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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곰 Sep 06. 2021

21세기 엄창

2021년 인터넷 사상 검열에 대하여

경험1

몇 달 전, 내가 일하는 회사의 캐릭터가 한 언론에 의해 "(어린이에게) 나쁜 콘텐츠"로 보도되었다. 그 주요한 근거는 여성형으로 표현된 캐릭터가 분홍색과 리본으로 꾸미고 있다는 이유였다. 이 캐릭터는 같은 이유로 경찰청 캠페인 콘텐츠를 만들 때 양성평등 뭐시기에 의해서도 교체 권고를 받았다. (그 와중에 손가락 모양 체크도 받아야했다) 나는 애니메이션 속 여성 캐릭터가 핑크색, 리본으로 꾸며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항변했다. 콘텐츠의 캐릭터는 어떤 역할과 비중으로 그려지는지 중요하지, 단순히 컬러가 핑크라고 안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이다.


부모의 보수적인 선택을 받아야 하는 아동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재현될 수 밖에 없다.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주인공인 파란색 경찰 캐릭터를 여성형 캐릭터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여경'이 무능력하다는 프레임과 백래시는 최근 몇 년간 아주 거셌다. 그런 현실에서 여자 경찰이 주인공인 캐릭터가 나올 수 있을까? 요컨대 공공영역에도 실현되지 않고 있는 젠더 평등을 일개 아동 애니메이션에 전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경험2

지금으로부터 무려 19년 전, 2002년 때의 일이다. 여자 친구(여자친구 아님)가 대학교 내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소모임'에 갈건데 같이 가자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따라갔다. 그때는 페미니즘이란 말조차 몰랐고, 단순히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훗날에서야 페미니즘 영화인줄 알았던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는 자리였다. 아직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그날따라 치마를 입고 온 그 친구에게 나는 "치마가 아주 잘 어울려서 예쁘다"라는 칭찬을 했다. 그 친구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지만 정작 옆에 있던 그 소모임의 다른 여자 선배들이 경악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들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냐'며 나를 꾸짖고 힐난했다.


지금의 나는 이성에게 외모와 관련된 언급을 아예 하지 않겠지만, 여전히 그때의 내가 잘못된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치마 입은 모습을 칭찬한 것에 당사자가 불쾌해 하지 않는데, 왜 제3자가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가? 그게 치마가 아니라 바지였다면 괜찮은가?


핑크, 리본, 치마 등 일반적으로 '여성스럽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꾸미고 표현하는 것이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든가, 성평등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일차원적이다. '머리가 짧으면 페미'라고 하는 것의 반대편 극단에 이런 '코르셋 거부 강박증'이 있다고 본다. 물론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성별 고정관념은 철폐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포지티브 방식이 되어야지 네거티브 방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남자도 핑크로 꾸미는 것이 자연스러워야지 여자에게 핑크가 금지되면 안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자기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 여성주의, 성 해방이 아니겠는가. 여자에게 핑크도 금지하고 치마도 금지하고 모든 '코르셋'을 거부하는 것이 탈가부장이고 여성해방이라면 결과적으로 패션에서의 여성해방을 이뤄낸 것은 탈레반이란 말인가.


한쪽에선 머리가 짧다는 것만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에게 긍정적인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페미나치"라며 (낙인 찍으려는 자가 오히려 더 나치스러운) 페미가 아니라는 증거를 요구한다. 반대편에서는 머리를 길어서도 안되고, 핑크도 안되고, 치마도 안된단다. 이쯤되면 여자들이 어떻게 머리를 하고 옷을 입어야 '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역자'도 아닌 여성인걸 '증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양쪽 다 진정한 젠더 평등의 실현보다는 누군가를 검열하고 검증하여 단죄하는 자경단 놀이에 더 흥미가 많은 것만은 분명하다.


젠더문제뿐만이 아니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는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무혐의를 증명해야만 한다. 정부를 욕하는 것에 반대 의견을 내면 "대가리 깨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대깨문이 된다. 중국에서 발생한 인명피해에 "착짱죽짱"이라고 달린 댓글에 "그렇다고 사람이 죽었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라고 하면 "조선족이지? 시진핑 개새끼 해봐"라고 심문받는다.


내가 20세기 소년이었던 어린 시절, 어떤 녀석이 나에게 "엄창을 찍어보라"고 요구했다. 엄창이 뭐냐고 물어보자 내 말이 만약 거짓이면 엄마가 창녀라는 뜻에서, 진실임을 엄마를 걸고 맹세하라는 것이었다. 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증명하기 위해서 왜 너 따위에게 우리 엄마를 걸어야 하는지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엄창' 따위는 찍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자꾸만 '엄창'을 찍으라던 못 배워먹은 놈들이 떠오른다. 페미가 아니라는 엄창, 한남이 아니라는 엄창, 대깨문이 아니라는 엄창, 조선족이 아니라는 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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