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곰 Jun 21. 2017

윤서인의 '침묵'이 틀린 이유

윤서인 작가의 빠른 전업을 권유함

자고로 '관심종자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했겠다. '듣보'였던 변희재를 일찍이 "변듣보"라고 계속해서 불러주고 소환해 주어서 더이상 듣보가 아닌 존재로 키워준 것은 다름 아닌 진중권이 아니었던가. 이런 '어그로 종자'들은 이말년식으로 말하자면 혼세마왕 같은 자들이라 혼란과 노이즈마케팅을 먹고 무럭무럭 크는, 분탕을 치고 어그로를 끌어서 view수를 올려서 먹고 사는 이들이라는 인식. 

나의 이러한 인식의 중심에 윤서인의 만화가 있었고 윤서인의 만화가 얼마나 나쁘고 추악해도 관심 주지 않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작은 결심이었건만 그의 어그로는 얼마나 극성스러운 동시에 해악스러운지 결국 이렇게 또 잡문이나 두들기게 되고 만 것이다.


윤서인의 미펜툰 '침묵'편이 잘못된 첫번째 이유는 8살 어린이의 죽음을 본인의 정치적 입장을 위해 가져다 이용했다는 점에 있다. "왜 저 사건의 희생자는 추모 안해요?"라는 질문은 기실 윤서인 본인에게 돌려주고 싶은 질문이다. 윤서인씨는 충격적이며 비극적인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만화의 소재로 사용하기 전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만화는 누가 봐도 이 해당 사건을 추모하거나 조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본인이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윤서인씨가 피해자의 장례식에 찾아가 조문이라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만화에 언급하겠다고 유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론 장편 극만화도 아닌 일종의 만평의 성격을 띄고 있는 그의 만화가 풍자와 비평을 위해 소재의 당사자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해야할 절차적, 법적 책임은 없다. 하지만 작가로서 비극적 실제 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높은 수준의 윤리적, 도덕적 책임과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재현된 사실로서의 창작물은 다시 현실세계의 사람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살인 사건의 유족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이 회자되고 소비되면서 겪을 수 있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실화 소재의 사건을 재현하고 창작물에 사용하기 위해, 혹은 그것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피해자 혹은 그 관련자들의 상처를 다시 헤집지 않기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최소한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윤서인 작가에게 그러한 고민이 조금이라도 있었는가?


두번째 이유는 맥락의 문제다. 2016년 5월 17일에 일어난 소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이 사건을 여성을 노린 젠더사이드(Gendercide)라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명백하며 설득력이 높다. 가해자 남성이 화장실에 숨어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가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낸 뒤 "일곱 번째로 들어온 사람이자 첫 번째 여성"인 피해자를 찔러 죽이고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 최대의 번화가인 강남역 인근의 공공 화장실이라는 일상적 공간이라는 장소적 특징이 여성들로 하여금 이 폭력이 잠재해 있지만 만연해 있는, '죽은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다'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윤서인 작가가 언급한 사건(초등학생 여자아이 살인 사건)과 이 사건(강남역 살인사건)의 공통점은 피해자의 성별뿐이다. 두 사건의 맥락과 배경에는 연관관계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사건간의 상호가치가 충돌 또는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의 성별이 같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른 배경 맥락을 모두 비약해버린 억지이며 논리적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윤서인 작가는 이미 두 가지 사건(event)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심각한 지적 능력 결여를 보여왔다. 가령 (1) 백남기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2) 그의 딸이 발리에 있다 라는 두 가지 사실만을 혼합해 백남기씨의 차녀가 한가롭게 휴양이나 즐기는 것처럼 묘사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실 왜곡이자 호도일 뿐이었다. 그는 맥락맹인 나쁜 놈이거나 나쁜 놈인 맥락맹이다. 



세번째 이유는 자원의 문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는 비용이 한정되어 있는 물리적인 우주다. 한 명의 사람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경험하거나, 인지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것은 어떤 단체나 국가라도 불가능하다. 만약 윤서인 작가의 주장대로 '여성이라서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B 사건에도 찾아가서 "포스트잇을 붙이러 가야"한다면 응당 C 사건, D 사건, E 사건에도 가야만 논리적인 합당성이 성립한다. 하지만 '살해 피해자가 여성'인 모든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스트잇을 붙이러 가는" 것은 정말 그러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람과는 달리 누군가를 헐뜯고 비난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학교 가고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기는 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A 사건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낸 사람이 별개의 B 사건을 알지 못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하여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가?


"A는 하면서 왜 B는 안하냐"는 이 논리인척 하는 궤변은 극단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궤변에 가까운) 화법이다. '세월호 추모도 중요하지만 천안함도 잊지 맙시다.' '518이지만 천안함도 잊지 맙시다.' 이 사람들은 고모부 장례식장에 가서 "이모부 명복을 비는 것도 잊지 맙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인가? 이들은 사실 천안함 사건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으로 인해 (여자는 하지 않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던 젊은 남자들이 무고하고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라는 이미지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토록 천안함 희생자들을 마음 깊이 추모하는 사람들은 그럼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묻기 전에 그 자신은 어떤 행동을 통해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않고 있는지 귀감을 보여주면 좋겠다. 


A를 하는 행위가 B 또는 C를 망각하거나 외면한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A를 하는 사람은 유관성이 있는 B, C를 인지하고 행위할 가능성이 높다. 2016년 5월 28일에 일어난 구의역 스크린도어 노동자 사망사고때 직접 현장에 찾아가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절을 올린 사람들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참사에, 아파트 외벽 노동자의 죽음에, 여주 돼지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다가 질식사한 외국인노동자 4명의 죽음에는 공감하지 못할까? 분노하지 않을까?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하는 사람한테 둘을 하지 않냐고 묻는 것은 지극히 코미디다. 몰염치함은 물론이거니와 사고할 능력이 없다고 자인하는 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자원을 윤서인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으로 돌려보는건 어떨까. 그는 일찍이 학교폭력 피해자의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한 바 있고, 소녀시대를 성추행 했으며, 성폭력 피해자인 故 장자연씨의 죽음을 희화화하여 모욕했다. 




덧붙여, 그의 이번 작업이 더욱 비겁한 까닭은 '까기 쉬운' 것을 깠기 때문이다. 그는 이명박근혜 정권이 몰락하자 새로운 돈줄을 '까기 쉬운' 젠더 이슈, 여성에서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와 그에 따른 반작용(이른바 백래시)은 마초적 웹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주도적 공감을 얻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왜 ~는 안해요?"를 말하는 윤서인 작가는 그렇다면 그동안 이명박근혜 정부하에 벌어진 4대강 비리, 자원외교 비리, 최순실 게이트,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등을 비롯, 보수적 가치에서 더욱 중요한 군 의문사, 김일병 사건, 방산비리 등을 왜 다루지 않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윤서인의 이번 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심한 포인트를 한가지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메갈리아'로 대표(된다고 생각하는)되는 '넷페미'들을 "쿵쾅"거리는 '못 생기고 뚱뚱한 여자'로 묘사해 놓은 자기만족적 클리셰다. 놀랍게도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외모와 체형은 매우 다양하며, 더욱 놀랍게도 페미니스트 중에는 남성도 존재한답니다. (강남역에 찾아가 포스트잇을 붙인 사람 중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중년남성도 있었음을 상기하라) 오바마도 페미니스트고, 엠마 왓슨도 페미니스트고 문재인 대통령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답니다. 페미니스트 대표를 '뚱뚱한 메갈리안'으로만 이미지화하는 빈곤한 상상력에 안타까움을 전하며, 윤서인씨가 하루라도 빨리 다른 직업을 찾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그의 만화의 한결 같은 형편없음과 추악함에 역설적인 고마움을 느낀다. 나치 히틀러에 부역했던 바그너, 카라얀과 레니 리펜슈탈이나 역시 화가였던 아내의 작품활동을 반대하고 방해하여 화가로서의 경력을 중단시키고 가정폭력까지 행사한 에드워드 호퍼, 13세 소녀를 성폭행했던 로만 폴란스키 등처럼 압도적인 예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파탄난 예술가들이 정치적 올바름과 예술의 심미성의 관계에 심각한 갈등과 질문을 던져주는 데에 반해 윤서인씨의 만화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1'도 없으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자살이라는 역병 혹은 연쇄살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