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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 Aug 29. 2024

고통, 빛이 되다 2

빛의 전사와 성도착증환자 2


1부_ 여행지

비명


"아악! 아아악~"

나와 민서는 서로를 바라봤다.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 악! 아아악~ “


서로의 손을 풀었다 잡았다 하면서, 우리는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로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공포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둘이서 ‘누가 더 크게 소리 지르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시도를 하자고 했을까?'라는 의아한 의문만 계속되었다.


사실, 그건 시시한 수준이었다. 공포영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에게 그 영화는 재미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상영 시간표에 볼만한 영화가 딱히 없었다. 유명한 출연 배우 덕분에 그 영화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결국 합의를 봤는데, 둘이 같이 볼 거니까, '시도나 해 보자'는 의견이었다. 시도의 결과는 비명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20대가 아니라, 롯데월드 "프렌치 레볼루션"을 타고 있는 10대 소녀들 같았다. 계속 소리를 질렀다.


주변으로부터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씬에 따라 화면 전체의 명암이 밝아지곤 했다. 이런 장면 탓에 우리 주변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비명소리에 우리 자신도 놀랠 판이었다.


그때처럼, 비명 소리가 집안 가득 울렸다. 다시 공포영화를 보고 있었을까? 긴 배낭여행에 서스펜스가 급히 필요해져서? 그날 밤 내가 머문 곳은 호주 멜버른에 위치한 깔끔하고 좋은 고층 아파트였다. 민서가 아니라 멜버른에 살고 있는 Dan과 함께였다.


댄은 스리랑카에서 태어났지만 호주로 유학 왔다.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댄의 집 벽에는 코가 여러 개 달린 코끼리 그림 포스터가 두세 군데 붙어 있었다. 내 정서와 맞지 않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내 눈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두렵고 떨리지만 즐겁다


댄은 잘 생기고 친절했지만 내가 그에게 사랑을 느낄만한 점은 없었다. 여행 중에 사랑을 느꼈던 남자가 한 사람 있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선박에 관한 무역업을 하던 사업가 Arvin이었다. 그는 이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내가 생각건대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조건을 여러 가지 소유한 사람이 아르빈이었다.


일단 여행 중에 만난 남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여자를 대하는 모든 면에 경험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에서 여자를 이끄는 목소리, 첫인상을 좌우하는 외모, 눈빛과 매너 모든 게 매우 능숙했다. 굉장히 권위적이었지만 동시에 무척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중년의 지긋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청바지와 흰 티셔츠를 아주 멋지게 소화해 내는 남자였다. 바이올린 연주 솜씨도 좋았는데 내 기분이 울적할 때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깊이 있는 눈매를 가지고 있어서 '조지클루니'가 떠올랐다. 닮지는 않았다. 아르빈이 더 중후하다고 해야 하나? 무겁고 어둡다고 하는 게 좋겠다.


여자를 이끄는 것에 흠없이 매끄러운 남성과 데이트하는 시간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미슐랭 가이드의 높은 점수를 획득한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서비스받는 것처럼 감탄을 자아낸다.


아르빈의 바로 이 점이, 나의 사랑의 감정을 공명시켰다. 반면, 나의 이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그 점 때문에 그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고 공명된 감정을 붙잡았다. 그런 때 방황의 돛을 내리고, 잠시 정박한 채, 상대와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관찰할 이유가 생긴다. 아르빈의 나를 향한 마음은 호감도 사랑도 아닐지 모른다. 단지 호기심이 첨가된 유혹일 가능성도 있었다. 속단할 일은 아니겠지만 '그가 카사노바는 아닐까?'라는 의심을 했다.


나의 선택은 그와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있는 그대로, 충분히 즐기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의 감정은 흔하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두렵고 떨리지만 즐거운 감정'이었다. 빠져서는 안 되는데 빠져들 것 같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다. 아르빈에게도 얘기했지만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 나이트>로 알려진 이야기를 샤리아 왕에게 들려주는 셰헤라자데의 매일 밤의 심정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아르빈과 함께 하던 시간은 여행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길고 짙게 남았다.


『천일야화』의 밑바탕에는 설화, 섹스, 죽음 등이 서로 얽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데,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영리한 처녀 셰헤라자데가 샤리아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아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 날이 밝으면 그 처녀를 죽였는데, 셰헤라자데는 그러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왕은 그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된다.
특히 셰헤라자데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일야화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2007. 1. 15., 피터 박스올)


영화 "Love Affair"



마음 근육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든 아르빈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분명했다. 다만 우리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내 상태가 '결벽증'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인지 아닌지 스스로 확인할 기회가 그전에 없었다. 쿠알라룸프르는 여행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한 지역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나라의 몇 개 도시를 더 돌아다녔다. 여행 4개월 차에 접어들 즈음에 방문한 도시가 시드니였다. 시드니에서 만난 데이비드의 급속한 반전 때문에(연재 7화 고통, 빛이 되다_1편 참고) 봉인은 이미 풀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적 결박 해제'된 상태를 스스로 확인한 꼴이었다.


아르빈과 함께였을 때는 치유완료된 나의 상태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이를테면 한쪽 팔이 부상을 심하게 입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25년 정도 깁스도 하고 사용하지 않던 팔이라 치유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진 습관대로만 행동하는 상황말이다. 깁스했던 한쪽 팔 없이 25년의 삶은 계속 살아내야 했을 테니까. 그 채로 길게 살아내다 보니, 아픈 팔이 자유로워졌다 해도, 나름 만들어 온 삶의 방식을 바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빈에게 감정적으로 끌렸지만 나는 여전히 '결벽증'을 가진 Frozen(얼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사랑의 관계도 관계지만 육체적 관계에서도 극단적인 유형의 소유자였다. 나를 얼핏 보면 유교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은장도'를 항상 간직하며 살았다. 이번 챕터에서 얘기할 은장도 다른 말로 결벽증에 관련된 사연이 가벼운 상처는 아닐 것이다. 가벼운 상처였다면 오랜 시간 한 여성의 삶에 이렇게 지대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처의 무게를 누가 달아볼 수 있으리오'마는 상처는 최대한 신속하게 올바르게 치유하는 게 바람직하다. 상처 이후에도 우리는 삶을 지속해야 한다. 상처의 피해자일수록 사건 이후의 삶을 더욱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 권리와 특권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가해자보다 더 행복해져야 한다. 


11살의 나는 그 모든 걸 다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소녀였다. 범죄나 다름없는 상대의 1년간의 추행 이후 나의 권리, 특권, 행복에 대해 어떻게 붙들어야 하는지 무지했다. 수치심만 품고 있었던 어린 나에게 성인 여성의 지혜와 당당함을 떠먹여 줄 수 있다면, 11살의 나도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도!


'악'에 대해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나를 위한 '선'도 행복한 미래를 위한 '선택'조차 될 수 없다. 

이것을 깨닫는 대가 지불로 나처럼 지나치게 긴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사고나 범죄도 겪을 수 있다. 그 뒤의 모든 선택은 반드시 '치유'와 '회복'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침묵은 오히려 회복을 지연시킬 수 있다. 상처의 회복이 괴기적 형태로 굳어버리도록 방치하는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 육체의 상처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게 되려 쉽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심각한 지경에 빠져 버린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관용적 미덕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 


마음에 난 상처 또한 육체의 상처와 유사하게 정성과 관심을 반드시 쏟아야 한다. 온전한 치유와 회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나의 젊은 날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어떤 상처든지 치유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치유를 위한 전문적 도움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육체의 병처럼 이 분야의 전문가나 상담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고 올바른 대처를 해줘야 한다.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사건 이후의 삶의 질과 행복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상처든 마음의 병이든 잘 회복되기만 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 근육이 강해지는 원리와 유사하다. 강해진 상태에서는 또 다른 불의의 사건이 생겨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다. 튼튼해진 '마음근육'이 강인한 '마음체력'도 만드니까.



호기심


신기한 선택을 해버렸다. 아르빈도 데이비드도 아닌 Dan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호기심의 상대로 이성적 감흥이라고는 일도 없던 댄을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였을 것이다. 나의 동기처럼 그의 마음도 가벼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가벼운 호기심이 동기인데, 상대가 진지하게 사랑의 마음을 가진다면? 실험 자체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무게감을 짊어져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일에 대해 간접적으로 체득한 지식만 가졌던 나였다. 대부분은 책이나 텍스트를 통해서 접했다. '채털리부인의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롤리타' 등은 20대에 대학 도서관 책으로 봤다. 그다음 심리학에 관한 책을 거론하자면? '사랑의 기술(에리히 프롬)', '아직 가야 할 길(M. 스캇 펙)', '네 가지 사랑(C. S. 루이스)'의 책들이 있다. 30대 이후 읽은 책도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드 보통)'라는 책도 결국 텍스트였다.


텍스트로 배운 간접적인 사랑 위에 다른 종류의 간접경험도 덧붙여 쌓였다. 그건 주변 친구, 선후배들의 이야기였다.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는 나에게 부작용도 컸다. 야매로 진행 중인 의료술처럼.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언제 들려줄까? 깊은 하소연과 진한 스토리까지 들려주는 시즌은 그들의 연애가 불안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시기다. 게다가 나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연애에 대해, 여성 위주의 스토리만 들었다. 편향된 간접경험으로 인해 연애와 사랑에 관한 편견의 성이 내 안에 세워졌다고 판단했다.


결국 스스로 경험해 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것 또한 맹랑한 방법이었다.

결코 좋은 시도가 될 수 없었는데 이미 진행 중이었다.

나의 실험 대상자였던 댄도 이런 순간에 비명소리는 처음이었으리라.

"아악~ 아아악~~"

모든 과정이 처음이다 보니, 성인 남성의 맨 몸을 지켜보는 것 또한 난생처음이었다.


댄의 신체 부위가 커져 있었다. 그 장면을 바라본 그 순간이 공포영화의 씬처럼 변해 버렸다. 비명의 반응은 의도도 의지도 아니었다. 공포 영화관에서 주변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커져가는 소리처럼 저절로 터져 나왔다.


댄도 그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티슈 몇 장을 꺼내서 해결했다. 조용히 샤워실에 들어갔고 물소리가 들렸다. 저녁이어서 다른 숙소로 옮기기도 마땅치 않았다. 그 장면이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은 기억난다. 샤워하고 돌아와서도 1시간 정도 나를 안아주고 달래 보았지만 정지된 호기심이 다시 가동될 리는 만무했다. 벽에 걸린 코끼리 그림이 원래도 싫었지만 더 싫어졌다. 그 포스터 이미지 때문에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그 공간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 댄에게 미안한 마음은 약간 들었다.


서로 각자 자기로 했다. 잠이 들었는지 잠들지 못했는지도, 이 사실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Dan은 함께 집에서 나가자면서, 나를 다음 장소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때 얘기를 꺼냈다. 남성에게는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였고 어떤 '치유 프로그램'에 20대 초에 참여했는데, 그 이후로 털어놓는 게 두 번째였다.


"I have had an obsession about relationships like this because of my past incidents. So I haven’t had any sexual experience yet. I was sorry yesterday. He was in charge of my homeroom teacher when I was in the fourth grade of elementary school. He abused me as a scapegoat for his sexual enjoyment. Then I couldn't tell my problem to anyone yet."

"나는 이런 관계에 대해 오래도록 강박증이 있었어. 과거 겪은 불의한 사고 때문이야. 전혀 성경험이 없어. 어제는 미안했어. 그 남자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는데 나를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용했어. 그 뒤로 나는 누구에게도 이 문제를 얘기할 수 없었어."




2부_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도 잊혔다.

선생님으로서 자격 없는 담임이었다.


사람과 사람사이, 관계의 문제는 한쪽만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닐 경가 많다. 하지만 사회적 규범이나 각 사람의 선한 양심에 벗어난 행동을 통해 상대의 인격성이나 인권에 치명적인 손해를 입히는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가해자의 일방적인 문제다. 그런데 유독 '성적인 범죄'만큼은 '피해자'들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판결 과정이 있다. 그대로 재현하는 과정이다. 사기죄나 폭력 범죄 혹은 날치범들에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례를 재판과정 동안 재현해 보라고 하지 않는데, 이 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수치심을 다시 한번 자극하는 현장을 만든다. 공개석상에서 재현해야 하는 것이 피해 사례를 겪었던 나로서 받아들이기 당황스럽고 어렵다. 물론 나의 사례를 법적 공소까지 끌고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랬다면 빨리 치료되었을까?


하지만 나의 잘못과 (11살의 미성년였기에) 부모님의 잘못이 있다면 이것이리라. 나의 잘못은 내가 당하는 사건들에 대해 침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의 잘못이라면 살기 바빠서 딸인 내가 성장 과정 동안 대부분의 문제를 혼자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4학년 내내 담임이었고, 1년 동안 나에게 수치심을 주었다. 그 수치심과 이후의 여러 종류의 피해 의식은 12년에서 30년가량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담임이라는 그 남자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내 몸을 만질 때마다 저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는 게 지금 나로서는 아이러니다. '사랑'이나 '선'한 행동 배후에 Spirit이라는 영적 힘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타인을 괴롭히는 '악'과 '범죄'에도 Spirit의 배후가 존재한다. 그것 또한 악한지만 '힘'이다.



두려움


엄마도 이 부분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 담임은 엄마가 가게 일을 보고 있을 때면 엄마를 종종 찾아왔다. 직접적으로 돈을 바라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돈을 달라는 그의 의도에 대해 모르는 척할 때면 다른 물품을 요구했다. 부모님 가게에서 판매를 위해 진열해 둔 남성복 몇 벌을 챙겨 입고 갔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던 분이셨다. 학교기관이나 선생님이라는 대상 자체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진 시대에 태어나셨고 성장하셨다. 그런 엄마가 유년시절에 만났던 분 중 고마운 은사님도 계셨다. 가난해서 도시락조차 싸가지 못했던 엄마를 위해 선생님 자신의 도시락 반을 베풀어 주신 분이셨다. 엄마는 그분을 항상 잊지 못하셨다.


반면, 담임이었던 악한 남자는 엄마를 방문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의 기억을 엄마에게 남겼다.


"반에서 제일 잘 사는 약국집 딸 '희영'이 아시죠? 허니랑 제일 친하게 지내는 희영이. 시험 보면 결과적으로 그 애가 '허니'보다 많이 틀려요. 몇 개 더 틀리는데, 어떻게 매 번 1등 하는지 알아요? 내가 다 맞았다고 고쳐주거든요. 그 약국집은 매 번 나를 얼마나 잘 챙겨주신다고요."


엄마는 아버지나 나에게 이런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안 될 거라 생각하셨다. 문제 해결을 그런 식으로 하다가, 결국 나에게 다시 피해가 되돌아가게 될 까봐 걱정하셨다. 교육부에 신고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참으셨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이런 정황을 그제야 얘기해 주셨다.


나는 나대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 그게 친구 관계의 문제던지, 선생님과의 문제, 혹은 성적 관련 문제일지라도, 집에 와서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자녀가 아니었다. 그 사건이 내 인생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줄 문제라고 분별하지 못했다. '혼자 고민하고 해결'하는 방법도 무식했다. 침묵가운데 세월이 흐르면서 언젠가는 사라지기만을 무작정 바랐다.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시는 편이었다. 내가 잠들고 나면 집에 들어오셨는데 아버지가 사 오신 간식 봉투를 아버지 얼굴 대신 대면했다. 가끔 서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는 나의 학교 과정에 대한 성과를 점검하셨다. 점검이 이뤄지는 시간에 아버지 앞에서 나는 항상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훈화말씀을 들어야 했다. 나의 고개가 떨궈지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1~2시간 길이의 일방적인 훈계가 마쳐진 뒤 나의 반응은 일관되었다. 군대에서 부하가 상사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예"라고 응답해야 했다. 안 그러면 훈계는 더 길어지고 집안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이런 아버지와 관계로 힘든 가족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가장 힘드신 분은 엄마였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엄마의 인생 무게는 힘겨워 보였다. 언젠가 홀로 써가는 엄마의 일기장을 우연하게 발견해서 읽게 되었다. 거기에 엄마의 익숙한 글씨체가 기록되어 있었다. 비툴거리는 글씨로 '죽고 싶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이런 연유로 어린 나였지만, 내 문제는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대 이후, 건강하고 단단한 인격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인간의 노력은 중요하지만 노력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대전제가 있다. 노력의 목적이 좋아야 하며 그것은 노력의 방향을 결정한다. 가족 모두 각자 노력을 하긴 했는데 그 방향성이 허무한 것은 아니었나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의 마틸드와 루아젤의 노력처럼 말이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나는 서로를 너무 걱정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커서, 결국 과도한 보호심리를 사랑으로 오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차라리 함께 소통의 출구를 찾고 용기 있게 문제를 합력해서 해결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엄마는 여전히 모르신다.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다. 공소 시효가 진작 끝난 일이거니와 나에게서도 영원히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용서가 끝난 사건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다. 이제 그와 공정한 신의 일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3부_ 빛의 시간들

MBTI 검사


'상담'과 비슷한 형식의 대화는 2학년 겨울 방학 때 처음으로 이뤄졌다. 섭식 장애와 우울증이 지속되고 있었다. 거식증과 폭식증을 반복했는데, 그 방학 기간은 폭식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도서관 다니는 걸 좋아했다. '전남대 도서관'을 다니면서 우연히 'MBTI 검사' 후 검사받은 신청자의 이해를 도와주는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단비처럼 위로를 얻는 시간이었다. 


알고 보니 그분은 교목선생님이셨다. 교목은 학교의 학생들을 신앙적으로 돌봐주고 성경적인 인생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학생들을 섬기시는 교내 목사님을 칭한다.


당시 MBTI결과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ISFP로 나왔다. 설명에 의하면 비슷한 위인이 '베토벤'이었다. 상담선생님과 대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나를 이해하는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그 분과의 대화를 통해 좋은 영감을 받았다. 앞으로도 이런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는 평안과 희망도 생겼다. 그분에게 나의 거주지가 서울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교목님이 소속한 선교단체 IVF의 서울 지부로 연결해 주셨다. 이후로 서울 지부 모임에 한 번 참석 하긴 했지만, 인연은 이촌동에 있는 큰 교회로 연결되었다.


성경책, 신앙, 교회 공동체, 모든 게 낯설었다. 예수라는 역사적 위인도 나의 느낌으로는 옆집아저씨 같았다. 성경에 신이라고 정체성을 밝혀두긴 했지만, 내가 그분이 신인지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전대에서 만났던 교목님처럼 나쁜 분 같지는 않았다. 딱 그 정도가 나의 마음이었다.


영어 성경에서는 Jesus 대신에 인칭대명사 He를 사용해 기록했다. He라는 존재 자체가 힘들었던 개인인생 연륜 때문인지 He에 관해서라면 마음이 좀체 열리지 않았다. 홍일점으로 대학 생활을 몇 년째 하면서 지칠 때로 지쳐버린 마음 탓이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이런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여인이 한 명 등장한다. 그 여인처럼 He를 만나는 것도 싫었고 He던지 She던지 사람을 피해 다니던 시기였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 잠적하거나 사라지고 싶은데 내가 그랬다. 새로이 알아갈 대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소문 자자하고 대중이 따르는 He일지라도 나는 그저 변두리에서 지켜보길 원했다.  



샤이닝 글로리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샤이닝 글로리'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카톨릭 영성 훈련 3일이라는 의미를 지닌 'Tres Dias'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티브는 가져오고 과정은 대부분 재편된 프로그램이었다. 성경 속 그 He라는 분을 조금 상세히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고 그와 동시에 나의 과거의 상처들을 직면하면서, 내려놓거나, 팀원들과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걸 모른 채 참여했다. 미리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기에 출석한 교회는 대형 교회였다. 사용하는 공간도 넓고 컸다. 공간 시설의 일부 코너에 'Shining Glory'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밥보다 이탈리안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매주 샤이닝 글로리 레스토랑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다. 파스타 특히 훈제 치킨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데 가격도 착했다. 음식 맛은 호텔 라운지급이었는데 가격은 대학교 근처 분식집 수준이었다. 그곳을 방앗간 지나는 참새처럼 들락거렸다.


교회 신문에 '샤이닝 글로리'라는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참가비가 있길래 그게 너무 궁금했다. 레스토랑 코스 요리 즉 '다이닝 식사'를 먹는 프로그램쯤으로 생각했다. 나의 의구심과 흥미는 주변분들에게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 프로그램을 이미 알고 있던 지인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전했다. '3박 4일 동안 고급스러운 음식을 매 끼 식사로 잘 먹고, 좋은 숙소에서 푹 쉬다 오는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참석하니 그 설명도 참말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의 매 끼 식사가 정말 호텔 수준이었다. 그 사이사이 눈에 넣어도 기분 좋을 간식이 준비되어 출현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강의를 들었다. 나의 영혼에 대해, 나의 상처와 회복에 대해 알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놀라운 경험은 이틀째 밤에 일어났다. 살아온 내내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그 문제에 대해 최초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제 조건이 있었다. 같은 그룹에 속했던 여성들 모두가 하나 같이 비슷한 상처를 고백했다. 상처의 경중을 저울로 측정하는 일은 어렵지만, 각 자의 스토리가 다양했고 무거웠다. 내 상처의 명함이 가장 순한 맛이라 생각될 지경이었다. 근친상간 수준의 문제부터 별의별 문제를 조용하게 토로하였다. 함께 경청하고 은은하게 공감하며 위로를 나누었다. '집단 치유'가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집단치유'가 얼마나 강력한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지 경험했다. 이 경험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전환점이었지 인생 전체 시간의 해결책은 아니었다. 수치심스러운 과거로부터 내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 믿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의 문제였다. 홀로 떨어져 있다 보면 잊혔다 생각되는 수치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용서 못하는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기도하고, 간구하고, 용서의 마음을 계속 구했다. 간절했다.


그러다 '찬란한 빛'을 체험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독자 각 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겪은 일이라 기록한다. 기도를 간절히 이어가다, 어느 저녁 집회였다. 비슷하게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나에게 그 상대의 얼굴이나 그때 겪은 기분, 대부분의 분위기에 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 사람의 얼굴과 모습이 아니었다. 온전한 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형상의 이미지가 보였다. 사람의 형체는 보였지만, 모든 구석구석에 빛만 찬란히 발사되고 있었다. 더욱 희한한 점은 그 뒤로 그 모든 어두운 기억을 통째로 누가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깨끗이 지워지고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그 사건을 두고 기도한다 해도 찬란한 빛은 보이지 않는다.   


환한 빛만 번져 나오는 빛의 전사는 내 마음 어딘가에 보관해 두었다. 이건 나의 의지로 기억 상자함에 넣어둔 것이다. 그 뒤로도 가끔씩 빛의 전사가 필요할 거 같아서다.


작약 Peo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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