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전사와 성도착증환자 1
여행 중이었다. 무게 12kg의 배낭 하나 들고 움직인 지 4개월 차였다.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마음이 닿는 곳에 짐을 풀었다.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다시 배낭을 꾸려서 길을 나섰다. 혼자 '배낭여행'할 때 중요한 질문은 한 가지로 충분했다. 매 순간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뭐지?"라는 질문이었다.
집안 부도 이후 15년 정도 시간이 흘렀고 엄마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내용은 무거웠던 '집안의 빚'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이었다. 관계적인 면에서는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각 자의 가정을 이루었고 부부끼리 행복한 관계였다. 감사한 점이다. 부모님은 예외의 경우 수다. 두 분 나름의 전우애를 지키며 끈끈하게 살아가시는 커플이었다. 내 시대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도, 닮아갈 수도 없는 커플 모델로 인정한다. 서로 너무 다른 시대를 살아온 '이전 세대의 그림'으로서 존중하는 마음만 유지하련다.
결론적으로 가족 중 나만 싱글이었다. 불혹이 가까이 오는데 책임질 가족이 없는 조건은 무한한 자유를 보장한다. 생각하기 나름이라 어떻게 보면 애잔하고 서글프다. 29살부터 35살까지 나는 딸 혹은 아들 하나를 무척 원했다. 그런데 동거할 성인 남성은 원하지 않았다. 싱글맘이라도 되고 싶을 정도였다.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애사가 내게는 매 번 아프고 힘들었다. 연애로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의 문제로 혼자 힘들었다. 나는 점점 나 같은 성향은 결혼이나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애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가졌다. 나조차도 자신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모르는 나는 여자 *바울?
바울 사도: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바울로 서신을 저술한 인물이다. 27개 문서 중 13편을 완성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고초와 고문을 이기면서 자신의 미션을 수행했다.
유교문화에서 '관혼상제'를 인간의 삶의 중요한 4가지 절차로 보고 예를 다한다. 개인 역사의 기념비로 여기면서 말이다. 나를 해석할 교리로 유교는 역시 적합하지 않은 해석집이었다. '혼'이 열리지 않는 나였다. 신앙적인 문제로 '제'의 예법도 생략할 작정이다.
다들 뭐에 씌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하던데. 나에게 '다들 하고야 하는 그 결혼'이 세상 어떤 일보다 힘들었다. 31살 즈음 지우와의 이별은 3년에 걸쳐 이뤄졌다. 주범은 당시 서로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해석했던 나였다. 지우가 납득하지 못하는 나쁜 행동을 지속했던 내가 지우를 지독하게 아프게 했다. 지우가 아마 많이 울었을 것 같다.
지우는 나를 아직도 '미친 X'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지우가 '미친 X'이라는 표현을 나에게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시간 지나도 상처로 남을 법한 말은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를 '미쳤다'라고 생각하는 표정조차 보인 적 없었다. 지우가 나에게 화를 낸 적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사법고시 합격하고, 멀리 가난한 나라로 떠나기 전이었다. 사법연수원 들어가는 일정을 미룬 뒤, 1년간의 봉사 활동을 위해 그 먼 타향으로 떠나려 했다. 그날 밤에 내가 만났던 지우는 내내 딴 사람 같았다. 지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나는 나대로 오해했다. ‘고시 합격하더니 애가 변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는 지우대로 나에게 쌓인 감정의 응어리가 자기 멋대로 삐죽거리는 밤이었다. 항상 집에까지 바래다주던 지우가 그날따라 버스만 기다려 준다더니, 상한 마음으로 트집을 잡았다.
"사랑은 해 봤어요?"
그날도 지우가 왜 그 말을 하는지 감이 전혀 안 왔다. 화는 내가 더 낼 기세였다.
“사람마다 사랑의 정의가 달라.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뭔데?”
한 참 망설이던 지우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요. 그 사람 보면 아파요.”
이렇게 7년 정도의 우정과 사랑 사이를 오고 간 지우의 감정에 탈이 생긴 채, 지우는 가난한 나라로 떠났다. 서먹한 시간, 몇 개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이제 4~5개월 지나면 예정대로 1년은 마쳐질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우 목소리가 들렸고 그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우가 나에게 원한 건 하나였다.
"다 필요 없어요.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어요. 편지면 돼요. 편지 써서 보내요."
나의 편지였다.
고독했던 지우의 1년이 끝나면, 서울로 돌아올테고, 정해진 코스대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도 그 시기에 조용히 마무리하면 되겠다고 작정했다. 유정의 미를 거두려던 내 계획이었다. 지우라면 편지는 백 통도 써줄 수 있었다. 1달만 더 있으면 지우가 서울에 돌아오고, 나의 편지도 멈추면 계획대로 잘 이뤄질 일이었다. 딱 1달 남았는데 뜻하지 않게 모든 게 꼬여 버렸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다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하는 장면이 있다. 생사를 오고 가면서, 참다 참다 결국, 터져 버린 파이는 자신이 믿던 신에게 고함을 치고 발악에 가까운 절규를 쏟아낸다. 그 뒤 뗏목 위에서 파이가 이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갑자기 강하게 일어선다. 내게는 다음 장면이 장관이었다. 수 백 마리의 날치 떼가 날아올라 파이를 때리고 강타해도 꿈쩍 않고 버티고 서있었다.
내가 영화 속 파이는 아니었지만 나의 신에게 비슷한 절규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우한테 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배후에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의 신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섞인 절규였다. 지우한테 했던 행동을 혼자 정의할수록, 그렇게 하는 건 ‘미친 행동’이었다.
서로 마음을 주고 정을 쌓은 게 7년, 헤어지는 데 3년 걸렸다. 지우와의 관계는 지우가 결혼을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나 또한 안량한 자존심을 지켜냈다. 아버지의 사업 부도와 그 이후 아버지의 고쳐지지 않는 병적 행태들에 대해 털끝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지키려는 자존심이자 두려움이었다. 이런 부분을 지우에게 솔직히 터놨을 때 최악의 경우는 지우의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미친 X'이 되는 게 나았다. 3년이 걸리다니. 역시 지우는 어머님들의 사랑의 인내를 닮았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 뒤로 체중이 7kg이상 쭉쭉 빠졌다. 내 머리의 양 쪽 편두 부근이 확 늘어버린 새치로 채워졌다. 염색을 시작했다.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희망도 비슷하게 퇴색해 버렸다. 싱글맘을 하자니 비용 문제도 그렇고 후에 자녀가 한국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 일에 대해 생각해 보니 '내 욕심'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돈만 잘 버는 대전제라면 인생사 오히려 심플했다.
돈을 크게 잘 벌지 못해서 문제였지만 인내도 경력이다. 15년 정도 버티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하나는 스스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재정적으로 가족의 빚이 해결되었다. 숨 통은 트였는데, 가족과 한국에 대한 미련도 함께 없어져 버렸다.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한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고 싶었다. 이 소원을 위해 습관처럼 기도했다.
기도만 하면 여행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무시했다. 가끔 어이없는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기도는 나의 신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내가 소통하는 신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차원이 다르실 때가 많다. 내가 사랑하며 신뢰하는 신께서 주신 음성일 가능성이 있었다. 따르기 싫은 의견일수록 가능성은 커진다. 처음에는 내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뭐라고? 세계 여행을 어떻게 가? 지금 시급한 건 연봉 높여 받고, 남들 사는 만큼 비슷하게 사는 거야. 나한테는 그게 안 좋냐고? 시집은 언제가? 지금 결혼한다 해도, 어~ 내 나이가 늦었지? 빨라? 아니, 다시 유목민처럼 살라고? 이 나이에?'
당시의 나는 Mega Study 회사나 EBS에 원서를 여러 차례 넣었다. 3~4차 진행 과정이 있는데 꼭 마지막에서 떨어졌다. 여행은 안중에도 없었다. 연봉 수십억 대 강사가 되고 나면 돈 열심히 벌면 될 일이었다. 끄나풀이라도 잡아서 입사할 기회를 만들었다. 기도는 영적인 삶의 호흡이어서 멈출 수는 없었다. 기도해서 같은 마음, 여행이 떠오르면 일관되게 무시했다.
그러다 여행 에세이로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두 권의 책을 만났고 읽었다. 두 권 모두 나를 위한 책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동했다. 여행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긴 여행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차마 버리기 어려운 책과 옷을 남겨 보관한 박스 10개는 부모님 집으로 보냈다. 다른 모든 짐은 팔던지, 버리던지, 누굴 줘버렸다. 내 짐은 결국, 책 두 권을 포함한 12kg의 배낭이었다. 동시에 그것만 나의 재산이었다.
안중에도 없던 시드니는 아는 동생 미희가 안내해 줬다. 미희는 신랑님 그리고 4 자녀와 함께 치앙마이에서 선교 훈련차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 미희 가족과 시간을 1-2주 보낸 뒤였다. 4개월 정도 여기저기 다양한 곳을 여행해 왔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만 수두룩했다.
숙소가 새로우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나였다. 그간 숙면을 취하는 밤은 며칠 없었다. 여행에 조금 지쳐 있는 나의 상태에 대해 미희도 느꼈다. 미희가 생각지도 않은 지역 '시드니'로 가보라고 권했다. 거기서 힐링 시간을 갖으라는 의도였다. 그녀의 의도는 적중했다.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느꼈다.
"여기다."
킹스포드 스미스(Kingsford Smith) 공항의 공기를 마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공항 커피숍의 커피는 항상 '맛이 없다'느꼈는데 시드니 국제공항 커피숍은 달랐다. 성북동 핫플 맛집의 커피 맛과 유사했다.
지금도 나는 시드니가 그립다. 시드니의 모든 풍경, 문화, 다양하고 맛있는 커피, 수많은 공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박물관과 도서관, 아침 풍경, 파도가 드나드는 야외 수영장,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쉽게 접근 가능한 세련된 해변들, 쇼핑 거리에 나가면 원하는 대로 각 국 나라 음식을 아주 맛있게 맛볼 수 있었다. 하나 더, 힐송처치도 있었다. 도시인으로 살기에 시드니는 정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취향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는 수많은 조깅 코스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여행 중에도 빼놓을 수 없는 루틴 하나가 있다. 달리기였다.
배낭 내려놓자마자 트레이닝복 입고 나가거나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난 다음 날 아침에 달렸다. 이건 나의 여행 방식의 중요한 루틴이다. 달릴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낯선 지역에서 땀을 흘리다 보면 그 지역과 한층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걷는 것만으로 소유할 수 없는 친밀한 감성이 공감의 고리가 되어, 나와 그 낯선 도시 사이에 축적되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나 운동을 해야 하는 나였다. 여행지에서 가장 쉬운 운동 방식은 달리기였고, 그래서 달렸다. 달리기는 나의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시드니는 '달리면서 여행하는 나'에게 최고의 달리기 코스를 제공했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실컷 달리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시드니의 구석구석을 쓰는 이 순간 내 감정이 다시 요동한다.
'아~ 미칠 것 같다. 너무 좋아서. 와우~'
긴 여행이라 모든 형태의 숙소를 경험 중이었다. 홀로 배낭 여행할 때 강추하는 방식은 게스트하우스다. 정보 구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비슷한 여행자들을 많이 만난다. 만남의 장은 홀로 배낭여행하는 백베커들에게 유익이 많다.
가장 비추하는 방법은 호텔에서 1박 이상 머무는 것이다. 혼자 배낭 여행할 때 휴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호텔 숙박은 오히려 여행을 심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드니에는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는 신설 게스트 하우스가 많았다.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 중 몇몇은 며칠간 여행을 함께 하는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David 와의 만남은 특별한 인연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직업은 미국 서부 지역에서 부동산 중개 회사의 대표였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건강한 체력을 가졌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민족, 유태인이었다. 마초 기질도 있고 성공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온 사람이라 느껴졌다. 한 마디로, 내게는 그야말로 ‘자본주의 총아'의 이미지로 보였다.
데이비드는 나의 관심을 자신에게 모으려는 의도로 '사람 무시하기'권법까지 사용했다. "허니~"라고 부르면서 자기 곁에 와보라는 바디랭귀지를 했다. 해서, 그가 할 말이 있나 싶어 가까이 갔다. 막상 다가갔더니 언제 불렀냐는 태도를 보였다. 그곳 게하 대표도 젊은 사업가였는데 그 대표랑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계속했다.
'아니 이 쉐리~ 뭐야?'
데이비드와 나는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게하에서 남녀 혼성방은 흔하다. 혼성방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막상 경험해 보면, 초등학생들이 걸스카우트와 보이스카우트 활동으로 캠프 가서 방은 같은데, 각 자의 침대를 쓰는 것과 다를 게 전혀 없다.
낯선 여행지에서 편하고 쉽게 친구 되는 성별이 내게는 여자애 보다 남자애들이었다. 게다가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여자 사람 친구'는 흔치 않았다. 여자애들은 연인과 동행하던지, 2-3명이 함께 움직였다. 그 사이에 끼어 서로의 심리를 맞춰 가느니, 혼자 외롭게 여행하는 게 백배 나았다.
가끔 마음 맞는 여자애도 만났다. 외롭지는 않지만 같이 여행을 하다 보면, 그녀의 디테일한 감정까지 신경 써야 했다. 남자애들은 의외로 심플했다. 종종 본인을 게이로 밝히는 남자애와도 시간을 보냈다. 이런 만남도 가벼웠다.
배낭 여행자들끼리는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쉬웠다. 만나기도 잘 만나고 헤어질 때도 기분 좋게 헤어졌다. 만나서 10여 분 대화를 끝으로 각 자의 여행길을 계속 가기도 하고, 뜻이 맞는다 싶으면 며칠이고 여행을 같이 할 수도 있다. 유연하고 융통성도 좋다. 하지만 여행자들끼리 결국은 헤어진다. 아무런 부담 없이 편하게 헤어지기 쉬운 친구들이 대개 여성보다는 남성이었다.
곧 있으면 같이 배정된 혼성방의 리더 역할을 하게 될 데이빗이었다. 그 순간 나를 불러 세웠던 그는 내게는 이상한 애였다. 이상한 애랑은 여행의 수칙처럼 빠르게 각 자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니까. 오라고 해놓고 딴 전 피우는 데이비드를 피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막상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는 내 발길을 어찌 눈치챘을까? 데이비드가 나를 붙잡아 두려는 지 급하게 질문을 했다. '갈수록 이상한 녀석이네.'라고 생각했다.
마초 기질을 짐작한 건 그날 오후였다. 같은 방에 머무는 대부분의 친구들을 모으더니 같이 움직이자고 제안했다. 마치 다국적 여행 그룹의 리더이자 시드니 시장처럼 그룹을 진두지휘했다. 시드니의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녔다. 밤 시간 끝자락에는 그날의 휘날레로 시드니에 있는 '클럽'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젊은 그룹과 중년의 문턱에 서있던 나를 함께 데려갔다.
홀로의 배낭여행은 여행 책과 오프라인강의의 경험담을 수집하며 준비했다. 코로나 전이었다. 세계 여행을 강의하거나 준비하는 청년들이 그 시절 트렌드처럼 떠올랐다. 책도 강의도 널려 있었다. 그룹의 대부분이 20-30대 친구분들이었다. 친구분들께 부담될 새라 철칙 하나를 스스로 만들었다.
'라떼~ 가치관 주의'를 위해 어디서 누굴 만나도 나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려 주지도 않았다. 시드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이 무척 궁금해하면서 안달이 나도, 혼자 추측하게 내버려 뒀다. 상대가 짐작하는 게 바로 그 순간의 내 나이였다. 나의 나이에 관한 여러 가지 데이터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형성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통된 특징을 발견했다.
남성들은 본인 나이 기준으로 나를 어리게 측량했고,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본인 기준으로 나를 한 두 살 많게 봤다. 측량을 듣고 나면, 나는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그게 상대방의 기쁨이 된다면야 내 진짜 나이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었다. 영어로 소통하는데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언어였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습성을 경험하면서 나도 생각했다.
'사람들은 확실히 국적과 나이에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려는 성향이 있구나.'
중년의 문턱에 선 여성에게 클럽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드니 지역에서 나름 핫한 클럽이었던 모양이다. 기다리는 줄이 길었고 내가 속한 그룹은 줄 뒤편이었다. 클럽 기도역할을 하는 덩치 큰 스텝에게 데이비드가 다가갔다. 뭐라고 속닥거렸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클럽 안에서 거닐고 춤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신앙을 가진 이후 절교했던 취미활동이거나 무브먼트였다. 클럽 가는 일, 클럽에서 춤을 추는 일, 술도 끊었다. 성경에 흥미가 생긴 이래로 나는 거의 수녀처럼 살았다.
술도 긴 여행 준비하면서 조금씩 시도해 봤다. 혼자 여행하다 주량도 모른 채, 외국 어디 길바닥에 쓰러져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한두 잔 마셔 봤다. 다시 마시니 주량은 확실히 줄어 있었다. 주종에 상관없이 1잔이 적정량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맛이 좋다 느꼈다.
클럽 가는 연습은 안 했는데 여행 내내 3번의 기회가 생겼다. 친구들과 함께라서 같이 갔다. 시드니의 클럽에서도 나의 주 관심사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런 장소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서 대화는 쉽지 않았다. 그럴 때는 '춤'에만 집중하면 됐다. 10대나 20대로 돌아간 셈 치면 시간은 금방 흘렀다.
춤출 때 나는 집중모드다. 나와 춤사이에 누군가의 눈치가 끼어드는 일은 별로 없다. 전혀 개의치 않고 온전히 마음과 뜻을 다해 춤만 열정적으로 추는 게 나였다. 그 밤에도 비슷했다. 그렇게 한 참 추다가 클럽에서는 먼저 나왔다.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야 했다.
피곤하면 다음 날 조깅 스케줄에 지장이 올 테니까. 조깅은 기필코 해야 했다. 그 정도 어울렸으면 됐고, 누나나 언니가 춤을 어떻게 추는지 보여주는 것도 그쯤이면 됐다 싶어 숙소로 혼자 돌아왔다. 입구까지 따라 나온 여자애들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난리였다. 더 놀자는 그들의 다정함이 나쁘진 않았지만 웃으면서 자러 들어갔다.
평상시처럼 잠들었을 거다. 피곤한 탓에 자면서 코도 곯았을 것 같다. 확률 80% 정도. 다음 날 아침이었다. 계획했던 아침 조깅을 6시부터 시작해 한 시간 정도 달렸다. 숙소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각 자의 여행 계획대로 움직이려고 나간 모양이었다. 나도 준비물 챙겨서 방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데이비드가 들어왔다.
시설 너무 좋고 깔끔한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거기서 자신의 짐 정리하고 다른 숙소로 옮기는 중이라 했다.
"아 그래" 정도의 응답으로 대응했다.
갑자기 뭐에 이끌렸는지 그다음 진행 과정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아주 가볍게 데이비드의 품에 안겨있었다.
데이비드는 아주 유연하게 키스라는 것을 경험시켜 주었다.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생애 처음으로 해보는 경험이었다.
누구도 잘 믿지 않겠지만 이런 부분에서 나는 수녀처럼 살았다.
거룩한 의지와 신앙적 헌신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이유는 '결벽증'때문이었고, 어찌 되었든 키스였다.
예측 불가한 상대인 데다 즉흥적으로 이뤄진 장면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의 이성은 계속 생각을 풀가동 시켰다.
데이비드는 이런 분야의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천 친구들이던지 논크리스천 친구들이던지 중학교 때부터 나의 친구들은 나에게 이런 경험을 잘 얘기해 주었다. 신기했고 이상했고 가끔은 그 느낌이 싫었다. 친구 얘기니까 무심히 들었을 뿐이었다.
신앙적으로 내가 좋아하고 따랐기에 가장 친해진 친구 주빈이는 이 부분만큼은 개방적이었다.
회개도 금방 하고 잘도 만났고 경험이 많았다. 주빈이가 들려준 경험담들이 나름 도움이 되었다.
근육으로 잘 다져진 남성의 가슴에 제대로 안겨본 적도 없었고, 키스는 더 더구나 처음이었다.
데이비드의 리드 능력 때문인지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이로서, 하나는 분명해졌다.
드디어 만성병처럼 나를 옭아매던 '결벽증'은 확실히 사라졌다는 증거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