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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 Jul 25. 2024

외할머니집은 산당 1

안기다





식칼을 던졌다.

‘휘리릭~ !‘ 날더니 땅에 꽂혔다. 땅에 꽂힌 칼은 외할머니 손에서 날아간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칼 주변에도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사람들도 외할머니도 요동하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외형은 그대로였다. 분명 할머니 모습인데 내 보기엔 할머니가 아니었다. 그 외형 속에 숨어있던 다른 존재가 외할머니로 변장한 것 같았다. 평소 내가 달려가 안기고 어리광을 부릴 때마다 나를 안아주시던 외할머니의 얼굴에는 따스함이 넘쳤다. 그 시간 칼을 던졌던 외할머니 얼굴에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에 눈을 떠서 일을 시작했고 저녁 늦게 가게 문을 닫았다. 1년 356일 달력의 빨간 날도 '편의점'처럼 문을 열었다. 두 분은 옷가게를 함께 운영하셨다. 기반이 잡히고 나서 약간의 유희와 오락을 즐기신 분은 아버지셨다. 그전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첫 딸인 나를 낳자, '돈 복'도 함께 집에 들어왔다. 장사가 너무 잘 됐다. 고된 하루였지만 장사 끝나고 집에 들어와서 두 분은 '돈을 세다'가 잠이 들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 말이 있는데, 첫 딸이 뭔가를 딱히 한 일은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라 단순하게 울었다. 강인하게 살아남으려 울고 또 울었을 뿐이었다. 딸은 사랑을 달라는 의미였을 텐데 아버지의 열망을 따라 '돈'이 계속 밀려 들어왔다.  


얼마 전에 '유퀴즈'영상을 유튜브로 봤다. 몇 년 전에 제작된 영상이다. '이삭토스트'기업 대표님이 출연하셨다. 이제는 회장님이나 다름없는 대표님의 시작은 '스티브 잡스 창업 스토리'와 다르지 않았다. 3평 남짓한 작은 가게에서 시작하셨다. 이삭토스트를 개발하기 전이었다. 여느 토스트와 다를 바 없는 토스트를 만들어 팔았다. 장사를 열심히 하시는데 귀인처럼 '한 여학생'이 나타나서 토스트에 들어갈 '달콤한 소스'아이디어를 알려 주었다. 그 소스 아이디어를 그대로 따라 하셨고, 그 덕분에 '돈을 세다 잠들었다'면서 성공스토리의 신비한 맛까지 전달해 주셨다. 


부모님 두 분은 그전까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부자'로 살지 못했다. 그냥 가난한 가정도 아니고 시골 촌구석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셨기 때문이다. 비슷한 가정 형편의 사람끼리 만나 결혼까지 했다. 오직 아버지 한반도 씨의 마음에만 '부에 대한 야망'이 이글거렸다. 야망이 컸던 아버지 마음의 '부에 대한 집념'은 그분이 먹고 자고 일하는 이유의 전부였다. 살아갈 목적이자 간절함이었다. 


변함없는 열망을 가진 채 남의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분의 나이는 13살이었다. 10원이 없어서 또래 친구들 모조리 받았던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받을 수 없었지만, 그 결핍을 '생'을 위한 원동력으로 사용했다. 나의 어머니가 되실 23살의 장미래 양을 만나셨을 당시 한반도 씨 나이는 24살. '민증'으로는 22살이었다.


전쟁 직후 가난했던 한국은 아이가 태어나도 잘 먹이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 시절에는 자녀가 살아남게 되는 걸 봐서 출생신고는 느지막이 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아이일 때부터 버티고 살아남는 것에 능한 분이셨다.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날 나이였다. 맞선 자리에서 장미래 양을 만나고 한반도 씨는 '자기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외할머니집 문턱이 닳도록 날이면 날마다 찾아갔다. 한반도 씨는 머리가 영특하였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그 집을 방문했으나, 미래 양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먼저 백화실 씨(외할머니)에게 온갖 알랑방구를 부려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엄마는 후에 아버지의 이 점이 다른 청년 구애자들과 명백한 차이였다고 말씀하셨다.


백화실 씨는 자신의 마음을 예비 신랑에게 홀랑 빼앗기고 말았다. 딸을 책임질 사람이라고 믿어졌다. 예비 장모는 반도 씨의 야망과 넘치는 자신감이 흡족하셨다. 그런 와중에도 둘 째딸 미래 양은 나이가 어려서 결혼에 뜻이 없었다. 기회만 닿으면, '결혼'이라는 '인생의 난제'를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큰 도시로 도망갈 시도를 몇 번 했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를 눈치챘지만,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잔 뼈가 굵은 데다 계산이 빠른 한반도 씨였다. 순진하고 예쁘장한 미래 양의 마음을 흔드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가정 모두 없는 형편에 결혼을 진행하느라 힘든 예식은 끝났지만 '신혼여행'도 없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신랑 한반도 씨는 혼자 죽도록 일하다가, 이제는 둘이 같이 일하기 위해 신부를 데려온 사람 같았다. 눈뜨면 열심히 일하고, 해가 지면 일로 지쳐서 잠들었다. 부부의 인연이 그렇듯 첫 딸인 내가 생겼다.


여자에게 첫아기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 안에 생명체는 처음인데, '태아'나 산모였던 자신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 '첫아기를 낳으면 조금 수월해지나?'싶었지만 그때부터 다른 눈물의 시작일 뿐이었다. 장사가 잘 돼서 꿈만 꾸던 돈이 불어나는 기쁨은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고통도 따라왔다.


첫아기의 예쁜 얼굴, 생글거리는 것을 보노라면 세상 시름이 잊힐 법도 했다. 그것도 잠시, 미래 씨는 부지런히 벌이를 해야 했다. 아이를 생각하면 걱정만 되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얀 피부의 공주 같은 작은 아기를 골방에 홀로 남겨 두었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바로 가장 싫어하는 가게로 나가야 했다.


엄마는 수줍음도 많고 매우 내성적이셨다. 낯가림이 심하셨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먼저 엄마에게 말을 붙여도 응대하기 어려워하셨다. 반면, 옷장사는 가게에 들어오시는 손님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엄마가 먼저 말을 건네야 하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장사였다. 이렇게 싫었던 장사 일을 위해 엄마는 나를 재우고 걸음을 재촉하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장사 끝나고 돌아오셨지만 쉬지 못했다. 한 없이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껴안고 같이 목놓아 울었다. 아버지 권위주의아래서는 크게 울어야만 원하는 것을 얻게 될 운명이었다. 엄마가 힘드셨지만 누군가에게 장사를 맡길 수 없는 노릇인 데다, 나를 누군가에게 의탁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정체성이 처음이었던 한반도 씨가 '모성과 첫딸의 의미'에 대해 배울 기회는 없었다. 가난 때문에 목마르기만 했던 자신의 목표에 집착했다. 관계의 평안이 행복의 척도라는 인생 지혜를  깨닫기에는 아버지는 너무 젊었고 딱딱하셨다.


어떻게 자라는지, 아이였던 나는 시간을 따라 성장했다.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아이처럼 나는 생명의 힘을 따라 하루하루 자랐다. 방에 덩그러니 혼자 놓인 채 때로는 뒹굴었다. 지치면 울었을지언정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생명을 향하기 위해 호흡했다. 똥을 싸고 난 뒤 그걸 제 입에 도로 넣는 일도 있었다. 자신이 주어 먹는 게 무언지 몰라 그걸 먹고도 "음.마.."라 부르며, 환하게 웃는 아이였다. 무지함 속에서도 성장하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걷고 뛰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똑순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엄마와 많은 이웃들이 함께 일하는 <양동복개상가>에서 나는 '똑순이'나 '부잣집 딸내미'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하는 말마다 '똑'소리 난다면서 칭찬받는 시기가 왔다. 내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도 생겼다. 엄마는 그제야 때가 왔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외할머니랑 단 둘이 시간을 보내도 되겠다 생각하셨다. 외할머니 집은 외삼촌과 외숙모가 사는 시골 금정에서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가야 했다. 성인이 된 후로도 혼자서는 찾아가기 힘든 깡시골이었다.


아름다운 영화 <집으로>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많을 것이다. 그 영화는 나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주었고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 그 영화 속 '상우'와는 달리, 나는 외할머니 집에 가는 길이 낯설거나 싫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항상 내 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내 편이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전적으로 '자신만 옳다 해주는 대상'을 만나는 누구든지, 울 일이 많은 인생살이를 넉넉히 이겨갈 것이다. 아프다가도 금방 낫는 법이다. 


‘상우’는 후라이드치킨이 먹고 싶어서 ‘닭’을 표현한다 <영화 ‘집으로’>


몸의 온 구석, 마음의 사방 군데가 예민하게 생겨 먹은 나였다.

모든 감각이 항상 까탈스러워서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런데 외할머니 품에 안기면 다 나았다. 언제나 따스했다. 체하기도 잘하고 배도 자주 아팠다. 그럴 때 외할머니는 둔탁해 보이는 까칠하고 거무테테한 그분의 손을 내 배에 얹었다. 살포시 얹고 노래를 불렀다. '배앓이 낫는 노래' 가사가 유명할 텐데.


"네 배는 똥 배. 내 손은 약속. 허니 배는 똥배. 핼미 손은 약손. 나아라~ 나아라~"


노래인지 풍월인지를 읊으면서 아픈 배를 어루만져 주셨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은 내 배에서 동그라미를 살살 그리며 움직였다. 보약이 따로 없었다. 배가 사르르 괜찮아져서 눈이 스르르 감겼다. 포근한 잠에 빠져들었다. 


외할머니 손은 따스했는데, 그날은 다른 마음이 들었다.

두려웠다. 혼자 생각했다.


'방금 할머니가 뭘 하신 거야? 저 칼은 뭐야?'







할머니의 손을 잡은 아이 두 손


대문 그림
참고 서적 : My Baba's Garden
글 : Jordan Scott
그림 : Sydney Smith

번역서 : <할머니의 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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