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했다, 고로 존재했다 2
마음의 병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걸까?
나는 정체성이 문제였다. 다음은 신뢰의 문제였다. 정체성의 문제는 인권 문제나 인종 차별처럼 외부의 압력이나 무력에 의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출발했고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원인이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인생 목적 한 가지를 전심으로 추구하며 산다. '대학 입학 성과'라는 주제를 12년 이상 좇는다. 대학생의 자격을 취득한 우리는 12년을 마침내 졸업한다. '높은 학교'에서 출가했다가, 다시 '더 큰 학교'로 보내진다.
신입생의 대다수는 갓 스무 살이었다. 19년간 살아온 흔적은 분명한데, 좇아야 했던 인생 과업이 뚜렷하다 보니, <자신의 존재 의미와 정체성>을 찾을 여유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인간 본질>에 대한 사유가 빈약한 상태로 스무 살이 되었다. 외부적으로 성인의 책임을 요구받으면서 동시에 권리도 누리는 시기에 무작정 도착해 버렸다.
여름이 끝나면 가을을 맞이하는 것처럼 <인생 버스>가 데려다준 <성인의 정류장>에 도착했다. 가파른 비탈을 간신히 넘어온 느낌이 들었던 나는 도착 지점에 다다랐다는 알람이 반가웠다. 살포시 내렸지만 묵직한 이삿짐과는 달리 <목적의식>은 텅 비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떠난 이상 학교에서 치르는 어떠한 시험 종류에 대해서도 더 이상 고군분투할 마음이 없었다.
만약 대학교에 정체성에 관한 수업과 시험이 있었다면 나의 방황은 훨씬 가벼워졌을까?
살아보니, 대입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던데 말이다.
실상, 자아에 대한 정체성은 미지의 영역이었고 미개척된 대지와도 같았다. 59명의 남학생이나 1명의 여학우나 비슷한 출발선에 서 있었을 테고 모두에게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개인의 소양 문제 이긴 하나, 동시에 전혀 개인적인 문제일 수 없었다.
자아의 발견은 개인적이지만 또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이다. 남과 여라는 성별적인 조건이 영향을 줄 변수로써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핵심적인 영향 요소일까? 21세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계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한국 사회에서 말이다. 이런 큰 그림 속에서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거시적인 시야가 아닌 미시적인 시야에만 갇혀 자신을 작게 생각했다.
짧은 시간대 영역에 매몰되었고, 작은 집단에서 나를 타인들과 비교했다. 공과대학이라는 한 작은 집단에서 대략 1~2 년 정도의 시간을 넓은 시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오직 결핍에만 집중했다. 나의 노력으로 바꾸기 어려운 성별적 의미, 그로 인해 형성된 숫적 약세의 상황만 확대 해석했다. 심지어 불운한 조건이자 열악한 요인으로 느꼈다.
결국, 나를 드러내지 않는 말과 태도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파충류, 양서류와 갑각류 중 일부는 자신의 체색을 환경과 유사하게 바꾸면서 생존력을 높인다. 그것들처럼 노력했다. 나 자신을 최대한 감추는 것이 생존력을 최고로 높이는 방법이라 오산해 버렸다. 숫적으로 더 높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우월한 조건이고 그러므로 나는 우월한 환경적 조건에 무조건 나를 맞추는 게 옳다 여겼다. 표현할만한 자아상의 크기가 작아지자, 말수도 줄어들었다.
점점 투명인간처럼 행동했다. 실체로서 존재하는데 동시에 투명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노력은 이상하게 보였고 오히려 나를 튀게 만들었다. 학과 교수님과 동기들이 걱정하는 사건을 잊을만하면 다시 만들었다. 나타나야 할 시간에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그들의 걱정이 지칠 즈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타나곤 했다.
투명인간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 없는 시간 속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면 외로웠지만 적어도 진실할 수 있었다. 진심이 담긴 욕구에 대해, 있는 그대로 꺼내 보는 시간은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는 시간, 교정을 혼자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 빈도수가 적긴 했지만, 기호품을 '몰래' 소비하는 시간이었다. 니코틴이 포함된 마른 이파리가 타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타들어 가는 것이 만들어 내는 연기를 뿜어 내는 장면은 멋있었다. 희뿌연 연기를 긴 호흡으로 들이키는 시간이 되어야 비로소 내 속 것들도 연기처럼 유유히 드러났다. 동시에 금방 잊혔다. 이 점도 참 좋았다.
중학교 시절 기남*이와 어울리면서 그 무리의 친구들로부터 보고 배웠던 기술이었다. 친구들에 비해 왕초보였고, '콜록콜록' 헛기침이나 뱉어대던 나였다. 나의 미숙한 기술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성년이 되어 버렸지만 마음이 지치고 우울해 지자, 잊고 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상념만큼 묘연한 연기 나는 그것이.
입학을 하고 나면 인생의 모든 퍼즐을 완성하는 거라 기대했는데, 오히려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연기를 들이켜자마자 체감했다. 마음의 건강과 더불어 육체의 건강도 꽤 나빠져 있었다. 그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한 모금 깊이 들이켰다. 들 숨과 날 숨으로 조율하며 연기 자욱한 긴 호흡을 45초 정도 반복했다.
즉시 그 자리에 쓰러졌고 나는 잠이 들었다. 스르륵 빠져드는 수면 상태는 얄팍한 위안과도 같았다. 잠을 자는 동안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을 삼키지 않아도 되었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방치하는 일도 멈추었다. 롤러코스터처럼 극단적인 사고의 변이를 2년 반정도 겪고 있었다. 이런 나 자신을 바라보며 비관하는 생각도 환각에 취해 잠이 든 동안은 아무렇지 않았다.
말이 없고 마음이 부정적인 사람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치우쳐 살 때, 그의 자아는 둘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져서 복잡한 갈등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육체는 하나뿐인데 갈라진 자아들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처럼 등장해 끝도 없이 대화를 계속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마쳐지고 큰 감동을 받았던 나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는 사무엘 바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극의 두 인물이자 주인공들이다.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그 끝없는 기다림 속에 나타난 인간존재의 부조리성을 보여주는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부조리극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가 2차 대전 당시 겪은 피신 생활의 경험이 밑바탕된 것으로, 그가 남프랑스의 보클루즈에서 숨어 살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보편적인 기다림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작품에서 ‘고도’라는 인물은 끝내 등장하지 않고 단지 소년 전령을 통해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전갈만 보낼 뿐이다.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베케트조차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따라서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관객들 사이에 끊이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으며, 다양한 대답들이 제시된다. 그중에서도 고도(Godot)라는 이름이 영어의 God와 프랑스어의 Dieu를 하나로 압축한 합성어의 약자라는 해석도 있으나, 고도에 대한 정의는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아일랜드문학, 2013. 11., 강선자, 이동일, 위키미디어 커먼즈)
쓰러져 번민 없이 잠든 경험 이후, 일시적인 도피라는 걸 알았지만 “몰래”라는 상황을 가끔 만들었다. 긴 호흡 속에 니코틴을 태워 섞은 뒤 몸 안으로 집어넣는 행위는 최후의 묘책이자 처방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와일드>라는 에세이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도 방황 중에 담배보다 강도 높은 물질에 중독되었다. 셰릴이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과거 선택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결단코! 어떤 중독이던 중독은 사람을 망친다.
사람의 정신과 삶은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다만, 적어도 나는 사랑에 결핍된 사람들이 중독적인 무언가로 자신을 대신 채우며, 중독에 빠져드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며 손가락질할 권리는 없어졌다. 부끄럽게 만들게 된 겸손의 인장 위에 당찬 희망도 새길 수 있었다. 사람은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원치도 않는 경험을 하게 되면 당황스럽고 슬프고 괴롭다. 그에 반해, 까슬한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보상 또한 진주처럼 나타난다. 나의 경험의 진주는 중독자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empathy)이었다. 마음이 겸손한 순간에 우리는 가볍고 자유롭다.
운 좋게도 7~8개월 이후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났다. 마음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끊어버린 중독제가 예쁜 케이스에 숨겨둔 니코틴 함유제였다. 환각적 도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몰래‘라는 비밀의 상황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 과정자체가 나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매우 불편했고 귀찮았다. 그러자 '세상에서 이런 불쾌한 맛이 없거니와 매캐한 연기 냄새는 싫어졌다.' 그것과 멀어지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중독 물질이든 중독된 관계든지 싫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과 멀어지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악연의 길이와 깊이'때문이다.
나의 연은 비교적 짧았다.
이 점은 다행이었다.
대학 입학 이후 2년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관계와 소속감을 위해 이 시기만큼 노력한 시간은 없었다. 술자리가 싫어질 지경에 이를 만큼 술자리에 빠지지 않고 착석했다. 이유는? 90년대 영업 사원이 회사 실적을 올리기 위해 술자리를 자주 갖는 것과 비슷한 심리였다. 술자리 외에도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으로 관계에 대한 논문을 썼더라면 박사자격증이라도 남았을 텐데 논문대신 비슷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한 2년 덕분에 관계가 적당히 형성된 것 같았다. 그 뒤로 공부에 집중하고 유학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자 생각했다. 그런데 국가가 나의 동기들을 불렀다. '아뿔싸~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하고 적응하려고 애을 애를 썼을까?' 생각도 못한 변수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껏 2년 정도 해왔던 그 짓을 다시 2년 더 해야 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복학생들이 우르르 새롭게 들어올 테니 말이다. 우울증상이 급격히 높아졌다. 2년간의 나의 노력은 허공에 '삽질'이나 다름없었다.
대학교 3학년 이후로는 허사가 될 노력 따위는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누구와의 관계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바로 칠판 앞에 앉았다. 무조건 칠판만 보았고, 그때부터는 나외에 모든 사람들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오직 교수님과 나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설정했다. '학과 공부'하는데만 신경 쓰기로 했다.
나는 마음을 닫았는데, 오빠들이 자신들의 입학 시절의 여자 동기 1명을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다가왔다. 나보다 3년 먼저 입학한 오빠들은 선배들이었다. 오빠들의 학번도 구성이 우리 학번과 똑같았다. 59:1의 성비였는데, 그들도 군대 가기 전에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라고 했다. 내가 매일 칠판만 보고 강의실에서 그 누구와 한마디 말도 섞지 않으면서, 혼자만 있으려 하자, 더 마음이 쓰였다고.
다른 하나의 결정은 '술'을 끊었다. 붕어처럼 '물'을 마셨고, 물병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물을 마셨다. 관계가 부드러워 지자 오빠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 참석했지만,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 테이블에서도 나만 혼자 물을 들이켰다. 영업사원으로서의 직무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오빠들의 태도는 나의 외종사촌오빠들 같았다. 나에게는 외숙모와 외삼촌이 계시는데, 두 분에게는 딸이 한 명도 없었다. 아들만 4명이었고, 모두 나의 오빠였다. 외할머니집에 자주 내려가는 이유로 외숙모 집에서도 여러 날 머물렀는데, 오빠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기억했다.
자꾸 본인들이 나를 키웠다면서, 내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대로 본인들이 장단을 맞춰 행했다고 했다. 업어주고, 인간 말이 되어서 나를 등에 태워주고, 물 떠 오라고 하면 떠다 먹여 주고, 방바닥에 발바닥을 닿기라도 하면 울어대니까, 어떻게 해서든 공중에 머물게 해 줬다면서 말이다. 한 마디로 외숙모와 외삼촌 집은 '허니 왕국'이었고 4명의 오빠들은 나의 기사들이었다.
복학생 오빠들도 그렇게 나를 챙겨줬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우울증은 더 깊어질 뿐이었다.
나의 룸메이트에게조차 '섭식장애' 증상을 숨겨야 했다.
우울한 마음의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 바다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고, 괴롭고, 다시 기쁘고, 뭔가 이룬 것 같지만 다시 힘들어지고 이런 고락을 반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결국 죽는다. 사람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결론이었다.
"왜 사람들은 이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존재하고 있고, 존재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나?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슬프고 괴로운 시간을 왜 견뎌야 해?
영원한 게 없어.
결국은 죽을 거고, 죽고 난 이후의 정말 '무(無)'라면,
나는 오히려 인생의 길이를 단축하겠어.
인생의 희로애락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어."
철학책을 읽었지만, 실용가능한 '인생의 의미'는 찾지 못했다.
사실 여러 번 편지를 썼었다. 부모님께.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특히 엄마에게로. 내가 아버지의 포악한 언어폭력에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은 엄마였다.
외부에서 맘씨 좋은 친구, 어떤 식으로든 똑순이(부모님의 지인들은 나를 이렇게 부르셨다) 노릇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엄마는 세상 유일하게 민낯으로 대하는 분이었다.
아버지의 본성과 후천적 대응 덕분에 이기적이고 나쁜 성격이 나에게도 있었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엄마만 알고 있었다.
서울에 살면서 스무 살도 넘기고 매일 엄마에게 하소연을 할 수는 없었다.
혼자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보내지 못한 편지는 내 서랍에 쌓여만 갔다.
부모님 생각을 하니, 생산성과 성과가 떨어진 대학생으로 사는 내가 미워졌다.
내 모습이 실패 같았다.
무르고 병든 자아는 나를 '잉여 인간'처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신뢰의 문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아는 사람은 너무 많다. 읽은 사람도 꽤 된다. 나 또한 몇 줄의 서평을 노트에 남겨 놨다. 내용은,
'마이클 샌덜 교수는 정의(Justice)에 대한 자신만의 서술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를 깨트리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명백한 진리 혹은 수학 방정식처럼 일관되게 적용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과 근거 있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알려 주었다. 이를 통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정의라는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면서도 오만적인 집착을 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으로 '정의'를 재조명하길 바라면서 변증법적 사고의 전환을 통해 진정한 인류애로서의 '정의'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는 사회와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남겼다'라고 생각한다.
요약하자면, '마이클 샌덜교수님' 학생들과 세상에게 '정의가 과연 존재할까? 있다면 정의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을 유지한 상태로 책을 마쳤다.
신뢰의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도 유사한 전이과정을 보였다. 무엇보다 실존에 대한 여부부터 의심스러웠다. 이 주제는 '사랑'이었다.
고전으로 불리는 문학 소설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읽었다. 유소년기의 나에게는 일부 고전은 작품이라기보다 '공포소설'처럼 두려움을 주었다. 기 드 모파상의 작품 <여자의 일생>과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같은 소설이 '(청소년을 위한) 고전 문학 전집'에 올곧게 꽂혀 있었다. 그래서 읽었는데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이 책들이 고전으로써의 역할을 해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그 책들로부터 얻었던 잔상이 내 사상 속에 뿌리 깊게 남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 생활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는데, 난이도가 높은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접해 버렸다. 내 생각에는 그 이야기들이 사랑이라기보다 당황스러운 미스터리였다. 사실, 충격받았다. 어떤 사건이 '충격 모드'로 저장된다? 거기다 그 사건이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면, 기억의 힘이 어떨까? 잊히기 힘든 법이다.
<21세기의 문명인들에게 고전 문학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일까?> 위의 예와 유사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 특별히 '어린이와 청소년층 독자 대상'에게도 고전 문학만이 공헌할 수 있는 순 기능이 올바로 작동하고 있을까?
다음, 소설보다 실제적이면서 집요하게 영향을 주었던 관계는 부모님의 부부관계다. 아버지가 23살, 어머니는 22살에 결혼하셨다. 아무래도 부부로서의 삶에 실수가 많을 나이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다음 해 엄마의 나이 23살이 되었을 때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첫 딸인 내가 두 분의 관계를 바라보는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말이다.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고 거칠었던 두려움은 점점 정교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에게만큼은 '비혼주의자'가 될 거라고 주장하는 어린이였다. '비혼주의'라는 고급진 단어는 최근 15년 이래 유행한 단어니까. 당시의 나의 표현이다.
"나는 결혼하지 않고 남자 친구만 사귀면서 살 거야. 그런 게 맞는 것 같아. 내 스타일이야."라고 말했다. 가끔 이렇게 표현했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 왜 해야 할까? 그런데 한국에서 결혼 안 하고 사는 건 더 힘들 거 같아. 사회의 지탄적인 시선과 수군대는 말이 많아질 테니까. 결혼하는 척만 하는 거야. 그 남자와 법적 결혼만 하는 거고. 그 후에 각자 원하는 대로 사는 거야." 위장결혼이라는 단어도 최근 15년 안에 생성된 단어이지 않을까?
그래서였겠지 싶다. 엄마와 아빠는 날마다 12번씩(하늘의 완전 수) 일간지 출간하듯이 싸웠다. 대부분의 소제도 '돈'이었다. 사유 재산은 계속 늘어 가는데 '돈'이 화제가 되어 싸움을 하는 건 나와 동생들의 싸움과 다를 바 없었다. 동생들과 나의 논쟁 거리는 TV 채널 한 시간 동안 장악한 후 '본인이 원하는 프로를 보는 것'이거나 귤 한 박스 또는 투게더 아이스크림 큰 한 통을 '누가 더 많이 먹나?'였다. 이건 우리에게 사활이라도 걸린 중요한 이슈였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위대한 게임이었다.
작가 폴 오스터도 비슷한 부모님 아래서 성장했던 모양이었다. 오스터의 부모님을 향한 마음은 <빵 굽는 타자기>에서 일부 거론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두 분의 불안정하고 단순하지 않은(Complicated) 관계의 문제는 '돈'이 주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자녀인 나와 동생들이 보기에 두 분은 문제가 있긴 있었는데 막상 뾰족한 이유가 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두 분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책에서 저자 존 그레이의 해명을 사춘기 시절부터 읽었더라면 결혼관이 상당히 바뀌었을 것이다.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최초로 발견하고 체험한 부부의 영향력은 자녀 입장에서는, 이 세상 모든 부부의 대표나 다름없다. 부모님의 모습이 전부일 시기니까.
특히 미국 드라마의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관계와 가족 드라마가 한국의 공영 방송의 일정 시간대를 반드시 차지하고 방영되던 시기였다. 내가 미국에 가서 살고 싶었던 이유는 드라마에서 비친 미국의 가정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렇게 행복하고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따스한 가족 공동체는 미국이라서 가능하다고 오해했다.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생각과 달리 미래의 사윗감에 대해 현실적인 조언을 주셨다. 딸에게 생겼을 비혼에 대한 동경과 믿음에 대해서는 예측불가했을 테니까.
"허니 너는 착하지는 않아. (착하지 않다는 비교 대상은 항상 동생들이었다. 엄마 생각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절대 참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하는 자녀였다. 내성적인 엄마에 비해 아빠 성격을 닮았다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자기표현이 확실하고, 엄마로서 다루기는 힘든 아이였겠지만, 반면 든든해하셨다. 엄마를 닮지 않아서 오히려 나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크셨다.) 고생은 안 하고 살아야 하니까. 경제적 형편은 우리 집보다 조금 못해도 돼. 너무 가난하면 안 되고. 대기업이나 공무원 이런 거면 좋겠다. 의사도 안돼. 최소 열쇠 5개는 준비해야 한대. 그러고도 결혼 후에 사네 못 사네하면서 시댁에서 며느리 구박하고. 에고~ 안돼. 너는 그런 거 못 참아. 네 성격 다 받아주고 잘 참아주는 아주 착한 남자를 만나야 해."
또 다른 조언이었다. 엄마 친구들은 내가 그분들 앞에 등장하기만 하면 동일한 예언을 반복해서 하셨다.
"에고 우리 부잣집 맏며느리감 오셨네~"
"아니 우리 허니는 얼굴이 딱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야. 피부가 왜 이리 좋아? 복스럽다니까."
유산 상속자 며느리가 되어 인생 끝날까지 돈걱정 없이 살라는 의미였는지 몰랐다. 엄마와 아버지 세대분들 특히 우리 부모님은 자라는 동안 가난하셨기 때문인지 '행복'의 키워드를 '돈'으로 연결 짓는 습성이 있으셨다. 집안재정이 넉넉해지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는 거라 생각하셨다.
아버지의 세대와는 달리 우리 세대의 생각은 다양해지고 있었다. 나의 생각도 부모님과 달랐다. 아버지의 지갑의 돈이 내 지갑으로 옮겨 들어오기까지 참아야 하고 복종해야 하는 일은 너무 많았다. 어떠한 특혜라 할지라도 뒤 따라오는 대가지불이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이 가능할까?' 이 고민이 가장 컸다.
마치, 거위나 닭이라고 주입받으며 살아왔기에 날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백조 같았다. 날개 짓은 시도할 생각조차 못한 상황에서 동경하는 세상, 창공을 멍하게 바라보는 거위라고 생각하는 백조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몰라 지독한 답답함을 느꼈던 날지 못하는 조류는 날아다니는 백조를 자주 부러워했다. 시기하거나 질투할 때도 많았다.
아버지가 한 풀이하시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나 자랑하는 '아버지 세대의 고생'을 몰라 나는 닭처럼 파닥거리는 걸까? '넉넉하게 자란 세대'가 겪어야 하는 숙명이 날개 꺾인 집가축의 삶이라면, 숨 막힐 것만 같은 아버지의 집밖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과연 '고생'을 몸소 겪으면 가능한 걸까? 그 고생 어떻게 겪는 거야? 대체 몇 년 정도 겪으면 건설세대가 꾀 찬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딱 '아버지의 부(富)'보다 10% 정도만 더 강하고 위대한 부(富)를 쌓고 싶었다. 그 단계의 부(富)가 보장되는 고생길이라면 초대받고 싶었다. 나의 생태계에서 아버지는 어쩌면 '나의 천적'이었고 또한 '이기고 싶은 우상'이었다.
귀가 따갑게 들었던 엄마 친구분들의 예언이 대학 생활 이후에는, 나의 미래가 될 거라는 확신으로 변해갔다. 새로운 결혼관을 보수, 구축했다. 20대 전까지 아버지의 권위주위 아래서 대체적으로 순응하되 간간히 숨통 트일 만큼 불복종하며 살았다. 불복종의 영역은 비밀유지 능력에 따라 확장하고 커질 수 있었다. 결국 들켜서 문제였지만.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영역, 과한 소비 시스템, 패션이나 대중문화 영역에서 유행을 민감하게 좇아 살면, 정신세계의 혼란과 번민은 의외로 단순해졌다. 과하게 고민 안 해도 흥청흥청 살아졌다. 적당히 허용된 테두리 안에서 방황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20대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신분, 대학생의 자격을 따냈더니 미래가 너무 훤히 보였다. 5년 10년 후에 제2의 아버지들이 될 남성동지들을 학교에서 매일 만나고 있으니까. 눈물 많고 외로운 '공대 아름이'의 삶은 나만의 핑크빛 고생이었지만 깊은 깨달음도 주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알 수 없지만.
200~300명의 남학생들과 큰 문제없이 어울리면서 깨달은 남자의 속성은 이것이었다. 당시에는 동지였지만, 졸업 이후에는 아버지와 비슷하거나 더욱 이기적으로 변하게 될 상사, 경쟁하는 동기, 사수, 후임 또는 신랑님이 될 후보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고로, 아버지만큼 이기적이거나 어쩌면 더 집요한 남성들을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만날 가능성은 100%였다.
'이 휴~ 비슷한 삶을 제2막으로 사는 게 나의 미래라고?
1막은 2막을 위한 훈련이나 예행연습이었겠네.'
'젠장. 아~'
막상 결혼 이후의 나라면 아마도
'신랑님께서 JR적인 행동을 하던 설사 바람을 피우던, 한 남자의 모든 행동을 모르는 척할 거야. 한 번 결혼하면 더 이상의 결혼이나 이혼은 나에게는 없어. 이혼한다고 뾰족하게 다른 수가 생길 거 같지도 않거든. 그 남자가 그 남자일 테고, 표본으로 벌써 200~300명은 직접 본 거잖아. 나 자신도 이기적인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나겠어? 그냥 아버지의 필요와 어머니의 순정적인 바람에 잘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면 되는 거야. 남녀 간의 사랑을 믿니? 믿어져? 그게 그렇게 대단하다고? 감정적인 사랑이 사랑이기나 해? 이제는 피곤하다.
조용히 만나, 조용히 해결해 줄 사람이면 돼. 남편이 되었으니 선만 안 넘어주면 되고. 집에까지 (외도나 돈 등) 문제를 끌고 들어오지 않으면 될 거 같아. 이 정도면 돼.'나의 결혼관 정리가 끝났다.
동시에 그 시기에 방영된 집안싸움이 얽히거나 자본주의 신분에 둘러 쌓인 갈등과 사랑이 모티브 된 드라마는 죄다 이해하지 못했다. 가난한 집에서 성장한 여성이 로맨틱한 감정 하나로 기업가의 아들과 끈질기게 연연하며 얽히는 스토리가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공감이 안되니까 가끔 짜증 났다. 그들의 감정 흐름과 스토리 설정이 나의 논리밖의 이야기였다. 반대 상황은 감동 파괴였다. 부잣집에서 성장한 부잣집 따님이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진심과 열정 하나 순수하게 가지고 있는 남성분에게 빠져서 자신의 익숙한 삶과 당연히 익숙하게 다가올 미래를 포기한다고? 대체 뭘 믿고? 2년 3년 뒤를 생각 못해? 대체 왜? 그게 사랑이라고?
( 완전 개쩌는 T였나... 요...? ㅜ.ㅜ)
거기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라는 의심을 나는 현장에서 이미 확인한 바였다. 막내 고모는 나의 아버지 몰래 고모가 사랑하는 남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막내 고모가 사라진 건 내가 초등학교 때였다. 행복과 고생이 동시에 존재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자녀를 둘 낳자 얼굴도 모르는 작은 고모부는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제야 작은 고모는 미모를 여전히 간직한 얼굴로 아버지의 성이자 집으로 돌아오셨다. 고모에게 남은 재산은 소중한 자녀 둘이었다. 나는 그 사이 고등학생으로 변했다. 고모만 보면 세월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촌 동생 둘은 외국인을 보듯 낯설었다. 이런 경험은 나의 결혼관에 차곡차곡 영향을 주었다.
아내로서 엄마의 경력은 사회 속에서 야망을 성취하고 경제력을 갖춘 능력 있는 남자와 살아오신 삶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깊이 안아주거나 부드러운 친절을 끝없이 베푸는 쪽은 시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 쪽이셨는데, 시아버님은 능력이 없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할머니는 마음은 편하셨겠지만 항상 배가 고팠다.
엄마는 나에게 이와 같은 어떤 극단의 상황도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다. 딸이 행복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게 바람이셨다.
사랑이 인간의 가치 중 제일 중요한 가치라는 말씀이 있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구절로 기록되었다. 많은 사람들도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는 의견에 크게 반박하지 않는다.
한 영혼에게 사랑이 무한히 부어진다면? 그 영혼의 소유자를 통해 영향을 받을 세상의 변화는 무엇일까? 사랑을 무한히 주고 아무런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는 관계는 또 어떨까? 이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은? 이들의 관계를 보석처럼 귀하게 여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뿐 아니라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각 자의 마음은 짧은 시간일지라도 사랑을 갈망할 것이다. 아름다운 그들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 할 것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우리는 사랑에 의해 창조된 후,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망을 쫓아 결국 과한 욕심을 잉태했다. 그 뒤 신으로부터 숨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구원을 얻는데 구원 과정의 동기와 힘은 신의 '사랑'이다.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의 전개는 우리의 속성을 보여준다.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랑에 의해서만 우리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나 신에 대한 믿음의 여부와 상관없다.
'사랑'이 실존한다는 믿음을 반가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스무 살이 되기 전 19년 동안 돈의 가치가 제일이라 오해했던 나는 이기적이었다. '사랑의 실존'조차도 의심했다. 하긴, 믿음이 적기는 했으나 실낱같은 소망이 아주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대감이 있었으니까 절망의 깊이도 느꼈을 테니까.
대학에서 2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사랑의 실존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부모님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다. 이제 그 문제는 나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관과 책임이어야 했다. 내가 체험하고 느꼈던 동기, 선배, 후배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세대에게 사랑의 실존은 위협적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특별히 부부관계가 그런 이슈가 될 거라 추측했다. 왜냐면? 사랑의 뿌리는 인내심인데 뿌리의 힘 즉 관계에 대한 인내의 힘이 부모님 세대에 비해 훨씬 허약해질 세대가 우리라고 생각했다. 남녀 간의 사랑의 실존적 문제를 인식하자 허무한 마음의 동굴로 깊이 파고들었다.
가장 이기적인 동기로 사랑을 시작한다 해도 괜찮아 보이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사랑이 바로 에로스다. 아가페나 필레오는 시작과 속성이 에로스와는 다르다. <사랑>을 이론적으로 저술한 위대한 저자들의 공통적 내용은 어떤 사랑의 형태던지 시작은 다르다 해도, 결국 사랑은 성장과 성숙을 거듭해 가며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전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호응이 된 사랑의 정의는 이것이다. 스캇펙 박사님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 기록된 의견*이다.
<아직 가야 할 길>에 기록된 스캇 펙 저자의 사랑의 정의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서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가장 큰 문제는 분명 나였을 것이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친구들과 관계에서는 사랑의 가능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어릴 때 읽었던 고전 소설처럼 말이다. 내 문제 중 하나는 관계가운데 '듣는 귀'만 너무 크게 열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너무 과하게 듣는다는 것이었다. 경험을 통해 알아가야 할 이야기도 있는데, 경험하지 못한 스토리를 너무 많이 보고 들어서 머리만 커지는 꼴이었다.
사랑은 직접 느끼고 때로는 사랑에 의해 불타오르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내어 줄 수도 있어야 했다. 열정적인 사랑도 그 가치를 신뢰하는 사람만 행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열정적으로 신뢰했건만, 평범하게 돌아오는 배신이나 상실의 아픔을 겪을지라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고뇌도 감당하면서 슬픔의 나락에 빠져 보기도 했어야 할 시기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나는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행동했다. 논문을 쓰는 사람처럼 자료조사하고 분석이나 해댔다.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겁쟁이였고 알고 보면 완벽주의자였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 단연코 20대는 어떤 영역에서든 남의 말은 좀 덜 듣고, 남들이 쓴 저술은 적당하게만 읽되, 두려움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지고, 본인의 성격과 가치를 따라 행동하는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본인이 부딪히고 겪어야 비로소 세워지는 자신만의 인생 기둥이 있다. 실수할 수 있지만 실수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이고 행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것 같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사랑의 실존'에 관한 마음의 잔고가 빈곤해졌다.
마음의 잔고는 꿈, 이상, 소망 같은 (비이성적일지언정) 기대감으로 채워지고 부유해지는 창고다.
스스로 죽는 일에 대해 들여다보고 고민하다 그 생각이 끌고 들어간 한 종착지였다. 질문이 많아졌다.
"타인을 위한 '선행'이라든지, 멋진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죽을 자격이 있을까?"라는 의문에 이르렀다. 고아원을 찾아간다거나 사회 속에서 결핍으로 어려워하는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대면한 적도 없고,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다른 종류의 의문도 떠올랐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 알아? 사후의 세계가 완전한 '무'의 세계인지 확신해? 존재한다면 그들의 시스템이나 법칙을 알아? 알아야지 않을까?"
나라마다 법이나 문화가 다른데 일례로 어떤 나라에서는 마약조차 법의 저촉을 받지 않고, 어떤 나라에서는 마약이 위법이다. 어떤 나라에서 여성은 비키니를 입어도 되고, 히잡과 의상으로 여성의 모든 신체는 눈만 빼고 가려야 하는 나라도 있다.
이렇듯, 사후의 세계가 존재하고 내가 모르는 법칙이 존재한다면? 죽는다 해도 끝은 아니었다.
‘자, 설정해 보자. 나는 몰랐지만, 사후 세계의 시스템과 법칙이 존재했고, 나는 스스로 급하게 죽음을 선택한 처지겠지만 아무 준비 없이 사후 세계에 도착했다면? 억울하리 만치 타격을 입는 쪽은 나겠지? 거대한 사후 세계 시스템일까?’
마약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에서 마약을 하다 붙잡히거나, 히잡을 쓰지 않은 채 돌아다닐 수 없는 나라에서 얼굴을 완전히 개방하고 뛰어나니다, 처벌을 받는다 한들 그 영토에서 겪을 난처하고 엄청난 법적 대응에 대해 내가 대응할 힘은 없어진다. 일 개 여행자인 내가 그냥 당하는 거 말고 다른 대응책이 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생겨난 다양한 의문의 적당한 답을 찾아야 했다. 새로운 직무가 커졌다. 특히 고아원이나 양로원 봉사는 일단 한 번이라도 시도해야 했다. 사후 세계의 유무, 그 시스템과 법칙은 알아내야 하는 사명이 생겼다.
‘최종 선택'은 미뤄도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https://youtu.be/1OO54u5sRsw?si=WzkQNg23NCQ8PZ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