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니 Aug 08. 2024

내 아들을 딸로 바꿨다

오해



디데이 (D-day)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다.

서로의 마음이 잘 통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한 두 가지 있게 마련이다. 군대 다녀온 남자들에게 '군대 이야기'가 그렇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현역으로 제대한 남자들에게만 찐으로 통하는 이야기다. 여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지루하다.  


'출산이야기'는 엄마들 모임에서 술술 통한다.

출산의 고통과 아픔은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다. 서로 공감하기가 쉬운 주제다.

간혹 본인은 순산으로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함께 위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장단을 맞출 수 있다.


힘들었던 이야기가 서로 통하다 보면 웃음도 따라온다.

함께 울고 웃다 보면 아픔은 잊히고 좋은 기억만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장미래씨(어머니)의 출산 이야기는 부녀자들 모임에서 인기가 좋은 편이다.


일단 내 생일을 의미 있는 날로 가정해 보겠다.

다름 아닌 8월 15일 광복절로. 엄마 입장에서는 출산일이겠지만, 태아였던 나에게는 '독립'의 날이었다. 그날 나는 엄마와 분리되었고 '첫 해방'을 체험했다. 나의 진짜 생일은 가을의 정중앙에 있지만 8월 15일도 입추 근처니까. 잠시만 이 날로 생각해 보자.


장미래씨는 8월 14일 새벽 2시부터 느낌이 왔다.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닮은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성격이 급했던 모양이다. 엄마뱃속에서 나가고 싶다고 조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최미래씨의 시어머님도 시골에서 연락을 받았다. 시어머님은 광주로 향하는 차를 탔다.



이해


나는 대학 동창 연아를 하숙집에서 만났다.

연아는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다. 연아의 취미는 사진이었고 사진동아리에도 참여했다. 연아는 가끔 나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일이 매우 좋았다. 필름 사진의 인화가 마쳐지면 '화보'처럼 찍힌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 사진을 자주 찍어 주셨다. 덕분에 사진 찍히는 것은 사랑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와 달리, 연아는 학비 외에 모든 재정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했다. 다부지고 자신감 넘치는 연아는 뭐든 적극적이었다. 연아랑 대화할 때마다 나는 연신 연아의 생각에 감탄했다. 그녀의 통찰력은 동년배 수준이 아니라 인생선배 수준이었다. 때문에 평소 이해가 잘 안 되던 문제가 생기면 나는 연아와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연아야 내가 접때 말한 우리 과, 그 오빠... 있잖아. 진짜 귀찮게 해."

"아 지난번에 얘기했던 너네 과 선배? 복학생이라고 했지. 아마. 이름이..."

"이! 서! 진!"

"맞다 서진선배. 그 선배 고향이 부산이라고 했지? 나랑 같은 곳...ㅎㅎ 아니 근데... 또 그랬어? 이번엔 뭘로 트집을 잡던... 혹시 마스카라? 으이그... 그 선배는 여자 화장법 가지고 사사건건... 왜 그러신다니. 진짜... 나도 짜증 난다."

"그치? 연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번엔 화장법은 아니었고, 내가 너무 애기 같다면서 언제 커서 시집은 어떻게 갈 거냐고... 참 네, 자기 보고 나를 키워달랬어? 그 잔소리를 얼마나 하는지... 정말 귀찮고. 짜증 나고. 아니 그래서 생각난다니까. 계속 생각나."

"생각나? 그건 문제인데... 근데 허니야 그 선배 부산 사람이라고? 허... 부산 남자들 원래 좀 투박하거든. 그렇게 세심하지 않은데... 물론 사람 성향이 각자 다른 긴 한데... 내 보기에는 아무래도 그 오빠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내 직감 틀린 적 별로 없거든. 안 그래? ㅎㅎㅎ"

"뭐? 좋아한다고...? 예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좋아하면 그렇게 하니? 좋아하면 잘해 줘야지. 초딩이냐? 매일 놀리고! 트집 잡고! 그러냐고? 절대 아냐. 정말 괴로워. 으아악~"

"ㅎㅎㅎ 그래서 그 오빠가 너보고 아기 같다고 하나 본데. 애기처럼 남자 마음을 몰라줘서... 그러니 초딩수준으로 알려주는 걸 테고...ㅎㅎㅎ 어이구~ 우리 허니 내가 봐도 어리네. 언제 크시려나.. 우쭈쭈.."

"연아 너 ~"

"ㅎㅎㅎ"


호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신선한 이유였다. 서진오빠의 귀찮은 간섭이 좋아해서라고? 연아의 의견이 이상하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막힌 곳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시원해졌다. 하지만 여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확인할 때까지는 확신하지 않는다. 특히 애기 같은 여자들은.


분명한 건 그 이후로 내 마음에서 변이가 시작됐다. 샛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두꺼운 껍질을 조금씩 깨트리는 느낌이었다. 연아의 짐작에 내 마음이 가벼워진 걸 보면 호감이라는 설정이 싫지 않았다. 마음의 벽 틈새 사이로 호기심의 새싹이 봉곳이 솟아났다.






명분


"어머니 오셨어요?"

시어머님의 도착은 14일 오후 2시경이었다. 장미래씨의 큰 형님이 시어머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광주로 출발할 당시에는 시어머니의 명분은 분명했다. 출산을 앞둔 며느리와 태어날 아이를 돌봐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장미래씨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 시어머님은 신경질이 났다. 시어머니는 합당했던 그 명분을 내팽겨 쳐 버렸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시어머니'로서의 명분만 들이밀었다.


"아니 니가 뭐시여. 뭐 하고 있어부냐. 시애미가 온다는 말 귀꾸녕으로 쳐 넣고 먹어부렸냐?

밥상도 안 챙기고 뭐다냐. 퍼 누워 자빠졌어. 오따메 ~ 세상이 뭐다냐. 뭐 애기는 너만 낳냐?

아 얼른 안 일어나. 밥상 챙겨 오라는 말 안 들려? 귀꾸녕이 뚫려 부렸냐. 막혀 부렸냐? 어?"


곁에 서있던 큰 형님은 두 눈을 찔끔 감았다가 떴다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장미래씨는 아픈 걸 잊은 사람처럼 일어났다. 재빨리 일어날래도 일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같이 온 큰 형님도 무서워서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앞에 선 먹잇감처럼 이러지도 저러리도 못했다. 두 며느리는 함께 시어머니 밥상을 차렸다. 쌀을 씻으려고 마당에 가서 물을 기르고 부엌과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시어머님 진지도 차리고 가게에서 일하는 신랑 반도씨와 점원들 식사까지 준비했다.


'아가야 좀만 참아 ~ 조금 있으면 병원에 갈 거야.'




해석


연아의 설명은 확실히 내게 효과가 있었다. 그 뒤로 서진오빠가 트집을 잡고 귀찮게 해도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래서 모든 상황은 해석이 정말 중요하다. 해석만 잘해도 마음이 바뀌고 나아가서 믿음까지 생긴다.


관계에 가장 좋은 소통의 도구는 '언어'겠지만 표정과 마음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다. 서진 오빠와 관계에서도 내 마음이 바뀌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점점 새로워졌다. 오빠의 간섭에 대한 내 반응이 부드럽게 유연해지자 오빠의 태도 또한 변했다. 이건 뭐람? 완전 친절해졌다.


오빠와 나는 자주 어울리는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룹 멤버가 8명인데, 7명은 복학생 오빠들이었고 다음은 나였다. 여기서도 홍일점. 오빠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인지, 함께 몰려다니면서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취업을 위해서 모두 최선을 다했다. 그중에서 나만 예외였다.


나는 전공과목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미래에 대한 집요한 목표의식이 없었다. 도서관에 자주 가긴 했다.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대입'이 마지막이라고 항상 다짐해 왔던 나였다. 내가 원하는 꿈마다 부모님은 매 번 철벽을 쳤다. 그때까지 꿈을 향한 나의 모든 시도는 아버지의 고함 소리와 금지 명령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재정적인 후원자로서 최선을 다한 부모님이라는 사실은 나도 충분히 인정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후원의 이유가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한을 풀고, 아버지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내가 필요하셨다. 그건 내 인생은 아니다. 물론 부모님은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으셨다. 이런 부모님의 후원을 용기 있게 거절하고 독립할 자신도 없었다. 공부조차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왔던 내가 재정적인 자립을 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야망을 위해 밤잠을 설치고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학 전공 선택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고3 담임선생님 의견이 절대적으로 반영되었다.


입학 이후 나의 꿈은 여유로운 '한량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도서관에 자주 다닌 이유가 오빠들과는 달랐다. 인생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철학책'과 다른 다양한 책을 읽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보는 것은 어떨까? 궁금해서 '패러글라이딩'을 혼자 시도해 보기도 했다.


반면, 어떤 전공과목 시험에는 아예 결석을 해서 오빠들과 교수님의 걱정을 샀다. 오빠들과 어울릴 때 나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잘 웃는 정도였다. 묻지도 않은 내 이야기나 나의 고민을 먼저 말하지는 않았다. 듣기는 잘하는 사람이어서 오빠들마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지면 내 옆에 앉았다. 이 시기에 나의 우울증은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들도 나도 우울한 나의 감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각 자의 상황이나 입장이 조금씩 달라도 함께 있다 보면 덜 외로웠다. 내가 그룹에 속한 이유였다. 한 번은 우리 그룹 모두가 서진 오빠의 고향 부산에서 휴가를 보냈다. 서진 오빠는 모두에게 친절한 호스트였다. 특히 나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주려 노력했다. 거의 '국빈'대우를 해줬다. 오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의구심이 완전히 녹아버렸다. 그 정도에서 머물렀으면 다음 사건은 시작되지 않았을 텐데, 녹아내린 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오빠에 대한 나의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천장


차려진 밥맛을 보더니 시어머니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어머니 배가 살살 아파부러요. 이제 병원에 가나요?"

"당 멀었어. 니 그러고 가봐야 애 못 놔. 살살은 무신 놈의 살살. 그러고 있다가 아파서 꼬꾸라져 부렀는디, 천장이고 뭐시고 암껏도 안 보여야 돼. 눈이 뒤집힐 정도로 아프면, 잉, 그 때 가면 쓰것따."

"네? 지금도 너무 아파 뒤져불겄는디라."

"암 소리 말고 지금은 안됭께 그런 줄 알아부러. 니가 애기를 놔 봤냐? 시애미가 말하는디 뭐시 그렇게 말이 많아? 밥상이나 얼른 내 가!"


15일 자정을 지나자 미래씨의 진통은 더 심해졌다.

그때는 아예 꼼짝할 수 없었다. 통금시간이 풀리려면 새벽 4시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결국 병원에 도착해 보니 새벽 5시 즈음이었다. 산모들이 누워있는 병실에 장미래씨도 함께 누웠다. 그 방은 마치 전쟁터 병사들이 누워 있는 의무실처럼 느껴졌다. 산모들 마다 비명을 지르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몇 안 되는 서너 명의 간호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침대마다 가벼운 커튼이 쳐져 있을 뿐이었다.    


한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온 미래씨를 발견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예언을 했다.


"지금 상태를 보니까요. 오전 10시나 되어야 아이가 나올 거 같아요."




화자와 청자


서진 오빠를 향해 싹튼 마음을 인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런 감정을 진공청소기로 확 밀어버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쓰잘데 없는 노력을 시도했다. 나는 과거의 모습이나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점만큼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데, 이런 기질의 '과거의 나'만큼은 고쳐 쓰고 싶다.


'진심 그러지 말자. 단순해져. 제발. Simple is best!'  


스프링을 누르면 어떻게 되는가?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는 힘만 커질 뿐이다. 오빠에 대한 감정도 솔직하게 인정하면 훨씬 편했을 텐데 자꾸 누르고 어떻게 해서든 부인하려 했다. 그럴수록 더 강력하게 힘들어졌다. 결국 말을 했다.


이게 또 문제의 시작이었다. 내가 털어놓기 시작한 대상이 서진 오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그룹원 오빠들 중 착하고 순박하기 짝이 없는 수근오빠를 선택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수근오빠에게 가서 수다를 떨었다. 내 감정에 대해 부자연스럽다 보니, 수근오빠에게 말하는 나의 말과 뉘앙스도 모호했다.


수근 오빠 입장에서는 이런 내 표현을 '알 듯 말 듯'했을 것이다. 내가 항상 빙빙 내둘러서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화자였던 나는 내 마음을 알려주기는 싫고, 속이 답답하니 말은 해야겠고. 청자였던 수근오빠 또한 '화자가 뭔 말을 하나?'싶고. 우리는 계속 헤맸다. 수근 오빠는 나름의 추측과 가설을 세웠다 지웠다 했을 것이다.

결국, 말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말을 한 것이고, 든는 사람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자유로운 해석을 해야 했다. 각자 취할 것만 취하는 대화였다. 우리는 서로의 '이해의 깊이'나 '소통의 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예언


'뭐라고? 이제 통금이 풀렸는데, 10시? 안되재. 안된당께. 아퍼 뒤지겄는디라.'라고

생각한 미래씨는 갑자기 병원 도착하기 전의 고통에 비해 4배는 더 심하게 아프다고 느껴졌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면 뭔가 해결될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네다섯 시간이나 더? 아고 나는 죽재. 그라믄. 저 호랭이 시어머니 말씀이 맞는 것이여?

눈이 뒤집혀서 천장이 안 보일 때까정 요로고 아퍼부러야 쓴다고?' 갑자기 눈이 팽그르 도는 느낌이었다.


"아~ 아~ 악! 아~ 아~ 아~ 악!"

그동안 수줍음 때문에 한 번도 따라 하지 못했던 시어머니 흉내를 냈다.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높여 악을 쓰고 최선을 다해 소리 질렀다.

"아~ 악! 오메 나 죽겄네. 나 주꺼써 어 허엉 엉... 아~ 나 좀 살려주쇼 아~."


간호사의 예언은 틀렸다.

오전 10시가 아니고 5시간이 더 보태진 15시경이었다.

그제야 나는 엄마로부터 독립했다. 감격 넘치는 해방을 표현하기 위해 우렁차게 울었다.


"응애.. 응애.. 응애..."

엄마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간호사는 핏덩이 아기였던 나를 안고 태아 보관실로 이동했다. 당시 병원시스템은 아이를 낳자마자 산모로부터 아이를 분리시켰다. 의료진의 간단한 설명으로 산모는 아이의 탄생을 확인했다.





뭐라고?


서진오빠를 향한 내 마음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나는 서진 오빠를 너무 좋아한다.'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거부터 쩔쩔매고 있으니 진전이 없었다.


아니 한 창 예쁠 20대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얼마나 예쁜 마음인데, 그거 좀 먼저 좋아하면 어떻고, 혹여 좋아했다가 까이면 좀 어때? 바로 딴 사람 좋아하거나 비슷한 시기에 자기에게 잘해주면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람 알아보던가 아니면 소개팅 성공할 때까지 하던가. 정말 너무 답답하고 지혜롭지 못한 나였다. 연아와 서진오빠 말처럼 어렸다. '어렸어.'


괜스레 수근오빠를 붙잡고 주저리주저리 주책이나 떨고 말이다.

그러다 하루는 그룹원끼리 술을 마셨다. 술을 끊었던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수근오빠랑 나는 또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술집이 아니라 길가에 있는 계단에 앉았다. 취기 때문에 용기가 생긴 건지, 용기를 내려고 술을 마신 건지, 수근 오빠는 안 하던 짓을 했다. 자꾸 내 어깨에 손을 얹거나 손을 잡으려 했다. '감히. 이 오빠 왜 이래?' 나는 그 손을 계속 떼어 냈다. 떨쳐내는 데도 그는 시도를 계속했다. 나는 짜증이 났는데도 오빠는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의 의사가 없는 순간에 스킨십을 하려는 시도는 싫어하는 행동이다. 어렸을 때 겪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결벽증이 심했다. 나의 결벽증을 알 리가 없는 수근오빠였지만 내가 분명히 싫어하는데도 오빠는 포기를 몰랐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진심으로 모르는 건지 수근 오빠는 계속 웃기만 했다. 내 얼굴에 짜증스러운 감정이 번지기 시작했다.


수근 오빠가 이 분위기를 급격하게 전환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

"허니야 ~ 이제 알겠는데, 그런데 너 괜찮겠나?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 형편이 뭐 대단한 게 없어. 그래도 나는 나름 기술사 준비를 하고 있어. 합격하면 걱정될 일은 아니고. 네가 좋다고 그러면야 나는 뭐 괘안타. 나도 너 좋다."

"뭐라고? 오빠?"


이 오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말 참담했다. 이를 어떻게 하나 싶었다.

'으아악~ 서진오빠 나 어떡해? 엉엉엉~'




자초지종


38시간의 진통을 미래씨는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첫아기였던 지라 가장 힘들었던 출산이었다. 그 뒤에 이루어진 한반도씨(아버지)와 의료진의 당황스러운 대화 또한 잊을 수 없다. 그건 하나의 전설이나 다름없다.


한반도씨가 아이를 확인했다. 보통의 아버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반도씨는 갑자기 의료진에게 사건의 전말을 말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자신이 확신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성취하고야 마는 한반도씨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는 의료진의 감정이나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증명해 온 사업가 한반도씨가 그런 것에 신경 쓸 사람도 아니었다.


"여보쇼. 다시 한번 잘 찾아보쇼. 내가 자초지종은 안 물어 볼땡께.

내 아들이 딸로 바뀌어부렀어. 분명히 아들이었다니께. 내 아들 숨기지 말고 찾아오쇼."

"네? 뭐라고요?"


한반도씨는 장미래씨가 분만실로 이동한 뒤로는 병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자신의 자녀가 아들이었다고 확신하는 한반도씨의 질문에 의료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가' 생각했다. 자초지종은 오히려 한반도씨에게 물어봐야 했다.

이유는 반도씨의 꿈 때문이었다.


며칠 전 반도씨는 가게에서 한 참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어 버렸다. 그 와중에 꿈을 꿨는데 너무 선명해서 '태몽'임을 확신했다. 반도씨의 설명은 이렇다.


꿈에서 8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이 반도씨 가게 안으로 들어왔단다. 사내아이가 본인은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고 한반도씨를 '아빠'라고 불렀단다. 둘은 한 참 대화를 나눴고 그러다 꿈에서 깨어났다며 설명을 했다. 반도씨의 생각이 굳어진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너무 희한한 꿈이어서 신통하다고 소문난 점쟁이에게 바로 찾아갔다. 들뜬 표정의 반도씨에게 점쟁이는 맞장구를 쳤다.


"아들이네! 이 사람아~ 딱 아들 꿈이여."

"그치라~ 오메 하하하."


한반도씨 얼굴에는 술기운이 도는 것처럼 홍조가 번지고 웃음이 흘렀다. 점쟁이에게 복채까지 두둑하게 챙겨주고 가게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장미래씨를 볼 때마다 혼자만의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아버지의 꿈에 나타난 8살 남자아이가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통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그날만큼은 '헛 점'을 쳤을지도 모른다.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진다는 데, 점쟁이도 사람이니까. 별수 없이, 아버지는 딸이었던 나를 호적에 올렸다. 주민등록 두 번째 마디가 숫자 '2'로 시작하는 여자 아이였지만 어디 가서 아들로 바꾸겠는가.


이건 아버지와 나의 불편한 관계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아버지는 나를 '첫 째 아들'로 키우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UDT출신 어머님께(연재 2화 '미인이 마시는 술'참고) 죽도록 두들겨 맞고 자란 만큼, 자녀도 강하게 길러야 한다 생각하신 분 같았다.


'나의 딸(아들이겠지만) 또한 강하고 야무지게 군사적으로 키울 것이다.'

아버지의 교육 방식을 되돌아보면 이런 의지가 있으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아버지 우리의 사연이 어떻든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다음 연재에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쓸 분량이 있습니다.

그 때 더 길게 편지 쓰고 싶습니다.

우리 부자 아버지

아버지는 웃는 모습이 멋있는데 앞으로 많이 웃으시면서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호랑이같은 아버지 모습이 요즘에는 너무 연약해 보이셔서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랑 곧 훈훈하고 단촐하게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 저를 가장 많이 사랑하셨다는 말 그동안 믿지 않았지만, 글을 쓰다가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믿어 보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제가 기도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또 뵈요. :)


험께 걸어요. :)






이전 04화 외할머니집은 산당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