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먹는 하마
남산댁이 환하게 웃는다.
할머니는 순진한 아이처럼 웃고 계신다. 내가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모습이다.
백치미를 풍기는 미소와 함께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허니야 ~ 아가 이제 가게 문열었겄다. 어서 가서 정종 한 병만 사와라."
"네 할머니"
정종을 사들고 다니기엔 키가 작고 팔도 가느다란 아이였다. 한참 잘 먹고 중학생 교복을 입을 시기에는 쑤욱 자랐다. 가방이 점점 무거워졌다. 똑같은 무게의 술병을 거뜬히 옮길 수 있을 시기가 성큼 다가왔지만 나는 거주지를 멀리 옮겼다. 할머니와 소통도 줄고 서로 얼굴을 맞대어 보는 일은 희귀해졌다.
대학교에 막상 들어가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고3 때보다 더 줄었다.
입학 전 예상은 빗나갔다. 합격 소식을 마음에 품고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서울 학교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들뜬 마음이 비행기보다 높은 고도에서 날아다녔다. 옆자리에 생전 처음 본 군일병 아저씨가 앉았다. 그 사람이 묻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의 학교를 다니고, 아버지와 멀어지면 훨씬 신나는 삶이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
현실은 달랐다. 예상치 않은 어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그 무게를 나는 이기지 못했고, 캠퍼스 곳곳을 울며 혼자 걸었다. 힘든 마음 있는 그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내려놓는 방법조차 몰랐다. 혼자 끙끙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병'이 되었다. 마음의 병도 초기 감기처럼 가벼울 때 병원을 찾았다면 금방 나을 수 있었을 텐데, 갈등만 계속했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었다. 마음과 정신이 자꾸 허약해졌지만 방치한 채 대안을 찾지 못했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무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정신과 방문을 두려워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정신과는 '금단의 성'과 같은 곳이었다.
상담 기록이 남겨진다고 누군가 들려주셨다.
결혼적령기가 되어 혼담이 오고 갈 때 상대방 부모님은 그런 기록까지 샅샅이 살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기록이 나의 미래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 거라는 의견을 어렸던 나에게 어른들이 들려주셨다. 사실, 나를 위한 정보 전달이나 대화는 아니었다. 엄마와 주변분들 사이에 생기는 어른들의 대화였을 텐데 어린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주어 들은 이야기지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쌩쌩한 개구리를 콜라에 넣었더니 이틀 만에 죽었다'라는 이야기처럼 선명하고 섬뜩하게 뇌리에 박혔다. 어린 내가 콜라에 손을 뻗어, 그 단맛의 중독에 빠져들 즈음에 어머니는 '콜라병 속 개구리'에 대해 전해 주셨다. 중독의 시작조차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콜라가 아니라 '독'이라고 설정하시려는 의도는 나에게 먹혔다.
성인이 되고 나서, 콜라를 한 두 모금 마셔보긴 했다.
콜라 먹고 죽었다는 사람 소식을 접한 적은 여태 없다. 하지만 결국 나는 콜라뿐 아니라 청량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여전히 개구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다. 이미지로 저장하면 오래가는 나의 기질 덕분이다. 다양한 기질 중 또 다른 하나를 설명하고 싶다. 나는 혼자만의 시, 공간이 주어져야 '삶의 에너지'를 생성하는 사람이다. 60% 정도의 I(내향성) 기질과 40% E(외향성) 기질의 소유자다.
내향적 기질로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는 나는 대학 생활의 문제가 생기자 고독을 선택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횟수가 고작 1년에 1번, 기껏 노력하면 2번으로 늘었다. 우리는 '대가족 구조'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할머니가 머무는 친척집이 공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한가족이었다. 나의 우울증세가 깊어지자 그런 대가족을 찾아가서 만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병세도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다른 가족들의 의견도 세월이 쌓일수록 무정해졌다. 오래 사신다는 것이었다. '풍'으로 쓰러지셔서 할머니만 아프신 게 아니었으니까. 함께 돌봐야 하는 식구들이 그 병치레로 여러 해 같이 힘들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전화를 받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삼 대가 함께 하는 가족이었고 닥쳐올 시간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나는 배가 고팠다.
다이어트를 이유로 하루 종일 먹은 음식이 거의 없었다.
외롭던 대학 생활 중에 두근거리는 대상과 만남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잘 생긴 외모의 남자를 좋아하는 개취에 대해 나만 부정했다.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은 모두 나에게 인정하라고 성화였다. 그러고 보니, 그 매력남이 끌리는 이유도 그가 잘 생겨서였다.
더불어 아버지와 반대되는 그의 성격이 좋았다.
나라는 대상에게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가 나에게는 끌림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자유로움을 주었고 자유로움은 애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상한 윤활유였다. 감정과 함께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내 심장은 콩닥거렸고 두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대학 생활에서 느껴보기 힘든 좋은 감정이었다. 묘하게 숨이 트이는 마음이었다. 그를 만나보니 성격도 좋았다.
나는 유아독존적인 아버지 성격을 닮은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탓에 아버지에게 조언과 훈계가 담긴 폭언을 들어야 했다. 1년 강우량 중 장마철에 쏟아지는 폭우 소리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의 폭언의 양만큼 비례해서 용돈도 제일 많이 받았다. 집안에서 돈을 잘 쓰는 사람으로 치면 아버지 다음이 나였다. 이렇게 자라나다 보니 꽃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 성격이 JR(지랄)스러웠다. 당시에는 그랬다.
그 연하남은 영화 <노팅 힐>에서 '휴 그랜트'가 연기한 서점 주인, 윌리엄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스윗한 그의 마음보다 내 마음이 앞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느낌을 인정해야 했는데, 이 일은 내게 곤욕스러웠다. 개선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다이어트였다. 그 거라도 해야 했다. 20대 다이어트. 자존감이 마이너스로 낮고 게다가 우울하기까지 한 여대생의 다이어트는 건강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냥 자주 굶거나 자신의 소중한 육체를 존중할 줄도 몰랐다. 정신과 육체의 사랑의 방법은 서로 긴밀하게 통하는 법이니까.
장례식장에 모인 가족들이 입을 모았다.
굶어서 허기진 나의 수고에 대해 보상을 주는 말이었다.
"예뻐졌다 ~"
"원래 예쁘잖아."
"대학교 서울로 가더니 진짜 미스코리아 나가야겠네."
안부 인사가 마쳐지자 명절 때마다 항상 화젯거리였던 할머니 얘기를 쉬지 않고 나누셨다.
오래도록 앓아오신 병인지라, '곧', '곧'이라는 예언적 시간을 모두가 기다렸던 차였다. 할머니는 어떠셨을까? 기다렸을까? 내가 할머니라면 늙고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오직 누워 있는 채로 아침 해를 맞이해야 하니까. 하지만 알 수 없다. 생명과 함께 곪아터진 이기심을 품고 사는 존재가 나다. 나는 할머니를 대변할 사람이 못된다.
생명은 생존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나무의 사계절의 변화를 봐도 그렇고 생명력 있는 생명체를 관찰하면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생명'자체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다. 사실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해피트리랑 금전수를 키우는데 시들시들하다가도 물 한 번 잘 주면 바로 새 잎을 생글생글 만들어 낸다. 생명의 힘은 겸손하게 알아채는 정도지 영원히 다 알 수도 없다.
그 힘이 할머니를 시험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고통의 심판을 가한다면?
나는 생명을 미워하고 저주할 죄인이며 연약한 악인이다. 나도 그랬고 나와 함께 한 가족들도 그랬다. 우리는 기다렸다. 생명 너머의 세계를, 다 알 수 없는 무지한 존재들이니까. 육체의 생명이 끝나면 인생의 고통도 끝일 것이라 기대했다.
윤회를 소망하는 어떤 이들은 '이번 생의 고통'이라고 말할 것이다.
남은 가족들의 고통이던지 할머니의 고통이던지 끝이 있기를 바랐다. 어리석은 죄인들이었다. 참으로 이기적인 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편에서는 고통의 깊이를 감하는 시간이었다.
그 뒤로 벌어진 둘째 아들이신 아버지 '반도'와 네째 아들 '남해' 사이의 싸움은 지켜보지 않으셨으니까.
다행이다. 한남해. 집안의 유일한 대학 졸업생이었고 나에게는 막내 작은 아버지셨다.
두 분은 긴 싸움을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산 문제 본질적 문제는 그간 엇갈린 신뢰의 문제였다. 1년 정도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미워하고 욕하고 소리 질렀다. 두 분께서 인생을 향해 쌓아 둔 각 자의 울분을 있는 힘껏 몽땅 털어낸 모양이었다. 결국 멀어졌다.
할머니의 상을 치르고 난 후 몇 년 지나서의 일이다.
할머님이 그즈음까지 살아계셨다면 두 분의 불통, 오해는 다른 스토리를 만들었을까? 안 가본 길에 대한 가능성 때문인지 그랬을 법도 하다. 아예 싸움 시도조차 안 했을지 모른다. 두 까치머리는 할머니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함께 이겨냈으니까. 찢어지게 가난해도 같이 살자며 곁에 살았으니까. 두 분의 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가 곁에 계시니까.
두 분의 치졸한 이기심이 짐승의 숨은 발톱처럼 드러내지 못했다면 이유는 하나이리라.
할머니의 성격이 곱디 고와서? 마음은 모르겠다. 성격은 고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할머니 웃는 모습만 유달리 기억하지만 다른 가족들에게 할머니는 달랐다.
여자 UDT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할머니가 귀신을 떼려 잡았다고 해도 그 이야기가 믿어질 분이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는 않으셨다. 그런 엄마도 할머니는 무서워하셨다. 시어머니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시대이긴 했다. 하지만 엄마의 두려움은 그 이상이었다.
첫 번째 작은 삼촌 '한서해'의 아내, 첫 째 작은 엄마를 생각하면 연예인 이영자 씨가 떠오른다.
이영자 닮으신 작은 엄마가 시집오시고 나서야 엄마의 두려움은 사그라들었다. 엄마와 큰 어머님 두 분은 군사령관 같던 시어머님 그늘 아래서 전우애를 싹 틔운 절친이 되었다. 시어머니께 혼줄이 날 때마다 두 분이 함께 계셨지만 엄마는 몸이 바들바들 떨려서 힘들었다고 하셨다. 할머님의 무지막지한 잔소리와 무서운 성품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미모만큼 유명했다.
미인이셨던 분이 결혼하고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셨다. 그중 막내딸 '한미정'은 할머니를 닮아 예쁘장했지만 첫 째 딸 '한송이'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할머니는 걱정이 되셨다. 첫 째 딸 시집보낼 궁리를 하시다가 맞선 자리에 할머니 혼자 등장했다. 송이 고모는 집에 숨기고 혼자서 첫 째 사위를 만나러 나가셨다.
"보수적인 집안이어서 딸의 얼굴을 함부로 보일 수 없네. 해서, 나만 나왔네 그려."
그런데 착하고 성품 좋았던 예비 신랑은 할머니의 얼굴만 보고도 확신을 했다.
'아니 어머니가 저 정도 미인이면 그 딸은 얼마나 미인이겠어?
그래서 아무 남정네에게나 얼굴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걸 거야.'
"네 날 잡겠습니다."
결국 그분이 나의 큰 고모부가 되셨다.
내가 얼마 전까지 '결혼 관계'나 '가족 단위 공동체 생활'을 흠모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세상 모든 상황과 결과에는 그에 맞는 이유가 존재하니까. 동네가 알아주는 미모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시 무시한 성품을 가졌던 이유도 당연히 존재한다.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의 서글프고 한스러운 운명 때문이었다.
미인이신 데다 할아버지 성품도 순하고 좋으셔서 아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시는 공처가셨다. 그런데 6자녀만 줄줄이 낳아 놓고 할아버지께서 모진 병이 드셨다. 가난한 가정 형편은 병으로 더 가난해졌다.
그때부터 둘 째였던 나의 아버지 '한반도'와 첫 째였던 큰 아버지 '한동해'는 날이면 날마다, 사사건건 할머니에게 매를 맞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지금도 욕심이 많고 야망이 크시다. 본성인지라 자랄 때도 첫 째 형을 항상 이기려 들었다. 첫 째는 첫 째대로 속이 상했다. 둘 관계가 조용할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삶이 녹녹치 않던 할머니는 두 아들뿐 아니라 6자녀의 군기를 확고히 잡았다.
얼마나 맞았길래 아버지는 매를 몽신 두들겨 맞을 때마다 다짐을 하셨다.
돌비에 새겨 넣은 것처럼 각오를 다졌다.
'내가 자녀를 기르면 나는 절대 매를 때리지 않을 거야. 죽을 만큼 아파. 너무 아파.'
"아야~ 아~ 어머님 잘못했어요."
매만 무섭게 때리는 분이 아니라, 목소리는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사람처럼 매우 거칠었다.
가난하고 고된 인생의 역경들이 할머니를 매섭게 만들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면도 존재했다.
할머니의 이런 부정적인 성격은 대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강한 결속의 매듭이 되었다. 명절마다 큰 어머님, 엄마, 큰 작은 엄마는 모여서 '공공의 적'에 대해 얘기를 나누셨다. 세 분에게 그 얘기는 힘들었던 만큼 웃음소리도 크게 선사해 주는 선물이었다. 연휴 내내 세 분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들을 위해 찬지상 규모로 세끼를 꼬박꼬박 차리고 치우셨다. 세 분에게는 그런 연휴가 긴 시간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그 주제 하나만 가지면 웃어도 웃어도 웃음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즐거워하셨다. 명절 음식보다 그 얘기가 맛있는 분들이었다.
막내 작은 어머님도 어머님들 중에서는 유일한 대학 졸업생이었다.
작은 어머님이 시집오실 때 할머니의 친구는 다름 아닌 '술'이었다.
잔소리며 기차화통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 스토리가 되어 버렸다.
막내 작은 어머님과 할머니 사이의 기억 매개체는 아마 '술'이지 싶다.
할머니에게
정말 오랜만이에요.
할머니 가신 곳에서 할아버지 만나셨죠?
'우리 허니 왜 시집은 안 갔어? 핼미가 뭐 잘못한 건 아니겄지? 어디가 많이 아팠던 거시여?'
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할머니 제가 어릴 때 할머니가 아프신 것, 술을 매일 드시는 것도 이해가 안되었어요.
냄새도 이상한 술이 왜 좋으실까? 생각했어요.
저도 지금은 술 조금 마셔요. 와인 한 두 잔 정도요.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술이 주는 위로를요.
할아버지 많이 보고 싶으셨어요?
할머니 감사해요.
쓰다 보니
할머니의 견딤이
할머니의 이김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아요.
감사해요.
여전히 웃고 계시네요.
'허니야 여기서는 정종은 필요 없시야.
네가 기억해 주면 그거시면 충분혀 부러.
건강하고 니가 원하는 거시면 다 해 부러.
가족을 꾸리고 함께 견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제.
근디 두려울 일은 아니제.
잘해 왔고 잘 할거여 넌.
지금 니 가족들 사랑해뿌리고 아빠도 사랑해야제 안 그러냐?
잘 할거여.
사랑한다 우리 아가'라고 하실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