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 덕분이었다
'집으로 가자. 아파트 5층이니까. 가능할 거야.'
내 방에서 창문을 열었다.
'앞 베란다, 큰 방 혹은 작은 방은 적당하지 않아.'
창문밖 환경을 살폈다. 투신한다면 머리가 부딪힐 바닥을 바라봤다. 보이는 바닥 공간은 큰 방과 거실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공동 정원'의 반대편이었다. 서로 차이가 났다. 몸을 내던진다면 부딪힐 바닥이 거칠어 보였다.
'바닥이 차가워 보이네.'
흙, 돌, 잡초 몇 포기만 존재하는 건조한 바닥을 응시했다.
생각을 이어갔다.
'저 바닥에 부딪히면 머리통이 깨지겠지. 아플 테고. 투신자살은 떨어지는 과정에서 쇼크사로 먼저 죽는다고 했는데... 5층 높이는 너무 짧지 않나?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텐데. 이왕 시도하는 거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데.'
바닥에 박힌 돌에 부딪히는 장면까지 생각이 뻗어 가고 나서야, 창문을 닫았다.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생각도 한 가지 이유였다.
마치 '꿈'이나 '목표'를 이루고자 생각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내가 선택하고픈 죽음'에 대해 골몰히 생각한 지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다음 목표이자 꿈이었으니까. 자살을 꿈꾸는 사람도 알고 보면 행복해지고 싶어서 죽음을 선택한다. 자살 직전의 환자들에게 매일의 삶은 유지하기 힘든 외롭고 고달픈 시간일테니까. (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음과 정신이 건강할 시기에는 자살따위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아침마다 생각한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졌는데, 삶이 무거운 짐과 같다고 말이다.
나도 환자였다. 그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 했고, 깨어났으니, 걸어야 했고, 먹어야 했으며, 살아내야 했다. 살기 위한 선택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데 자연의 법칙은 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생명'을 의무처럼 부여했다. 지칠 때로 지치고 한 가닥의 의지조차 없는 영혼에게 삶은 권태롭고 의미 없는 저주와도 같았다. 우울증은 중병이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인생의 Stop버튼을 스스로 누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다다르는 병.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다.
침묵하고 있지만 나의 영혼은 끊임없이 '꿈'이 될 수 없는 '어두운 생각'을 갈망했다.
'약국마다 다니면서 수면제라는 약을 모으자. 한꺼번에 먹는 방법 어때?'
'모으는 게 생각대로 되겠어? 약을 한 움큼 집어 먹긴 했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병원에 실려가겠지. 내가 모르는 의료진들이 내 몸의 내장 기관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들을 제거할테고. 급하게 위벽을 씻어 낸다고 법석일거야. 의사가 나의 알 몸을 볼 테고, 나는 마네킹처럼 점검당하는 상황이 생기는 거지. 다음은... 가족들과 많은 지인들에게 이 소식이 삽시간에 소문으로 퍼질테고.'
병원에 실려간 이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실패했을 경우, 119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는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결국, 완전한 방법은 아니었다.
'바다로 갈까? 한 걸음 한 걸음씩 바다를 향해 깊숙이 들어가는 거야. 물이 내 머리 위를 채울 때까지. 물은 굉장히 차가울 테고. 이렇게 생각이 많은 내가 들어가는 내내 온갖 생각을 하겠지. 걸음마다 결단의 느낌표도 수없이 반복해야 하겠네. 다시 땅으로 되돌아 나가고 싶다는 낯선 생명욕구가 번민처럼 일어날텐데. 아이러니같은 생기를 단호히 외면해야 하고. 그 다음, 차가운 물속 공포는 어떻게 이겨낼 건데?'
생각은 다른 전개로 다시 빠져들었다.
'허리까지 물속에 잠기고, 가슴이 덮이고, 목까지 어두운 것들이 차오르는데, 그 순간,
누군가 나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소리를 지를 테고. 요동하지 않는 내 모습에 쫓아 달려와 나를 때리거나 어떻게 해서든 건져내려 할 거야. 이것도 실패할 확률이 있어.'
'목을 매다는 건?'
'총...?'
어두운 생각이 밀물의 파도처럼 내 영혼에게로 한 없이 들어올 시간이면, 누구라도 붙들고 헛소리라도 뱉었어야 했다. 밥 잘 챙겨 먹거나, 종종 소리 내어 웃는 사람, 혹은 눈치 하나 없이 해맑은 사람을 만나 내 생각을 주저리라도 널어놓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더욱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뱀이 또아리를 틀듯 어우운 생각이 내 영혼 안에서 또아리 틀도록 내버려 두었다. 계속 나를 조여가는데 나는 생각으로만 조용히 응시하고 대응했다.
나의 일관된 침묵때문에 '어두운 힘'은 나를 거의 점령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곧 내 숨구멍마저 틀어막을 기세였다. 반면, 나의 이성과 선한 양심은 여러 가지 불행한 감정으로 나에게 알람을 주었다. 고장 난 마음은 새벽도 아닌데 알람을 자꾸 꺼버렸다. 마음이 건강할 때는 '회복의 동굴'이나 다름없던 나만의 '사유의 공간'이 '무덤'으로 변해 갔다. 탈출할 힘은 없어 보였다.
'사유'하는 나무의 뿌리, 그 일부가 위급한 시간에 썩지 않고 '선한 양심'으로 나를 지탱해 주었다.
외부로부터 뻗어 오는 '구원'의 힘이 간절한 시간이었다.
인지는 했지만 많은 뿌리가 썩어 버린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대한 바람은 없었다.
인지한 영혼은 해가 비치는 시간에는 가끔 무언(無言)으로 외쳤다.
무언의 외침을 우주만큼 광대한 공간에서 듣고 다가와 준 것 같다.
온 우주를 채우는 일반적 은총, 대자연과도 같은 사랑의 힘이 나를 인도하는 기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학 입학 이후 부족한 건 없어 보였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녀를 처음으로 타지에 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업과 부동산은 계속 성장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 내 지갑은 항상 넉넉했다.
그렇다고 90년대에 압구정에서 놀던 '오렌지족'처럼 외제차를 끌고 다니고 양주를 마시며 유흥과 유행을 즐기지는 않았다. 개인 용돈으로 나 혼자 편하게 쓰면서, 친구들의 밥이나 선물정도는 마음껏 사줄 수 있는 넉넉함이었다. 매 끼 식사를 하숙집에서 먹으면 식비는 따로 쓰지 않아도 된다. 알지만, 나는 하숙집 밥을 자주 먹지 않았다.
아버지 취향으로 선택하신 아버지의 하숙집이었다. 학교 주변 집들이 깔끔한 편인데 학교에서 20분 걸어가야 하는 곳으로 굳이 결정하셨다. 걸어서 시장도 지나야 찾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 결정에 대해 내 의사따위는 묻지 않으셨다. 나는 2년 동안 정해진대로 그냥 살았다. 그 하숙집은 근현대사 소설 '삼대'의 배경 같았다. 여학생들만 6명 정도 하숙집에 머물렀고, 주인 집 가족 구성원은 3대를 이룬 대가족이었다. 안채와 조그만 마당을 공유한 바깥채로 방이 두 개 있는 집구조였기에,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게 가능했다.
아버지가 선택하셨던 이유는 나를 위한 아버지의 바람이었다. 나의 실제 대학 생활 습관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밥을 잘 챙겨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때문에, 2년 동안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애정을 표현하려는 의도였지만 나는 검사관의 간섭으로 들렸다.
"허니 학생, 밥 먹어야지?"
"허니 학생, 아침은 꼭 챙겨 먹어야 해."
* 매일 반복!
성장기동안 내가 익숙했던 아버지의 잔소리는 마치 분기별 행사처럼 다가왔다. 백화점 파격 세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의 목청을 지나 장마철 장대비처럼 굵직하고 급하게 쏟아졌던 고함소리! 요란한 소리이기는 했지만 횟수가 간헐적이었다. 견딜만했다. 길어야 2시간 정도니까, 일 년으로 계산하면 5~8시간 정도인 셈이다. 잘 참고 나면, 그 뒤를 따라 용돈 수입이 주어졌다. 섭섭치 않게 챙겨 주셨다.
'No Cross! No Crown!'
엄마의 잔소리는 '기우(杞憂)'에 가까웠다. 그래서 소소했다. 횟수가 <전원일기> 같은 일일드라마인 데다 그 드라마 속 대사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잔소리에 비해 나의 행동은 큼지막하거나 엉뚱한 소제들이 많았다. 어린 내가 생각해도 엄마의 인내가 바다만큼 크셨다. 그래서였을까?
성장기동안 '식사를 하고 안 하고'에 관해서는 집에서는 잔소리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감사도 모르고 먹었던 집밥이 하숙집 밥으로 대체되었다.
하숙집 밥을 틀림없이 챙겨 먹던 동기, 희연이나 간혹 몇 수저 뜨는 나나 유사한 생각을 가졌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각 자의 방식대로 매 끼니를 챙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항상 허기졌다.
누군가의 선의로 '집밥'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언제 올지 모를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이상의 고봉밥을 먹거나, 한 그릇을 더 먹었다. 반찬은? 된장국이나 김치찌개면 충분했다. 집에서 직접 담근 김치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집밥에 있어서는 무엇을 먹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집에서 만들었다는 사실과 만든 이의 마음이 중요했다.
2-3년 동안 집밥대신, <떡볶이>와 분식류, <버터&밀가루&설탕>이 주인 빵류 그리고 <술>과 안주류로 생존했다? 강철도 씹어 먹는 20대라지만 신체뿐 아니라 마음도 허기가 지는 게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