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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 Sep 05. 2024

아버지는 집이다 1

집없는 아이들




아버지는 집이다. '유년 시절의 집'을 떠올려 보자. 3가지의 키워드라면, 무엇일까?

가족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이 '집'이니까.


현대 가정 형태는 자유로워서 다양하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보편화된 가정 형태겠지만, 이 외에도 1인 가정,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다문화 가족, 입양자녀와 함께 사는 입양가정, 노인가정 등이 있다. 가족공동체가 이렇게 다양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다채로워지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규모가 다른 공동체단위의 가족도 있다. 그들이 함께 머무는 곳이 그들의 집이다. 예를 들면, 부모의 사연 때문에 보육원의 위탁 공간을 집으로 공급받은 아이들이 있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도 있다. 마치 집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저녁 잠자리가 될만한 도시 공간, 서울역이나 지하철 내 어딘가를 사용하는 노숙자들이 있다. 길거리를 '집'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서울의 다양한 집


집에는 공간마다 나름의 이유를 가진 채 각 사람의 사연(stories)과 개인사(history)가 쌓인다. 이처럼 독특한 공간 집에서 우리는 삶을 지탱해 가는 힘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죽음을 동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집이라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특히 유소년에게 집은 성인이 되기까지 성장과 성숙을 위한 의존적 공간이다.


그들에게 집은 아버지나 다름없다. 집안 분위기의 주요한 열쇠가 아버지에게 달려있으니까. 아버지의 성향으로 가족이 좌지우지되기 쉽다. 아버지의 권위 성향에 따라 가족의 문화나 주요한 생활습관이 형성된다는 의미다. 그에 따라 자녀들의 성격에서부터 유소년시절의 기억 심지어 미래의 운명까지 결정적으로 형성되는 장소다. 그게 바로 유일하게 '집'이고 '아버지'다.


'아버지는 따스한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바람이다. 참 좋은 집 말이다.  

단순하고 좋은 바람이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창이 넓은 집 :)


불완전성


사람들은 신처럼 언제나 꿈꾸고 창조하고 발전을 시도해 왔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발전은 성공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전하지 못한 결과가 반드시 따라붙지만 말이다. '발전'은 어김없이 '파괴'의 측면을 양산해 왔다. 이는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의 창조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닮았다. 인류의 창조는 결과적으로 어두운 결과의 잔해를 드러냈다. 순전히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인간의 발전이나 개발은 없다.


역설적으로 우리 본질인, '불완전성'이야말로 '발전'의 동력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하고, 또 다른 발전으로 한 걸음씩 나가야만 한다. 무방비 상태로 안주하는 것이야 말로 '망하는 단계'로 가속까지 붙여 추락하는 것이리라. 발전에도 완벽한 대안은 없지만 그렇다고 안주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숙명이다. 발전적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계속해 나가야 하는데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점이 있다. 발전에 따른 유익의 총합이 증가될수록, 동시에 '퇴보'와 '폐해'도 축적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의 원초적인 터전이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지만 우리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결국 지구마저 병들게 했다.

되돌릴 방법을 거론하고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력을 상실한 우리이기도 하다.

'지구'는 모든 인류의 근원적인 '집'이나 다름없는데,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근본적인 기반을 망쳐놨다.

우리의 현주소이자 인류 발전의 결과다.   


파괴되는 생태계는 지구만이 아니다. 태곳적부터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 가정'도 마찬가지다.


어떤 집단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구원 계획이 '가족공동체'에 심어졌다. 신이 가족과 집을 통해 계획한 비밀이 있는데, 그건 '온전한 사랑'이 넘치는 천국의 계승이었다. 사실, 사랑은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이타적인 신의 속성이다. 가정이라는 연약한 집단을 통해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사랑을 전수하려 했다니! 완전한 신의 뜻이 실패한 것일까? 알고 보니, 신은 인간의 본성을 한 참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일까?


점점 소망이 회의적으로 보이는 게 현실이다. '집'이라는 단체의 대표, '아버지들'이 상처받은 채, 회복할 겨를도 없이,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권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기도 전에 '아버지'라는 이름표를 받게 된 경우가 흔하다. 권위자는 권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뛰어난 운동선수만큼이나 혹독한 훈련이 필요할 텐데 이러한 사전지식을 학교에서조차 배울 수 없다. 대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처럼 '아버지'라는 지위를 얻고 나서야 깨달아간다.


깨달음의 도를 어떻게 해서든 찾아가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다.

좋은 집이나 아버지와 달리 안타까운 경우도 체험했다.

나의 가정환경에서도, 나의 직업적 환경에서도 '아버지의 도'를 추구할 겨를조차 없이 바쁜 분들을 만났다.



경험


이런저런 알바를 단발적으로 해봤지만 역시 대학생에게 좋은 선택은 '과외선생님'알바였다. 시간당 페이도 높고 나를 대우하는 사회적 시각도 좋은 일이었다. 과외 알바를 시작한 이래로 서울의 이 동네 저 동네의 다양한 가정을 방문했다. 방배동 빌라촌이나 타워팰리스에서부터 강북의 지하 단칸방 그리고 탈북학생의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의 집에서 환영받는 특권을 누렸다.


경력이 쌓이자, 어느 집에서든 두세 번의 방문을 하고 나면, 학생의 성격과 공부하는 태도의 원인을 단박에 짐작했다. 나는 직관적 기능보다 감각적 기능이 발달된 사람인데, 사례에 관한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직관력도 발달되었다. 학생과의 수업을 위해 찾아간 가정에서 해당 학생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보기도 했고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던지 자녀를 통해 아버지를 체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중 일부를 체험하는 것이지만 공교롭게도 둘의 관계를 내가 직접 지켜보기도 했다.


세영의 아버지는 제법 유명한 브랜드로 알려진 가구 회사 대표였다. 처음 뵐 때부터 사업가다운 성격과 다부진 말투가 멋있어 보였다. 세영의 어머니는 그 집에는 가끔 방문했다. 자녀가 둘이나 있었지만 여전히 아가씨 같은 외모였고 뛰어난 미인이셨다.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1만 팔로워정도는 금방 얻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두 분은 별거 중이었다.


나를 세영의 가정으로 인도해 준 친구가 이 가정을 나에게 소개해 줄 때 강조한 부분이었다. 세영이가 학습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앞서, 정서적으로 따스한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친구의 믿음처럼 내가 그런 지혜로운 개인교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없었다. 부족한 자신감이 나의 선택에 영향을 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 시기, 우리 집안 상황은 부도가 난 이후였다. 이런저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뢰에 반응하는 것만이 나의 선택지였다. 몇 번의 수업과 함께 만난 세영을 통해 나의 10대 시절의 그림자를 들춰볼 시간을 가졌다.


초등학생 세영이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내 생각에, 세영이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장난감처럼 대하는 자신의 강아지였다. 그 강아지를 아끼는 것 같다가도 세영이는 자신의 기분이 나빠지면 강아지를 학대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을 주고 마음을 여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외딴섬에 혼자 있는 아이 같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가르쳐야 했고 세영은 공부시간을 인내해야 했다.


세영이 학습에 동기가 없다 보니 공부에 집중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세영의 태도를 대화나 훈계로 바로 잡으려 했다. 반항심을 가졌던 세영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가 이런 상황을 공부방 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영이와 내가 수업하는 방문이 열렸고 아버지가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세영이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그 채로 세영이가 질질 끌려 나갔다. 평소 말수가 적은 세영이는 그 시간에도 말이 없었다.


말로 일하는 직업이 강사다. 압구정에서 말로 일하던 나를 기죽인 태희를 만났다. 아버지가 '성형외과'의사 거나 이와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가정이 많은 동네, 압구정이었다. 강사로서 첫 경력을 쌓은 동네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 없어 보였던 학생 태희는 특목중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태희가 툭 내뱉은 말이 지워지지 않는다.


"쌤! 씨발~ 그 미친년이 나보고 공부를 하래요. 그 년이나 그 새끼나? 지네들이 뭐라고"


그 쎈 표현을 들었지만 당황하는 내색을 보일 수도 없었다. 쎄게 나오는 학생일수록 비슷한 강도로 대응해야 강사로서 후기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마음에 떠오르는 말도 참고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 아빠잖니. 무슨 말이 그래?'


이해할 수 없다 보니 그 사건 뒤로도 자꾸 생각났다. 시간이 한 참 지나서야 부족한 이해를 돕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만나게 된 새어머니라는 짐작이었다. 당시에 나의 강사 경력은 초반이었고, 이혼이나 재혼 가정에 대한 경험도 크게 없었다.


이런저런 '집' 다른 말로, 아버지의 영향력을 경험하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와 과거의 집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품



집 없는 아이들


내가 만났던 극단적인 학생들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가끔 울며 기도했지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완전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학생들에게 실수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 나의 아버지나 나나 같은 처지일 것이다. 나는 실수가 없고 아버지만 나에게 원인 제공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모로서든 선생님으로서든 자녀들에게는 권위의 얼굴이기에 유사한 위치와 책임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학생들과 만나는 동안 불완전하고 멍든 권위주의에서 학생들을 건져주는 역할을 잘 해내지 못했다. 사교육자의 역할은 성적향상이다. 이 목표를 쫓아가기도 바쁜 지역이 서울 강남지역이다. 부끄럽지만 강남부모님의 성향에 딱 맞춘 교육서비스를 통해 학생들의 성적 올리는 성과에만 집중했다.


학생들에게 나는 비슷하게 권위의 가면을 쓴 기성세대였을 것이다. 권위주의가 잘못됬을지언정, 속도감있는 성과를 가져오기에는 최적의 방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는 고백부터 하고 싶다. 나의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겸손하게 해석하는 나만의 길이었다. 스스로 비슷한 죄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의 직업적 경력의 채찍질로 인한 진통을 지나고 나서야 나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으니까. 미련한 나의 과정이 나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해가는 프레임이었다.


유년의 나나 나의 학생들에게 공통점은 이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쉼을 얻고 성장기에 누구나 마음껏 누려도 좋을 실패를 한없이 용납받을 만한 '터전'에서 우리는 태어나지는 못했다.

사춘기 시절 나는,

집이 있었지만 집이 싫었다.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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