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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곰 Nov 21. 2016

착한 시위 콤플렉스

꽃벽 스티커 자기검열이 대통령을 물러나게 만들 수 있는가

직썰에 기고(2016.11.22)


집회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중요한가? 분명 그렇다. 누구의 피도 보지 않아도 되는, 마치 축제와도 같은 시위는 보다 더 많은 시민들을 광장으로 호출한다. 조직화된 단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으로 나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신체적인 약자도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위는 평화시위뿐이고 그런 점에서 평화시위는 민주주의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할만하다.


2주 연달아 무려 100만 명, 많게는 120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한 장소에 모였는데 이렇다 할 위기상황 없이 무사히 집회가 끝났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범법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이렇게 '젠틀하게' 시위했다는 건 분명 대단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웠고, 흥분하거나 돌발행동을 하는 다른 시위자를 제지했고, 경찰에게 방패를 돌려주었다. 이러한 평화시위는 2002년과 2008년의 경험(그리고 그 정반대에 위치한 민주화 이전의 그 숱한 비극의 기억들-4.19의 김주열, 87년 6월의 이한열-)을 통해 한국의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합의한 시위의 형태라는 점에서 무게를 가진다. 평화시위는 광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를 이끌어내고, 경찰과 언론이 "폭력시위"를 구실로 시위대의 목소리를 지워버리지 못하도록 대응하는 꽤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평화시위가 아닌 다른 모든 시위가 惡은 아니다

그렇다면 평화시위가 아닌 시위는 모두 "폭력시위"인가? "폭력"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폭력인가? 폭력을 시민이 아닌 경찰이 먼저 유발 또는 격발시키면? 비폭력 평화시위를 아무리 해도 정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복잡다양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화시위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선(善)이며, 그렇지 않은 시위는 악(惡)이 되는가? 그리하여 할 수 있는 질문, 시위를 폭력과 비폭력의 흑백논리로 나누는 프레임은 온당한가?


"평화시위" "착한 시위"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적인 자기검열과 코르셋은 필요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을 꾸짖고 퇴진을 주장하기 위해 거기 모인 사람들의 스스로 집회시위의 순결함을 증명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비폭력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말이, 폭력 시위를 하자는 주장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야한다. 비폭력 프레임의 문제는, 그것이 집회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자격/비자격을 부여하고, 통제하고,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 협소한 기준을 벗어나는 집회는 오답 취급을 받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게 누가 정하고 평가하는가? 대개는 언론이 정한다. 그것도 소위 '보수언론'이 한다.


시위를 평화적으로 하자는 말과 비폭력 프레임에 갇히지 말자는 말은 충분히 양립가능하다. 시위를 평화적으로 하면서도 비폭력 저항으로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위를 통제하는 경찰과, 평가하는 언론과, 시위의 목적인 정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평화와 저항은 양립가능하다. 그러나 '꽃벽 스티커'조차 떼어버리는 것은 과도한 자기검열이다. 이것은 평화만 남기고 저항을 삭제하는 행위다. 동시에 시위에 참여한 다른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훼손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시위는 '무결점'이나 '순수성' 테스트를 하는 실험장이 아니다.

twitter@Aark0309

작금의 시위는 박근혜 대통령의 범법 행위를 규탄하고 자진 하야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의경의 노고를 덜어주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은 본질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의경의 휴식시간은 경찰청장이 보장할 일이지 시민의 몫으로 전가되는 것은 주객전도다. 지금 우리는 외신에 호평 받거나 어디에 점수 받자고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비를 털어 쓰레기봉투를 나눠주거나 쓰레기봉투를 메고 다니는 청년들의 미담이 훈훈할 수는 있어도, 설령 그 장소가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려도 이것은 시위의 본질과 단언컨데 아무 관련이 없다. 쓰레기는 버리지 않으면 될 일이다. 왜 유독 시위에서만 쓰레기가 없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야 하는가? 쓰레기에 집착하지 마라. 더 큰 쓰레기가 푸른지붕 아래 있는데.

비폭력 프레임에 대한 고3 청소년의 비판, 2분 35초부터


감히 누가 누구를 평가하는가

시위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평가 받기 위한 오디션이 아니다. 꽃벽 스티커를 뗀 것을 두고 몇몇 언론들이 시위의 질을 평가하며 칭찬하고 나섰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 잘했어요' 도장 받자고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의 주체가 언론인 것은 우스운 일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기는 커녕 "형광등 100개 켜놓은 아우라" "朴대통령, 버킹엄궁 들어서자 비 그치고 햇빛 쨍쨍" 같은 비이성적인 형용언어들로 부역했던 언론들이 이제와서 심판처럼 팔짱끼고 시위를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 되었다. 이러한 칭찬이 특정 언론사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비난으로 돌변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정작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할 것은 경찰이 아니던가. 진짜 문제는 물대포으로 사람을 죽이고도 책임지지도, 사과하지도 않는 경찰의 후안무치와 그럼에도 여전히 그 뒤에서 언제든지 물대포와 최루액을 쏠 준비가 끝난 살수차가 거기 있었다는 점이다. 위헌 판결(2011년, 평화로운 집회·시위를 막고 집회참가자들을 주위와 고립시키는 경찰의 차벽 설치"가 과잉금지의 원칙을 위반하여 7:2로 위헌. 경찰의 차벽이 합헌이 되려면 "임박한 위험이 명백·현존해야 하고, 차벽을 설치하는 것 이외에는 효과적으로 위험을 차단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이 커야한다")을 받았음에도 당연하다는듯 거기 존재하는 차벽과 이미 백남기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바 있는 살수차가 대기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은 점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시민 의식이 훌륭했다'로 귀결될 것이 아니라 '경찰이 과잉진압으로 시위대를 자극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에 대한 환기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정부가 사람들의 목소리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고 귀를 기울이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 아닌가.

경찰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과도하게 과잉으로 억압해온 일은 무수히 많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않다. 역대 경찰청장들은 항상 "시위"라는 말 앞에 원래부터 한 단어인것처럼 "불법"을 붙여서 말해왔다. 시위는 경찰의 허가 대상이 아닌데 경찰이 마음대로 "불법" 딱지를 붙여왔다. 정치적인 투쟁이나 물리적인 위협이 실존하는 시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중증 장애인의 소규모 평화집회에조차 과잉대응 해왔다. 세월호 참사 1주기때 평화시위를 했던 유가족들을 고립시키고 최루액을 뿌렸다. 집회시위의 권리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음에도 경찰은 늘 이를 과도하게 억압해왔다. 그런데도 왜 평가의 대상은 경찰과 정부 당국이 아니라 시민이 되어야 하는가?

2014년 '장애인의 날'을 맞아 경찰은 장애인들에 최루액 세례를 선사했다.


시위를 하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천하제일깃발대회도 좋고, 문화제 성격의 다양한 행사도 좋다. 운동꿘만 아는 노래 대신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고 DJ가 클럽음악을 트는 것도 좋다. 하지만 모든 집회시위가 축제 같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시위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위는 더이상 할 수 있는게 없는 사람들의 것이다. 정부가 손을 놓고 TV로 구경만 하는 동안 가족이 바다에 생수몰 당하는걸 지켜보고도 "유족충"이나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이 있고, 정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당장 생계가 위협 받는 사람들도 있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정부가 강제집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용산참사를 기억하라. 철거민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싶어서 던진 것이 아니다.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해 무려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다. 경찰과 무력 대 무력으로 제대로 붙어보고 싶은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폭력시위꾼'이 경찰과 무력으로 맞붙고 싶겠는가?


어디서부터 폭력인가?

시위를 하는 시민이든, 그저 집에 가는 주민이든, 광화문을 보러 온 관광객이든, 민주사회의 시민은 누구나 차벽에 항의하고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차를 파손하고 물리력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지난해 민중총궐기때처럼) 언론은 "폭력" 딱지를 붙인 적이 있다. 재물손괴도 폭력에 해당하는가? 집회시위에서의 "폭력"의 기준은 어디까지 낮아져야하는가? 어떤 국가는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폭력"이라고 보지 않는다.


1996년 영국에서 4명의 여성이 군부대에 잠입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호크 전투기를 때려부쉈다. (그들은 왜 전투기를 파괴했나?) 그들은 '평화운동가'였고, 그들이 전투기를 박살낸 이유는 동티모르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해서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도네시아에 전투기를 판매한 영국 정부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도주하지도 않고 현장에서 자진해서 언론에 연락을 하고  검거되기를 기다렸다. 한국 언론의 프레임에 따르자면 이들은 군부대에 "불법 침입"을 하여 "폭력 시위"를 저지른 셈이지만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티모르의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사용될지도 모르는 전투기의 수출을 막기 위한 '무장해제'를 한 셈이었다. 4명의 여성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든 평화적인 수단을 이미 다 동원한 뒤의 물리적인 저항도 폭력인가? 사람을 해하지 않는 물리력 행사도 폭력인가?


비폭력적이고, 기물파괴도 없지만 적극적인 저항을 표현하는 시위는 얼마든지 있다. 알몸으로 시위하거나, 죽음을 재현하거나, 모욕을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시위는 계속되어 왔다.


비폭력에는 아름답고 우아한 방법도 있지만

 우크라이나 시위 진압대의 방패에 꽃을 주는 시민, 2008년 3월 ⓒnewsweek international
미국 경찰의 흑인 살해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하는 아이샤 에반스. 그녀는 아무런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연행되었다. 2016년 7월 ⓒJonathan Bachman/Reuters
2013년 7월, 터키 탁심 정부의 "게지 공원"을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에 등장한 피아노


과격하고 불편한 방법도 있다

"piss off!" 파리에서 활동하는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우크라이나 대사관 앞에서 대통령의 사진에 대고 오줌을 눴다. 그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의 농부들이 EU농업장관 회의가 열리는 브뤼셀을 겨냥해 도로를 점거하고 농축산물과 유제품 가격 폭락에 항의하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스페인의 투우에 반대하는 시위
육식에 반대하는 시위
시위 때문에 누군가는 불편해야 한다. 그러라고 하는 것이다.


의경은 경찰의 방패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의경이 "불쌍"한가? 그런 마음이 들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때문은 아니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시키겠다며 징병해 놓고 엉뚱한 곳에 청춘을 쓰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정부다. 직업경찰들이 해야할 일을 의경으로 헐값에 부리며 정권을 위한 공안 작전에 동원시키고 있는 것은 정부지 시민이 아니다.  


'불쌍한 의경'은 경찰의 '까방권'이나 '실드'가 될 수 없다. 평화시위가 필요한 이유는 의경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다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왜 폭력의 주체가 시민이고 피해자가 경찰로 상정되는 프레임이 계속되는가? 여태껏 시위에서 물리력으로 입은 상해, 사망자를 비롯한 신체적인 손해는 물론이고 벌금, 징역 등의 사법처벌까지 경찰과 시위자 중 어느 쪽이 많을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명백하다. 경찰의 뒤에는 정부가 있기에 경찰과 시위자는 동등하지 않으며 힘의 균형에 있어서 비대칭적이다. 의경이 꽃벽 스티커를 떼느라 고생한다면 애초에 경찰청장이 거기에 차벽을 세우지 않으면 된다.


이 연장선상에서 의경은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불쌍한 청년'이 아니라 제복을 입고 있는 경찰이자 군인이다. 개개인의 의경을 '제복 입은 시민'으로 연대감을 느끼는게 언뜻 숭고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의경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시위를 무력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때 의경이 경찰 혹은 군인이기 이전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양심에 따라 불복종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불쌍한 시민 괴롭히지마!" 같은 구호라도 외치면서? 경찰과 군대가 민주주의 시민과 연대하여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길을 터주리라는 환상은 접어두는게 좋다. 1987년 6월의 이한열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의경(전경)이 쏜 최루탄이었지만 그 전경이 2016년의 의경보다 특별히 더 사악하고 불쌍하지 않은 청년이라 그런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어쨌든 경찰로서 그 자리에서 경찰의 일을 하고 있을뿐인 의경이 왜 '또다른 시민'의 일부로서 과잉보호 받고 배려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세월호 유가족을 희생자에 따라 단원고 학생과 일반인으로 나누어놓고 편가르기를 했던 그런 종류의 프레임 전략은 아닌가? 결국 다시 돌아가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의경 또한 시민이라면 시민과 시민이 대치하도록 만든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검찰은 세월호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제안한 대학생 용혜인씨에 대해 2년형을 구형했다. 그는 경찰을 때리지도, 어떠한 폭력이나 소요도 저지르지 않았다. 누가 '불쌍'한가?


평화시위의 책임은 정부에 있다

100만의 시위대는 개개인의 무질서한 군집체인 군중(mass, 群衆)이지만 경찰은 일원화된 명령체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방어장비를 갖추고 있고, 원한다면 무장도 할 수 있다. 경찰은 경찰청장, 그 위로는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의 의지를 구체화하여 움직이며 그래서 사람을 죽여놓고도 아무런 책임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백남기씨 사례뿐 아니다. 용산참사 당시 진압 총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사망한 경찰과 철거민 어느 쪽의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았다. '무전기를 꺼놔서 상황을 몰랐다'는 말로 면피한 그는 이후로 공항공사 사장을 낙하산으로 역임하고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되었다. 철거민과 유가족은 3-5년씩 구속되거나 벌금형에 처해졌다. 그의 출마에 항의한 활동가와 유가족들은 또다시 징역형과 벌금형을 구형 받았다. 여기에서 보듯, 정부는 (당연하게도) 시위의 사후처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시위자 개인이 국가의 모든 권한과 기능을 동원할 수 있는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건 불가능하다.

 

그러한 까닭으로, 역설적으로 시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오로지 정부에 있다. 당연히,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SpiderMan♪SpiderMan  평화적 집회시위의 자유를 촉진하고 실현할 국가의 의무는 자유권규약에 명시된 국제기준이기도 하다. 한국은 헌법으로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제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평화적 집회의 자유 (국제앰네스티 정책보고서 중 일부 발췌)


"평화는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쉽게 부서질 수 있다"


착한 시위 같은 건 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거기(시위자가 의도하는 대상이 "보이고 들리는 곳")에서 그런 식의 시위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 모인 이유는 그곳이 청와대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100만 명의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착한 시위'는 어떤 요인으로든 너무나 깨지거나 일그러지기 쉬운 것이고, 시위의 형태와 양상이 어떻든간에 시위를 하기 위해 모인 목적 자체보다 우선하여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위가 끝나고 나서 시위대가 지나간 자리가 설령 쓰레기로 넘쳐난다고 해도 시위의 본질이 평가절하 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은 드라마가 모두 끝난 뒤에 나오는 광고 같은 것이다. <시크릿>이 끝나고 어떤 형편없는 광고가 나와도 그것이 길라임과 김주원의 애정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처럼, 시위는 시위 그 자체로 합목적성을 가진다.


피를 보지 않은 영국의 혁명이 "명예혁명"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대혁명이 '비명예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착한 시위'도 마찬가지다. 착한 시위와 덜 착한 시위, 나쁜 시위 같은 것은 없다. 시위와 저항은 시민의 권리다.


시위를 평가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카고 컵스의 우승을 기뻐하며 광적인 세레머니를 펼친 선수들이 떠난 경기장의 뒷풍경이 더럽다고 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선수들이 남아서 쓰레기를 치워야 할 이유는 없다. 경기에 이기는 것만이 야구장에 있는 선수들의 善이고 시위도 그와 다르지 않다. 순종 2년에 일어났던 기적이 순실 4년에 일어났듯 이 땅에서도 그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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