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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 Sep 12. 2024

아버지는 집이다 2

사랑을 알아가는 여정 



바지를 찢다


자정이 지났지만 졸리지 않았다. 책장만 계속 넘겼다. <데미안>에 서술된 문구에 과몰입되었기 때문이다. 기남이와 어울린 이후로 생긴 갈등을 늦은 밤 시간에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헤르만 헤세와 싱클레어*는 번민과 두려움으로 방황하던 나의 마음을 <데미안>을 통해 안아주었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누군가가,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마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해서 대변해 주었다.


싱클레어: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으로서, 순수하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소년으로 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과 자신의 가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갈등과 죄책감을 느끼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헤르만 헤세만큼은 나를 이미 안다는 의미였고 동시에 그가 실재한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아무도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같아 힘든 시간이었는데, 헤르만 헤세는 '너를 이해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막상 헤르만 헤세와 소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의 탈출구이자 영혼의 친구를 찾았다는 안심이 들었다. 그 시절 나에게 유일한 '해방의 수단'이었다.


빠져들면 안 된다고 느꼈다. 이 느낌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기남이에게 물들어 갔다. 오히려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기남이를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계 속으로 침윤되어 갔다. 내가 변했다. 나의 말투 외에도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에까지 그 변화가 드러났다. 청바지가 생기는 족족 찢거나 구멍을 뚫었다. 또래 그룹이 선호하는 스타일로 바꿔 입으려는 수작이었다.


요새 찢어진 바지를 누가 '노출'이 심한 옷차림으로 생각하는가? 반항적인 패션 스타일로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청바지에 구멍이 몇 개 뚫렸든, 손바닥보다 큰 면적으로 바지의 무릎부위를 완전히 도려냈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여느 바지 입은 복장과 유사하게 인정해 주는 시대다. 일례로, 일부 테크기반 회사는 출근복조차 반바지나 쪼리가 허용되는 복장 자유시대다.


믿기지 않겠지만, '청바지 찢어 입는 패션'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시선도 존재했다. '아니, 멀쩡한 바지를 왜 찢어?'라는 비판적 시선이었다. 기성세대는 '찢어 입는 젊은 사람들'을 걱정했다. 걱정했는지 자신들의 생활 습관과 맞지 않다고 비판하며 평가했는지, 당사자만 안다. 그 당시 나는 '새로운 패션을 시도하는 청소년 그룹'에 속했다. 걱정하는 그룹에 속했던 엄마는 찢어진 바지를 발견하는 족족 버리셨다. '아니, 왜 한두 시간 동안 수고해서 최대한 예쁘게 찢어놓으면 버리시지?'라며 나의 변화 또한 굽힐 줄 몰랐다.


사춘기 아이의 새로운 패션을 추구하는 모양새는 다만 포장일뿐이다. 핵심 코어는 그 행위의 내면적 의미다. 그것은 반대 세력이나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을 세우고 싶은 욕구다. 이전 세대들과는 별 개의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거듭나고 싶다는 의미다. 매우 자연스러운 욕망의 표출이다. 마치 관습을 찢어 버리고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하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다.  



부모님 세대가 '쯧즈'라며 혀를 차고, 못 마땅해할수록

"저런 반응이라면 더 해야겠어. 결국, 우리만의 문화잖아."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이유다.

나의 청바지의 변화는 돌풍 같은 내면 변화의 표출일 뿐이었다.  


패션에 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회적 이슈가 한 때 존재했다. 찢긴 청바지 패션과 비교할 수 없는 도발적 시도였는데, 패션의 개혁이 이슈였지만 보수 세력의 강력한 압제 또한 볼 만한 화젯거리였다. 사회적 논란으로까지 이어지는 패션 이슈는 법령을 만들었다.  



17cm 통과! 18cm 범법!


밀레니얼 세대, MZ세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미니스커트가 한국에 착륙'한 이야기의 진실은 이렇다. 1967년 유명한 가수 윤복희씨가 미국에서 귀국했다. 복희씨의 공항패션은 예상치 못한 스타일이었다. 그날 윤복희선생님의 옷차림을 보기 전까지 한국 사회의 모든 여성은 하나같이 무릎아래나 발목까지 길게 뻗은 길이의 치마를 입고 다녔다. 무릎 위의 다리를 노출할 수 있는 치마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가치관을 패션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추구하는 여성을 '신여성'이라 불렀는데, 신여성과 젊은이들은 미니스커트에 열광했다. '멋'도 멋이지만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을 찾아가기 위한 선도적 움직임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폭발적 인기를 얻어가던 미니스커트는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정부 반응이 지금과 얼마만큼 다른지, 놀랄 따름이다. 유신정부는 미니스커트 입는 것을 일부 금지했고, 단속을 시행했다. 단속 담당자들이 '자'를 들고 다녔다. 다리와 스커트 사이로 '자'를 가져다 댄 담당자는 그 길이를 직접 쟀다. 무릎 위로 17cm 이내인지 검사했다. 17cm 이상 차이가 나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다면 그 여성은 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범법자가 되었다.



찢어 입는 청바지 패션에 대해서 사회적 단속까지 시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눈에 두드러지는 변화에 대해 '보수세력'과 '기성세대'들은 항상 걱정과 반대가 많다. '쯧즈' 정도의 한탄으로 멈추지 않고 '세상이 망하려나 봐!'와 같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변화에 대해 닫힌 마음을 가질 때 시대적 문제의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말이다. 물살의 흐름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기류를 잘 타는 주도적인 항해를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출판계의 흐름을 바꿔온 브런치의 10년 넘는 행보가 변화를 주도하는 좋은 예라고 본다.)


물론 청바지만 찢어 입은 게 아닌 건 사실이다.

기남이와 친해지면서 더불어 만나게 된 친구들이 있다.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학교 정규과정과는 상관없는 것들을 배웠다.



일진그룹


이런 청바지가 필요해진 나의 원인은 '흔한 사춘기'때문이 아니었다. 중 2 담임선생님의 '촉'때문이었다. 뭉툭한 촉을 가졌던 담임선생님은 반전체의 짝을 결정하는 시간도 아닌데, 나를 기남이 옆에 앉혔다. 짝꿍으로 만난 '기남'이는 나에게 한동안 냉소적인 표정을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짝이 된다는 사실이 서로 맘에 들지 않았다.


몇 주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인데 나보다 더 작은 기남이는 학교에서 '일진 짱'이었다. 일진그룹 리더나 마찬가지였다. 기남이가 짱이 된 이유는 키도, 외모도, 몸싸움실력도 아니었다. 오직 '깡다구'였다.


깡이라면 나 또한 누구에게 지지 않는 편이었고, 그런 기질은 언행에 드러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보다 10cm 이상 키가 컸던 채연이가 "야 너 나랑 한 판 붙어!"라며 도전장을 내걸었다. 키순번으로 번호를 정하는 시기였다. 나의 번호는 항상 앞이었다. 앉는 자리도 앞에서 첫 번째 줄이나 두 번째 줄이었다. 그런 내가 채연이 눈에는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싸움 도전장'을 내 걸뿐만 아니라, 같은 반 친구들에게 싸우는 시간과 장소를 알렸다.


"그래 알았어!"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그 장소에 나갔다. 말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우리는 손으로 서로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서로의 머리가 맛대어 붙어 있었다. 서로의 손에 꽉 쥔 힘은 조금도 느슨해질 기미가 없었다. 긴장감은 가졌겠지만 게임을 지켜보듯이 구경만 하던 같은 반 아이들이 이런저런 소리를 내면서 소란스러워졌다.


무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동호는 우리 반 회장이었다. 옷매무새부터 모범생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닌 '동호'는 공부만 잘하는 친구 같았다. 딱히 친한 친구도 없었다. 그런 동호가 웬일인지 8m 정도 떨어진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우리를 지켜봤다. 나는 부회장이었는데 학급회의 시간마다 회장인 동호 의견에 반대를 많이 했다.  동호는 그런 나를 좋아했다. 내 머리채가 잡힌 모습을 몇 분 지켜보다 즉시 담임선생님에게 뛰어갔던 모양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채연이와 나를 이미 간파하고 계셨던지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라는 식으로 대응하셨다. 싸움터에 나타나지 않으셨고, 다음 날 교실에서 우리에게 웃으면서 물으셨다.

"잘 싸웠냐? 누가 이겼지?"  


동호가 사라졌지만 나와 채연이는 머리채를 놓을 마음이 없었다. 이런 때는 누구 한 명이 울어야 하는데 나는 울 마음이 없었다. "내 머리 안 놔?" "니가 먼저 놔!" 이런 식의 언성만 주고받았다. 우리의 싸움은 지나가는 행인 아주머니와 아저씨 덕분에 멈출 수 있었다. 우리를 서로에게서 떼어놓은 두 분 모두 채연이만 연신 혼냈다. 체격 조건을 딱 봐도 '중학생'정도 되는 언니가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되는 꼬마 동생을 못살게 구는 모양처럼 보였을 게다. 머리채가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나는 쌓였던 두려움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키가 큰 채연이는 비슷하게 키가 큰 친구들이 두 세명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옷 입는 스타일도 비슷한 뒷 번호 친구들이었다. 싸움을 끝내고 나서야 맛보는 두려움에 대한 경험은 새로웠다. 어른들은 내게 "어디 다친 데는 없니?"라고 계속 물으시셨다. "집은 어디니?"라고 안전을 위한 확인도 놓치지 않으셨다.


채연이는 정치적인 아이였다.

그 뒤로 채연이는 나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나와 기남이는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어쩌다가 기남이는 나를 집으로 데려갔고 우리는 기남이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관찰한 기남이 모습은 그전에 알고 지낸 친구들과는 달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형편이 어려웠던 기남이의 집도 아파트 단지 내의 친구들의 익숙한 집과 차이가 났다. 식사 준비도 친구 어머니가 해 주셨는데 기남이 집에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 두 분 다 일하러 나가셨다. 이런 상황은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 집에는 '가사도우미'분이 계셨다. 엄마 대신 나와 동생들을 맞아 주시고 식사 준비도 해주셨다. 어떤 가사도우미 분은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내 식사는 기남이가 직접 준비해 줬다. 기남이의 이런 모습 때문에 나는 기남에게서 '모성애 닮은 따스함'을 느꼈다.


기남이는 같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의리와 리더십이 강했다.

기남이는 내게 새로운 친구이자 새로운 세계였다. 어울리는 동안 마음이 편치 않고 내면의 갈등이 있었지만 사회를 이해하는 폭이 커지는 시간이었다. 마음 한 편에 부모님을 향한 두려움과 가책이 들 때마다 <데미안>을 약처럼 처방하고 읽었다.  


기남이가 이끄는 일진 그룹에 속한 친구들 50%이상은 학교를 무단 결석한 결과로 '정학처분'을 한 두 번씩 받았다. 자신들의 집에서는 원하는 횟수만큼 집을 나갔다 다시 들어가곤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뜻을 부모님께 관철시키는 방법이었다.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수준도 달랐다.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그랬다가는 기남이와 일진그룹 아이들까지 샅샅이 아버지께 조사받을 게 분명했다. 집에 꼬박꼬박 들어갔고 성적 관리도 해 두는 게 '이중생활 유지'에 훨씬 안전했다. 일진그룹 친구들 속에서도 적당하게만 어울렸던 나는 운동선수 그룹으로 치면 후보선수라인 정도였다.


일진그룹도 '파'가 하나만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파 친구와도 안면을 트고 나면 나는 거리낌 없이 잘 어울렸다. '벌교'지역에서 온 친구 수정이는 아역 CF 모델을 했던 친구였다. 수정이가 소소하게 만드는 그룹 분위기의 지향점은 약간 달랐다. 한 참 이성에 관심이 많을 사춘기들의 욕구가 발산되는 그룹이었다. '이성친구'들과 만나 '연애'스토리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수정이의 부모님 관계가 편안하지는 않았다. 집안사가 복잡하니까 다른 것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수정이라 생각한다.



다 써라!


수정이와 어울리면서 생겼던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나의 아버지는 '형사'역할이었다. 본래부터 내게 걸려오는 전화를 굵직하고 성난 목소리를 차단하거나 단속하는 아버지셨다.

남학생들에게 전화가 자주 왔는데,


"허니집이죠? 허니 있어요?"

"너 누구냐? 허니 없다."


이 정도로 멈추지 않았다. 과외로 수업을 받기는 했지만 집에만 머물기에는 몸이 근질근질거렸다. 대형학원이었던 '종로학원_광주점'이 충장로 도청 근처에 있었다. 인기 강사이자 유명 강사들의 수업은 재미도 있었다. 한 수학 선생님은 속옷 CF모델이기도 했는데, 강사님들의 인기는 우리에게는 연예인을 능가했다. 영어와 수학과목은 줄 서서 등록해야 했다.


내가 그 학원을 등록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나였기에, 학원 수업 시간으로 배정된 그 시간만큼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수정이는 꿩도 먹고 알도 먹자는 심산이었다. 청춘 연애사업을 능력껏 펼쳤다. 함께 하다 보니 만나게 된 남자친구들이 생겼다. 편지도 받고, 그 편지가 들켰는지 원인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건 아버지의 형사실력이다. 나에게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으셨는데 상대 남자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으셨다. 그 그룹 남자애들이 긴장한 채 학원 근처 빵집에서 아버지 앞에 앉아 있었다. 수정이 상대 남자친구가 그 그룹의 짱이었는데 그 애만 덤덤했다. 나에게 편지를 쓴 나의 상대 친구를 포함 모여 있던 남자애들은 다들 떨었다고 전해줬다. 아버지의 이미지는 진심 무섭다. 아버지는 거기 모인 친구들에게 진술서를 요구하셨다.


"자 허니랑 어디 어디 갔는지 자세히 다 써라!"


빵을 먹던 친구들은 눈치를 보면서 하나하나 적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나를 혼내는 방법이었다. '반성문!' 아버지는 본인의 성장기에 어머님께 잦은 몰매를 맞아서 자녀들은 매를 때리지 않겠다고 다짐 하셨다. 사실, 아버지는 나를 낳고 얼마나 지나지 않을 때까지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바로 머리채를 잡힌 채 머리를 벽에 가져다 박히거나, 뺨도 맞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와 할머니 관계를 지켜보셨고 그래서 할머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강한 다짐처럼 나나 동생에게 매를 때리지는 않으셨다. 다만 아버지의 피와 살에 이미 흐르고 있었던 '대를 이은 상처'를 폭언과 욕설로 표현하셨다. 아버지의 훈계 중 무한 반복하는 시리즈가 몇 편 있는데, 내용은 흔한 스토리다. 꼰대 스타일 훈계의 대표적 예로써, 아버지의 가난한 유년 시절과 그로 인해 고생하면서 가꿔 온 아버지의 삶의 현장 얘기를 한두 시간 주욱 읊으셨다. 그다음, 질문이신지? 덧붙이셨다.

"아빠는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못했다. 너희는 부족한 게 뭔데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안 하는 거냐?"


거기에 나의 의견이나 말대신 '반성문'쓰기를 요구하셨다. 빵집에서 그 남자 친구들도 비슷한 글쓰기를 했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엄마에게 아버지의 소감을 조용히 남겼다. 이 내용도 엄마는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나자 알려 주셨다.


"그 녀석 만나고 왔어. 앞으로 연락은 안 될 거야. 근데 녀석 얼굴은 아주 잘 생겼더라고."


그 뒤로도 나는 학교도 학원도 계속 다녔고, 학교와 학원을 가면 친구들도 항상 함께 했다.

고등학교 가서는 새로워지나 싶었다. 사실, 나도 내심 기대했다. 일진그룹은 고등학교에도 있게 마련이고 언제 만났는지 이미 안면을 튼 친구가 같은 고등학교에서 나를 먼저 알아봤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와 아버지 관계였다. 아버지도 나도 부녀간의 관계를 진심으로 열어가는 대화방식을 이해하거나 연습하지 못했다. 빵집에 있던 친구들의 존재나 상대 친구가 보낸 편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사건에 대한 당시 나의 감정을 그 시절의 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아~ 쪽 팔려~'였다.

 


독서실에서 외박한다고?


시험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중학생들의 색다른 재미는 시험 보는 기간에 있었다. 나처럼 공부는 약간 뒷전일 때 더 재밌어진다. 친한 친구들끼리 같이 애용하는 독서실이 학교 근처에 몇 군데 있다. 파자마 파티가 허용되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시험기간은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신기한 점은 중학교에서 전교 상위권이었던 친구들도 같이 어울렸다는 것이다. 그 친구들도 '공부만' 잘하는 학생으로 학창 시절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전교 1등을 독보적으로 차지하던 미성이가 내 자리에 자주 와서 놀렸다.


"허니~ 너 또 자냐? 몇 페이지나 봤다고? ㅎㅎㅎ"

"몰라! 꺼져! 먹었더니 졸려! 자는 거 깨우면 짜증 난다."


독서실 한 곳에 전교 석차가 다양한 친구들이 속속 모였다. 나는 집에서 멀었지만 공부는 핑계고 목적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난 시간이니까 가방을 챙겼다. 간식을 잔뜩 챙기는 건 꿀팁이다. 책 한 페이지 보고 나면 집중이 안될 테니까 한 봉지씩 뜯어서 먹어야 했다. 공부스트레스는 과자로 달래줘야 하는 법이다. 아버지는 말씀드려 봐야 뻔한 결과니까, 엄마를 간신히 설득했다. 독서실에서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하겠다며 그날은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말씀드렸다.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났다. 밖에서 익숙한 소리로 불려지는 친숙한 이름이 우렁차게 들려왔다.


"허니야~ 허니 어딨냐? 어디서 독서실에서 외박을 한다고?"

주변 친구들이 과자봉지 뜯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나를 툭툭 쳤다.


"야~ 누가 너 이름 부르는데"

"혹시 너네 아빠 아냐?"

독서실은 3층이었지만 아버지의 크고 걸걸한 목소리가 독서실 전체 건물도 흔들어 놓을 판이었다. 급하게 가방을 다시 챙겼다. 동생 둘과 엄마까지 대동한 '허니 외박 금지 캠페인'에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쪽팔려~'



15kg 급찐'No'빠


중학교 2-3학년 때 이미 버린 입맛이었다. 사춘기들의 노는 세계를 경험한 내가 다시 공부하는 범생으로 돌아갈 계기를 얻어야 했다. 하교 후 만나던 친구들은 평준화된 광주시내 권 학교에서 모두 떨어졌다. 나와 다른 두 명 정도 더 합격했다. 기남이는 나를 화장실로 불렀다. 우리는 그 정도를 '모다구리'라고 불렀는데, 나 혼자서 모두구리와 대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남이는 나의 한쪽 뺨을 갈기면서 쏘아붙였다.


"너 좀 건방져졌어."


아무 댓 구를 하지 않았고 잠시 후에 모다구리는 흩어졌다. 나도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 그룹에서 제명당한 멤버가 된 상황이었다. 크나큰 상심이나 거절감이 아니라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동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재밌고 신기하기는 했지만 내면세계는 상당히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에 가질 수 있는 일탈을 알려준 작은 세계가 막을 내리나 싶었다.


고등학교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들은 이전에 아파트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처럼 비슷한 가정환경과 고만고만한 고민을 가졌던 친구들이었다. 옆 짝꿍과 싸워서 그걸로 쪽지를 10개 이상을 주고받는 고민, 성적의 등락에 따른 고민, 아침 등굣길에 자주 만나는 '버스맨'의 얼굴 표정에 대한 고민, 드라마 결말에 대한 시시콜콜한 고민 등을 나누는 친구들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이 친구들에게도 깊은 얘기, 특히 아버지나 가족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새로 만난 친구들이 편하고 좋았다. 죄책감을 느낄 일이 없었고 불안감도 사라져서였다.


하지만 되찾기 힘든 태도가 하나 있었다. 공부는 하기 싫었다. 엄마를 한 달간 설득했다. 예체능을 하는 친구들을 보니까, 본 수업만 마무리 짓고 22시까지 해야 하는 '야간자율학습'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예체능적인 기능을 키우는 각 자의 학원으로 이동했다.


평소 '춤'을 좋아했던 나는 고1이지만 그제야 '무용'을 시작하는 친구의 경우의 수를 확인했다. 나에게도 기회라 생각했다. 엄마가 소개해 준 '효소식품'으로 1달 정도 다이어트를 진지하게 병행했다. 초등학교 때 작품 하나 공연할 정도의 무용 경험은 있었다. 그때 현대 무용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선배 언니의 깡마른 '모델'같은 체격을 봤다.


현대무용을 하려면 몸의 모든 선이 그림처럼 보일 정도로 마른 게 좋다고 판단해서 무용시작 전에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은 '맛있는 분식이나 먹거리'였다. 이 기쁨만 끊은 게 아니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 시간마다 빈교실에서 이상한 맛만 나는 '효소 다이어트 식품'과 물을 1L씩 밥대신 마셨다. 그 식품 후기로 알려진 효과는 7~15kg 감량이었다. 나는 건강했던 탓에 한 달 노력에도 4kg 정도 감량되었다. '마름'의 체격 조건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이제 무용학원 등록 하는 일만 남았다. 그날 밤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아버지의 방으로 부르셨다.

무릎을 꿇었다.

고함 소리가 아파트 천정을 다 깨부술 것처럼 터져 나갔다.


"무용은 무슨 놈의 무용이야? 너는 장관이나 기업가가 되어야 해. 춤으로 무슨 성공을 하겠어? 절대 안 돼!"


우리의 대화의 모습은 항상 비슷했다. 아버지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하신 것뿐인데, 내 마음과 감정은 엉망진창 되었다. 분노, 화, 좌절과 낙담 등으로 망가진 마음을 무겁게 이고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거나 방에 머물면서 뭔가를 노려보았다. 겉으로 과묵하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밤이 지나고 나면 집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있던 밤부터 시작해 일주일 걸렸다. 매일마다 억척같이 먹어재꼈다. 1달간의 다이어트 기간 머릿속에 아른거리던 모든 음식목록을 다 먹어 치웠다. 양은 고스트코 대형 마트 판매 전략처럼 무조건 대량으로만 먹었다. 라면을 끓여도 혼자 4개 이상 먹어 치우고, 피자는 피자헛 최신 버전 피자 라지 사이즈를 시켜서, 한 자리에서 혼자 다 먹었다. 떡볶이나 다른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든 한 번 먹기 시작하면 혼자 3-4인분을 먹었다.


다리 양쪽이 코끼리 발처럼 변해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변해가는 나의 외모와 내면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이어트가 끝나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15kg 정도 체중이 증가했다. 기존의 교복을 아무리 여유롭게 늘려도 옷이 몸에 맞지 않았다. 교복을 다시 맞췄다. 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지켜보며 마음으로 아팠던 분은 엄마였다.


여기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으셨다. 공부하는데 마음을 붙잡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만 하셨다. 대입으로 수능과 본고사를 마치자마자, 엄마는 나를 '다이어트 센터'로 보내셨다. 다시 예전처럼 슬림한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물론 이미 음식이 주는 도파민에 중독되었던 나는 아주 약한 효과만 맛봤다.



인정받다


고등학교 축제가 다음날이었다. 새벽 6시에 등교를 시작해서 저녁 10시 넘어서 하교하는 학교를 우리끼리는 '감옥'이라고 불렀다. 그럴 법한 게 건물 1층이 공사 끝나고 철근이나 이런 게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물 구조였다. 뭐랄까 건축비 절감을 위해 인테리어는 전혀 신경안 쓴 건물 이미지였다. 공간이 주는 감성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학교 이사진의 배려 같았다. 진학률에 신경 쓰는 이사진의 동기도 있었다. 같은 재단에서 추진 중인 대학교 설립 및 대학교 안에 의대 승인을 위한 일환이라고 우리끼리는 얘기했다.


고등학생들은 공부와 진학에 대한 스트레스를 '욕', '비속어'를 이용하면서 푼다. 기성세대들에 대한 적개심을 말이라도 세게 하면서 쏟아내는 것이다. 각 학교마다 '사이코'라든지 '울트라 사이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선생님이 계신다. 내가 다닌 학교의 공공의 적은 다름 아닌 '교장선생님이 포함된 이사진'이었다.


이런 학교였지만 '학교 축제'가 있었고, 공연의 밤에는 한 학기 동안 준비한 많은 작품들을 보여주고 함께 관람했다. 연극 공연은 축제의 꽃과 같았다. 공연이 이뤄지기 전날 밤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또 불려 갔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약을 사 먹으려다 결국 아버지에게 들통이 났다.


"뭐라고 고2가 지금 연극을 했다는 거야? 연극? 다시는 안돼. 공연 전날이니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미리 알았다면 너는 절대 못했어. 알겠어?"


분노의 마음은 다시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괴로운 밤이었다.


공연장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셨지만 반갑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가나 싶었는데, 고급스러운 일식집으로 가셨다. 그때까지 '살아있는 생선이나 요리'는 '산 낙지'외에 먹지 않았다. 부모님의 취향 때문에 횟집은 자주 갔지만 내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음식은 '스키다시'라는 이름의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회를 먹고 나면 당연한 코스로 먹는 탕과 밥정도였다.


그날 간 곳은 굉장히 고급스럽고 좋은 식당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키다시 종류만도 다양했다. 연극하는 부분을 허락해 주려고 가신 것은 아니었다. 타인들 앞에서 '자랑'이 되거나 '리더'가 되는 모습은 좋으셨다 생각한다.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칭찬을 들어본 횟수가 많지 않다. 기억에 잊히지 않는 장소가 되었다.


"연극은 허락할 수 없다. 하지만 주인공으로 공연을 잘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니까 네가 어른스러워 보여서 이런 식당에 오자고 했다. 자 맛있게 먹자. 오늘 너무 잘하더라."


나의 반응은 늘 그렇듯 과묵이었다. 연극무대를 한 학기 동안 준비하면서 연기보다 힘든 부분은 정작 연기가 아니었다. 연극반 '리더'로서 선후배 관계를 한 팀워크로 만들어 가는 부분이었다. 모두 학업도 놓치면 안 되는 고 2와 고 1 학생들이었고 서로의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모든 멤버가 예민한 시기였다. 서로의 이기심을 공동체적 연합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연기'보다 몇 배 어려웠다. 연극 무대는 둘 째치고 학교에 출석하는 것조차 스트레스로 느껴져서 달아나고 싶었던 순간이 너무 많았다. 쉽지 않은 주인공과 리더의 자리를 준비는 실상 1년 6개월 정도라고 여긴다. 고1 내내 단역을 해내고 선배들의 리딩을 관찰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얻어지는 기회였다. 연극무대가 마쳐지고 공연에 대한 성취감과 끝나지 않는 감동으로 잠을 한숨도 잘 수 없었다.


20세가 넘어 성인이었지만 용기 있게 연극의 세계에 뛰어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연극에 대한 목마름으로 미련을 완전히 져버릴 수 없었다. 이틀간의 기억의 빛깔이 너무 강렬해서였을 것이다. 전혀 다른 빛깔의 이틀 밤이었으니까. 두려움과 분노를 주면서 상처로 물든 밤의 기억 하나를 어떤 빛으로 채워야 했을까? 다음날 일식 집에서, 인정에 목말랐던 나의 갈증을 처음으로 채워 주셨던 아버지의 두번 째 밤의 빛깔은 또 무엇일까?


연기 실력에 상관없이 '인정'에 목말랐기 때문에 그 뒤로도 연극이 그토록 고팠는지 모르겠다.

대학 입학을 하고 아버지와 공간적으로 멀리 살게 되었다. 서로가 원하는 대로 서울에 위치한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와 거리감을 갖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로 발생했던 잦은 병들이 거의 나았고 병원을 자주 찾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멀어지면 내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선택한다 해도 결론이 정해졌다고 짐작했다.


연극에 관련된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또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버지는 또 고함을 치고 나의 밤을 지새게 하면서 반대하셨다. 내가 더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알아가는 길로 생각되었다. 믿지도 않았고 존재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용서 (뱃사람)


강의를 듣는 한 집회였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인 줄 몰랐다. 강사님의 친 아버지는 배를 타시는 분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날 수가 많지 않았지만 뱃사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어렸던 자신을 가죽 혁대나 무기나 다름없는 몽둥이로 구타를 가했다. 이러한 폭행은 반복되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 알고 보니, 강사로 오신 분은 '아버지와 관계로부터 발생한 상처 치유'에 탁월하기로 정평난 분이었다.


강사님에게 자신의 운명은 고통스럽고 가혹했지만 그것만이 끝은 아니었다. 새로운 운명도 선물 받았다. '사랑의 신'을 만났고 체험했다. 강사님이 만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찾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세계 배후에 존재하는 영적 세계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통해 무법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찾아 누렸다. 자신만의 평안을 누리는 단계로 멈추지 않았고, 강사님과 비슷하게 아버지로부터 고통받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셨다. 함께 회복하는데 강사님 자신의 다음 운명을 헌신하셨다.


영적 원리를 풀자면 한 두 권의 책으로 부족하겠지만, 요약한다. 누구나 '과녁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로마서에 보면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구절에서 '죄'의 원어적 의미다. 완전하고 완벽하고 순전한 '의'의 기준이 '과녁'을 정통하는 것이라면, 그 의에서 1nm(= 0.000001mm)라도 벗어난 상태가 '죄'의 상태를 의미한다. 누가 이런 '의의 기준'에 완전히 일치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전제 자체가 이미 '죄'의 영향력아래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죄는 다만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기준에 따른 상대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적인 의미이며 인간 본질적인 의미다.


신앙 혹은 종교 여부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선한 양심'은 안다. 우리 자신의 과녁에서 벗어난 생각, 마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언행의 세심한 불완전성을 말이다. 낙담,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음란 등 모든 부정적인 욕망과 감정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 동시에 '선'의 영향력과 '선의 열매도 우리 삶에 넘친다. 두 힘은 인간에게 죽을 때까지 영향을 준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서 이 두 영역의 싸움을 하며 산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이 싸움터에서 '승리'하는 전술이나 지혜를 통해 좋은 방향으로 선택해 가려는 움직임이다. 다양한 종교, 선인들의 철학을 통해 이 끝없는 싸움과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지혜'라는 덕목으로 전해준다.


강사님도 지혜자의 한 분으로서 자신의 소명적 역할을 충성되게 전해주셨다. 아버지로부터 가혹하게 폭행을 당한 아들이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사회법에 저촉되어 명예가 훼손되는가? 혹여, 잔인한 아버지를 용서한다면 생산성이 생겨서 금전적 유익이 생기는가? 근본적으로 영혼과 마음의 문제다.


용서하기 어렵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의 선택은 본인만 확인 가능하다. 용서하기 싫다면, 어떻게 해서든 계속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한다 해도 타인은 모른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속에 갇혀 버리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다. 바로 피해자다. 용서의 선택을 차단함으로 어두운 영향력 안에 갇혀 살게 된다. 왜 그래야 하는지 원통할 노릇이지만 겪어본 사람은 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뿌리가 '가해자는 범법자이고 피해를 당한 자신은 의롭고 선한 사람이다'라는 전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자신의 마음에 교만을 양산한다. 상대보다 자신이 백 배 천 배 '의인'이라고 오해하게 만든다. 이 잘못된 '의'는 다만 용서라는 선택만 안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의 삶에 끝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묘하게 '가해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자신을 발견한다거나, 반대로 '가해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게 만든다. '의'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닮은 모습만큼은 자신의 삶에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의 기준을 강력히 세우는 상황과 같다. 용서도 못하는 사람을 누가 닮고 싶겠는가? 만약 닮아간다면, 제2, 제3의 또 다른 이웃이 과거에 용서 못하는 자아의 입장이 될 것을 아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과 똑같이 증오하고 미워하고 저주의 선택을 지속할 것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인 것이다.


본인이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는데 확신하지 않겠는가? 결국, 자신의 미미한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게 된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자신이 세운 의의 기준에서 실수 수준으로 벗어나는 것조차 과거의 가해자(아버지)만큼 증오받을 사람이 자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므로 용납은 어려워진다. 동시에 스스로가 이런 상황이나 가능성이 열리는 관계와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피하거나 관계를 끝내게 만든다.


용서하기 힘들만한 문제니까 용서를 안 하는 것일 뿐인데,

그 선택만으로도 당사자가 겪는 부정적 영향력은 크다.

결국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선택이다.

완전한 평안과 성숙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용서는 피해자로서 무언가 '고행'적인 수행을 더 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영혼을 결박해 버린 고통의 문제로부터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켜 주는 결단이다. 타인을 향한 용서의 끝자락이 '자신을 용서'하는 원점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 원리는 신비하다. 직면하는 대상은 결국 타인이 아닌 자신의 영혼이다. 이러한 여정이 시작은 힘들 수 있지만 '자유'를 위한 아름다운 해방으로 생각하면 훨씬 쉽고 의미 있는 항해가 된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를 통해 온 우주의 어떤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영적으로 체험했다. 나와 아버지 관계를 뛰어넘는 신과 신의 아들의 관계를 믿으면서 나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


참석했던 그 집회를 통해 전해 들었던 강사님의 '사랑'의 힘 또한 아름답고 강했다. 강의가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는 소리가 들렸다. 끝나갈 무렵에는 3천 명이 넘게 참석하는 공간 여기저기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또한 "꺼이꺼이" 통곡하며 울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흘렀다.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포르기네이


집회는 마쳤다. 뭔가 시원했지만 동시에 기분은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얼굴만 엉망이 된 상태가 아니었다. 영혼 안에서 어떤 거대한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인식으로 인해 습관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다음 이촌역에서 내렸고 지하철에도 올라 탔다. 집 근처 역에 도착하는 과정동안 넋이 나간 사람같았다. 개찰구에서 패스를 찍고 지하철 입구 근처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마음 안에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고 갑자기 화가 났다.


'아니 강사인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건가? 왜 20년 넘게 꼭꼭 감춰둔 내 문제를 다 파헤쳐 버린 거야? 나 혼자 어떻게 이걸 감당하면서 해결해 가라는 거야? 본인께서 더 큰 고통을 겪었으니까 그게 나에게 이제 무슨 힘을 주는데.. 결국 이렇게 혼자 남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뉴기니 섬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냄새 고약한 생명체였다. 포르기네이라 불리는 식인식물 한 무더기가 마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를 완전하게 드러내는 이미지였다. 영혼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영혼의 문제는 드러나는 순간은 당황스럽고 괴롭다. 하지만 빛이 비춰진 이상 어둠은 사라진다.


20대 초에 시작한 마음의 빛의 정원을 가꾸는 여정은 신의 선물이었고 축복이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여정도 아니었다. 칼이 칼을 날카롭게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나의 회복을 위해, 아버지와 닮은 리더들에게 순종하는 훈련을 했다. 10여년 정도 지속된 훈련이었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라는 순종을 배우는 시간과 다른 점은 뚜렷했다. 그때는 겉으로 드러난 몸의 자세로 마음에서 키워가는 거대한 반항심과 부정적인 감정을 감추는 것일 뿐이었다. 반면, 회복의 과정 속에서 배워가는 자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만큼의 '순종'을 실현하는 시간이었다.   



없었던 단어


성인이 되면서 나의 음식 취향은 많이 바뀌었다. 음식 취향처럼 새로 배운 단어의 맛도 있다. '사랑한다'라는 단어인데, 이와 유사한 변화형 단어들도 20대 이후에서야 알아갔다. 성장기동안 집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나 엄마도 인생동안 들어보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니 자녀에게 표현할 수 없으셨다. 그 언어를 성경을 통해 배우고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이었다.


'나를 언제 봤다고? 너무 닭살 아냐?'


사랑을 이길 만한 힘이 이 세상에 있을까? 나 또한 사랑에 마음을 빼앗겼고 '사랑한다'는 말이 사용된 노래를 진심으로 불렀다. 사용하는 것 또한 쉬워졌다. 바로 가족들이 생각났고 나처럼 이 세상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전하고 엄마에게도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 전화기 너머로 이 음성을 전해 드렸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아빠 사랑해요."

"응 알았다."


전화는 간단히 끊겼다. 바로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내가 용돈이 떨어져서 안 하던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셨다. 지금은 엄마께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 하신다. 아버지는 여전히 "응 그래"로 마무리하시지만.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집에 들어가기 싫었지만,

그 덕분에 여행과 모험을 항상 동경할 수 있었다.

동경하는 마음이 쌓여, 20대 시절은 세상 많은 곳을 '집'으로 여기며 여행할 수 있었다.

아버지덕분에 나는 넓은 세상을 '집'처럼 지내는 자유로움을 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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