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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 Oct 10. 2024

찾고 싶어요, 너무너무

구도자 (a Seeker)



나도 가보고 싶어요


찾아간 곳은 '절'이었다. 엄마가 즐겨 찾으시는 절이었지만 "엄마! 나도 가보고 싶어요."라는 말씀을 드려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엄마의 처녀시절부터 종교가 불교는 아니었다. 처녀 시절에는 세례명을 받으셨을 정도로 수녀님과 신부님을 존경하고 따르셨다.


나를 낳고 몇 년 뒤, 집에 사고가 터졌다. 엄마가 잠든 사이 집안으로 연탄가스가 새는 바람에 엄마는 병원에 실려 가셨다. 위험한 사고로 죽다 살아나신 엄마는 여기저기가 아프셨다. 병치레가 잦다 보니, 좋다는 약이며, 신통하다는 치료센터는 여러 방면으로 경험해야 하셨다. 치유의 여정을 통해 '절'과 인연이 닿았다.


지압과 마사지로 엄마를 치료해 주신 분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치료해 주신 분도 엄마처럼 슬하에 자녀가 있으신 평범한 어머니셨다.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마치 '웃고 있는 부처님 상'을 직접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애로운 인상을 지닌 그분을 '보살님'이라 불렀다. 예민한 기질 때문 위장 장애를 겪던 나 또한 보살님의 치료가 필요한 날이 많았다. 급체에는 완전 직방이었다. 보살님의 치료실 정중앙은 역시나 부처님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인테리어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불교적 성향이었다.


보살님의 지압술이 뛰어나다 보니 소문이 멀리까지 퍼졌다. 치료받기 위해 먼 지방에서부터 올라온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줄지어 기다려야 했고 기다리는 환자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금세 이웃이나 친구가 되었다. 병원에서도 대안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온 환자도 있었는데, 처음엔 병색이 완연한 시커먼 얼굴로 도착해서는 1주 정도의 치료를 통해 회복의 기미가 보였다. 환자 분의 환해진 얼굴 덕분에 소문은 계속되었다.


엄마의 만성적인 고통 해결에 큰 도움을 주신 분이 보살님이셨고, 보살님이 믿는 존재가 부처님이다 보니, 엄마의 신뢰의 대상도 자연스레 부처님으로 옮겨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편, 막내 여동생은 '살레시오'라는 입학하기 힘든 사립초등학교에 보내셨다. 거기서 수녀님을 만날 때마다 평안한 표정으로 응답하시는 엄마였다. 이런 부분까지 종합해 볼 때 엄마는 세상을 초연하며 살아가는 여성 리더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으셨다. 엄마는 금방 잊어버리셨지만 엄마가 툭 건네신 말씀을 나는 기억한다. '살레시오 초등학교'를 같이 방문할 때였다. 우리 곁을 지나치는 수녀님의 따스한 미소를 보자마자 엄마의 얼굴에도 존경의 미소가 넘쳤다. 그때 나를 내려다보시면서


"집에 딸이 둘 있으니까, 둘 중 한 명은 수녀 해 볼래?"


세상 시름없이 살아 보고 싶은 엄마 자신의 꿈이자 동경 같은 고백이셨으리라. 어렸던 나는 엄마의 그런 심정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엄마의 그윽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인해 '좋은 일'같다는 추측만 했다. 이해인 수녀님의 글과 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한 때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 본 시기도 있었다. 나의 갈 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첫 시작은 무등산 어딘가에 위치한 절이었다. 엄마는 불교식 기도와 절을 하면서 소원을 아뢰려고 법당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나는 스님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절을 둘러봤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새롭게 와닿았고 새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법당의 처마 끝에서 들려오는 풍경 소리와 그 공간 깊이 내재된 정숙하고 단아한 느낌, 그 모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교를 통해 '사후의 원리'와 '인생에 대한 법도'를 찾게 된다면? 엄마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더 추가되는 상황이었다.


친절하신 스님들께서 엄마와 나에게 '절 밥상'을 챙겨 주셨다. 밥상 앞에 기대감으로 앉았다. 엄마와 나의 마음이 다른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나물류를 좋아하시는 엄마는 기분이 훨씬 좋아지신 것 같았다. 나는 이상한 갈등을 시작했다. 보리 함유량이 높은 잡곡밥과 건강한 채소 반찬을 먹을수록 나는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공감할 수 없는 음식을 제공받은 손님이 별 수 없이 음식을 입안 가득 넣고 느끼게 되는 난처함이랄까?


대접해 주신 분의 정성과 마음을 봐서라도 감사의 반응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먹긴 먹어야 했다. 예우를 다하려고 열심히 먹긴 했지만 나의 진심은 숨겨야 했다. 식사의 경험은 음식과의 만남보다 더 큰 의미였다. '절'안에서 불교라는 교리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나의 모습을 미리 맛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나는 계속 예우를 보이려고 노력할 것 같았다. 갑자기 한숨부터 나왔다. "이~ 휴~"  


웃음을 참지 못하셨던 엄마와는 달리 나는 만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식사 문화였다. (요즘은 나도 꽁보리밥과 나물 반찬을 잘 먹는다. 당시에는 육식을 너무 사랑했지만.) '사후의 원리'를 차분히 찾기도 전에 나를 감추려는 노력부터 배워야 했다. 밥 먹기 전까지 좋아 보였던 모든 불교문화에 내가 맞추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



엔트로피 문제


두 번째 찾아간 장소는 예솔이가 이끌어 준 공간이었다. 예솔이는 중학교 때 친구다. 서울에서 전학 왔기 때문에 '서울 말투'를 유감없이 쓰는 똘끼녀, 예솔이의 개성은 독보적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특히 예쁘다는 공주병 캐릭터를 밉지도 않게 연출했는데 서울 말투를 팍팍 쓰면서도 미움 하나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캐릭터로 나와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예솔이네 집에서 노는 날이면 예솔이가 다닌다는 성당에 함께 갔다. 성당에서의 예솔이는 신성(神聖)의 깊이가 나와는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진정한 선녀나 공주 같다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친구 예솔이와 경험한 장소, 성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가는 거라 기분이 좋았다. 혼자였지만 어려운 방문은 아니었다.


예솔이 닮은 캐릭터, 예솔이는 코믹해서 인기 많았습니다. :)


'사후세계 원리'를 찾는 중이라고 해서, 급작스레 마음 건강이 좋아질 리는 없었다. 우울증 걸린 사람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떠올려 보라. 당시 나의 상태였다. 시선에 맥이 없고, 가끔 어딜 보는지 초점이 분명하지 않아서 멍한 눈빛이고, 전체적으로 기운은 없어 보였다. 요약하자면 '우수에 젖은 그녀'였다. 영화 주토피아에서 인기를 얻었던 '나무늘보'의 움직임을 추가해 준다면, 안성맞춤이었다.



역시 만남과 사랑에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활동적이었을 때 만났다면 좋았을 예배절차였다. 천주교식 예배를 드리는데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앉았다 일어났다... 미사 내내 몇 번을 해야 하는 거야?' 뜀박질이나 노동에 대한 요구사항은 아니고, 오직 두 가지 방향의 움직임이었지만 우울증 환자에게는 이것조차 강도 높은 변화였다. 외부의 리더들의 의도와는 달리 나의 내부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활동이었다. 지구의 자전과도 같은 에너지가 필요한 기분이었다.


우울증 환자였던 허니, 나는 직감했다. '사후 원리를 찾기는커녕 더 우울해지는 걸. 거기다 저기 박스 공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고해성사를 저기서 하는 건데, 살아계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실 수 있는 신부님 바로 앞에서 고해성사를? 지금까지 다른 존재 앞에서 '내 속'을 제대로 털어놓은 적이 있던가? 내가 과연? 신부님 앞이면 술술 나올까? 아~ 여기도 안 되겠다.'


이태원에 무슬림 사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세 번째 방문지는 이슬람 사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학교 때 나는 무슬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다음 교회는?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좋아서 선생님 따라 교회를 나가 봤다. 개인적인 감동이 없었던 고로, 지속하지 못했다. 기독교와의 만남은 정확히 설명하자면 유치원 때였다. 엄마가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집 가까운 유치원에 나를 등록시켰다. 그곳이 '복음선교원'이었다.


유치원 선생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미소천사'였던 선생님과 찍은 사진은 앨범에 간직해 두었다. 멕시코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의 '히메나 선생님'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분이셨다.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이 기쁘고 행복했다.


<천사들의 합창> :)


다음 접촉은 초등학교 6학년 친구, 진주의 어머님을 통해서였다. 나는 진주집에서 자주 놀았다. 진주 어머님은 싹싹하고 밝으셨지만 단 하나의 단점이 있으셨다. 욕쟁이였다. 어머님과 진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 나는 싸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예뻐해 주셨기 때문에, '욕'은 욕이고, 어머님이 차려준 밥이나 간식을 또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진주 어머님이 나를 전도하셨고 진주와 어머님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성경 공부시간에도 참석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 생활의 핵심이었던 '신과의 관계'는 쏙 빼고 다른 관계에 관심과 열정을 쏟았지만.


우리를 맡아 주신 교사 선생님은 의대생이었는데, 우리는 선생님 놀리는 재미로 시간을 보냈다. 전대 의대를 가기 위해서는 전국단위의 수재(秀才)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천재님을 영접하듯 모셨어야 했는데 말괄량이짓을 했다. "간식 사달라! 간식 없이는 성경 공부시간에 집중도 없다! 선생님은 너무 말랐다! 옷이 모두 헐렁해서 선생님의 별명은 앞으로 '헐랭이'다." 대예배를 마치고 나서 다른 어른들이 함께 계시는 순간에도 우리는 선생님을 크게 외쳐 불렀다. "헐랭이 선생님~"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었다. 단 한 번도 화를 낸다거나 짜증조차 내신 적이 없었다.


화나 짜증으로 우리를 다스렸던 분은 '전도사님'이셨다. 당시 유행하던 가요란 가요는 죄다 외우고 춤도 잘 따라 추던 우리였던 지라, 찬양을 위해 준비해 둔 탬버린을 들고,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진주 그리고 우리 무리는 틈만 나면 교회 이곳저곳에서 가요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전도사님 눈을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들켰다. 그렇다고 이 정도의 방해가 교회 출석의 장애물이 될 수는 없었다.


나의 진정한 장애물은 노는데 발달된 나의 '끼'였다. 일부 친구들에게 인기가 생겼다. 교회 오빠들이었는데 나와 진주가 워낙 잘 노는 아이들이다 보니, 중학교 오빠들까지 우리랑 같이 노는 시간을 좋아했다. "허니가 있어야 재밌어."라면서 항상 나와 진주를 찾았다.


이 그룹의 친구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자의 사연을 가진 청소년들이었다. 기남이 무리와 차이점이 있다면? 경제적으로 가정 형편이 윤택했다는 것과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놀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큰 차이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친구들의 가정 상황을 들어 보면, 부모님께서 이혼하려고 준비 중이거나, 이혼했거나 하는 상황이었다. 가정사를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속이 타는 친구들이었다. 다만 어디다 대놓고 자신의 말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기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답답한 현실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신나게 놀면서 어울리다 보니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부모님이 금지령을 내리셨다. 아쉬움도 크게 없었다. '신에 대한 개인적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기남이와 기남이 그룹을 만난 걸 보면, 자녀의 인생 여정은 '참 부모님 뜻과 계획대로만 곱게 짜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방문지가 '교회'가 될 법도 한데, 당시의 나는 교회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주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PD 수첩>때문이었다.



초대


지나온 시간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공백이 생기고 그 여유 덕분에 ‘생명을 향한 의지’가 생길 것 같았다. 졸업앨범을 꺼냈다. 사진을 계속 넘기는데 고등학교시절 짝꿍으로 지냈던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졸업 이후 연락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용기를 내서 전화번호를 눌렀더니, 한주가 받았다. 한주의 목소리는 그 시절 그대로였다.    

  

대학교를 광주에서 다녔기 때문에 주거지가 여전했다. 약속을 정하는데 우리의 만남 장소는 인사동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으로 결정했다. 통화 중에 한주는 낯선 단어로 자신의 상황을 언급했다. 무슨 ‘훈련’을 받기 위해 곧 있으면 서울에 갈 거라고 말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함께 타고 내가 거주하던 서울에 온다는 게 반갑게 들리기보다 의뭉스럽게 들렸다.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처럼 신앙적인 프로그램을 단체로 참여한다는 의미였다. 걸스카우트 이후로 ‘훈련’이라는 개념으로 단체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던 나는 '훈련'이라는 단어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즈음, 룸메이트랑 함께 시청한 <PD 수첩>의 한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이단교회와 그 단체의 리더>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는지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종교나 교회 집단으로 볼 수 없었다. 피해자들의 진술이나 피해 사례가 진실이라면? 그건 ‘범죄’였고 ‘죽음지향적인 영향력’이었다. 북한의 궐기대회 장면처럼 군중들의 움직임이 일관되었고 광적이었다.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약속은 정해졌지만 한주가 궁금한 반면, 만남이 꺼려지는 마음도 생겼다.



< 다음 15화에서 계속 만나요 ^^To be continued>






추억 소환겸 :) 첨부합니다.

https://youtu.be/ypasflBTHmQ?si=wjsvO9X5y0f1ev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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