. 어떤 움직임이었는지 다만 그들의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들도 '나의 존재 안에서 흐르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모를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또한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떠한 순간에는, 나조차도 나의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존재자체가 블랙홀에 빠지고 있다 생각하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여느 커플처럼 민호오빠와 진아언니는 결혼을 이미 약속했다. 그들의 스토리가 쌓인 시간이 7년 정도 지났을 시기였다. 그 쯤되면 결혼을 하던지 헤어지는 시기다. 사귀는 동안 둘은 싸우고 만나기를 질리도록 반복했다. 우리와 함께 만날 때도 변함은 없었다.
부산 휴가 기간에도 틈만 나면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들이 "왜"싸워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민호오빠와 내 친구 민정이의 반응이었다.
나는 진아언니의 존재를 알기에 개입을 시도했다. 개입하고 새로운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이 스토리의 등장인물들이 미워졌다.
"민정아 너 민호오빠 여자 친구 있는 거 몰라?"
"아니 알아."
"근데 왜 그래? 언니 정말 예뻐. 그리고 너 얼마 전까지 성진이 때문에 힘들어했잖아. 성진이를 희진이에게 뺏기더니 너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왜 희진이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나도 이제 뺏을 수 있으면 뺏을 거야. 나는 내 감정이 중요해. 나도 할 수 있어."
민정이 희진이 성진이 그리고 호재 이들은 영문과 동기들이었다. 그들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다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희진이랑 먼저 친해졌다. 희진이의 외모는 과에서 뿐 아니라 공대까지 알려진 친구였다. 게다가 희진이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거절을 잘 모르는 아이였다. 단순하고 웃기 잘하는 희진이랑 놀다 보면 사춘기 시절 '놀던 시절'의 친구를 만난 기분이어서 유쾌함도 느꼈다. 민정이는 아주 다른 성격이었다. 그래서 민정이의 이런 반응은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민정이가 더 난처한 상황으로 빠지는 게 싫었다. 민호오빠가 나의 마음과 같은 반응을 보여줄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빠에게 상황을 얘기했다.
'이 쉐리~'
민호오빠는 한 술 더 떴다. 민정이가 만나자는 대로 만났고 민정이의 애교에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오빠 지금 왜 그래요? 진아 언니는 뭐예요?"
대답은 민호오빠가 아니라 옆에 있던 서진오빠가 대신해 주었다.
"허니야, 네가 애기라서 아직 남자를 잘 모른대이. 남자들은 원래 그래. 너무 심각해하지 마라."
그제야 엄마에게 혼나다 변명을 하는 아들처럼 소심하게 얘기했다.
"알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그래. 맞아. 결혼은 진아랑 할 거야. 부모님들끼리도 알고 있어. 그런데 나도 내 마음을 어떻게 잘 못하겠어."
이런 때 나의 또 다른 선택은 나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영화를 봐도 등장인물 모두가 미워지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에는 팝콘을 입에 넣고 우걱우걱 대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면 된다. 내가 선택하는 영화는 대부분 해피엔딩이니까. 엔딩을 알고 보는 영화에서 초조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길게 가져갈 이유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