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속 감추고 싶은 빛나는 보석 _ ITALIA
로마에 입국하였다. 이미 해는 저물어서 어둑했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비용을 한 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선택한 경유항 공편으로 모스크바 공항에서 3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다. 행여 여행을 떠나는 자의 설렘이 없었더라면 그건 그다지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을 떠난 지 17시간. 로마 FIUMICINO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피곤할 겨를은 없었다.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지인들의 조언과 몇몇 블로거들의 글에 의하면 로마는 집시들이 많고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함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공항에서 한국인 여자애를 만났다. 그 친구도 혼자서 일주일 가량 휴가로 이탈리아 여행을 온 친구였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로마 시내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그 친구가 버스를 타고 갈 거라는 말에 나는 나와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였다. 첫 유럽여행이고 밤에 로마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나의 첫 번째 숙소는 로마 시내에 있는 한인민박이었다. 그리고 민박집에 픽업차량을 요청해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할 때 확인하기로 4인까지 같은 요금으로 픽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기억이 나서 어차피 같은 금액이면 이 친구에게도 좋을 것 같다는 배려 차원에서 낸 제안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픽업을 온 아저씨는 그 친구에게도 나의 가격의 반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1명만 예약해서 그 이상은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법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같이 가기로 한 친구는 버스가 아닌 공항철도 요금보다 더 큰 돈을 지불하게 되었다. 좋은 일 좀 하려다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만 생겨 버려 얺짢았다. 그래 봐야 어쩌겠나. 외국에서는 한국 동포가 더 무섭다고 하더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도 잠시 숙소에 들어가자 밝고 예쁜 대학생 친구들 덕분에 기분이 화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혼자서 용감하게 유럽여행을 하고 있는 여대생 한 명과 졸업여행으로 친구 두 명이서 영국으로 입국해 3주 동안 유럽 발도장 찍기 배낭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로마 공항에서 출국한다는 친구들이었다. 숙소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있자 두 명의 친구가 밝은 얼굴로 들어오더니 와인과 로마에서 유명한 티라미슈 맛집 폼피에서 사 온 딸기∙초코 티라미슈를 내밀며 쫑파티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동안의 피로가 쌓여 피곤했지만 티라미슈만큼이나 상큼하고 달달한 그녀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녀들과의 시간은 그만큼이나 달콤했다.
로마에서의 하루. 입출국이 모두 로마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이틀만 묶고 피렌체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연말에 입국했던 터라 혼자 외롭게 연초를 맞이하는 청승을 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피렌체에 지인이 있었다. 첫날의 계획은 그냥 무작정 한번 걸어보는 것이었다. 걷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냥 걸어 다니면서 로마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로마라는 도시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가장 먼저 궁금하였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러기에 로마의 겨울도 춥다는 것이었다. 고등과정의 세계지리 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유럽은 지중해성 기후로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배웠다. 그중에서도 남부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겨울은 따뜻하다.’고 여겼다. 내가 이탈리아를 너무 만만하게 봤던 탓이었을까. 가을 하늘만큼이나 맑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이것이 유럽의 공기라고 가슴속 깊이 흡입하던 상쾌함이 머지않아 매서운 추위에 온 몸을 떨게 만들었다. 실외에서 1시간 이상 돌아다니기 힘든 정도의 추위와 바람으로 어느 순간 몸을 피할 곳을 찾아 지도를 펴 드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만만한 곳은 어느 누구나 따뜻하게 맞아주는 성당이었다. 로마 시내에는 성당이 많았고 곳곳에 있어 시내를 한 번 돌면서 성지 순례를 하듯 성당을 찾아다니는 묘미가 있다. 나 또한 어느새 ‘로마의 일상생활’에서 ‘로마의 성지순례’로 여행 테마가 잡혀가고 있었다. 이렇게 메인 테마가 성당 순례가 되다 보니 신앙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과 미켈란젤로의 숨결이 담긴 캄피돌리오 광장 등은 그저 곁가지에 불가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은 성당이나 교회의 건축물들이 왜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답게 디자인이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당 안에 가만히 앉아 높은 천장에서 나오는 공간의 울림과 차가운 벽과 대조되는 따뜻하고 은은한 조명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섬세한 조각과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함 등이 조화를 이루며 만드는 분위기에 심취해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종교화의 기원을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신앙심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꽤 유용한 방법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유랑하는 작은 양 한 마리도 내치지 않고 차디 찬 칼바람을 잠시 피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보살펴 주신 데 대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 기간이 평년보다 유독 추웠던 때라고 한다. 그래도 매서운 바람과 추위 속에서도 도시 곳곳에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니 로마는 진정한 관광도시임이 틀림없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눈길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역과 건물벽에 그려진 그라피티(graffiti)였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된 그라피티는 개인의 자유의견을 표출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된다. 공공장소를 훼손한다는 부분에서 사회적인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회적 메시지를 남긴다는 의미에서 예술의 일부로 인정되기도 하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그것이 낙서가 되기도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하는 예술이 갖는 다양성과 창조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껏 말 잘 듣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교육받고 성장해 온 나에게 분명 벽에 그려진 낙서가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우리나라의 역과 주택 건물에 이와 같은 낙서로 도배되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았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그린 이를 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 또한 유럽이라는 장소가 낳은 헛된 망상에 불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행이라는 나의 삶의 있어서 작은 일탈이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자유로움에 대한 표출과 맞닿아 나에게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음날 피렌체행 기차표를 끊으려 떼르미니 역으로 갔다. 먼저 눈에 띈 것은 표를 구매할 수 있는 자판기였다. 자판기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뒤로 나도 따라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 자판기 앞에 다가 섰을 때였다. 이것저것 화면을 두드리는 나에게 어떤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도와줄까?"라고 말을 걸어왔다. 대충 혼자서 가능할 정도로 어렵지 않았지만 낯선 외국인을 위해 친절을 베푸는 아저씨의 배려를 뿌리치는 것은 실례라고 판단되어 살짝 웃어 보이며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사실 도움을 준다는데 감사한 일이지. "어디로 갈거니?, 언제 몇 시에 갈 거야?" 등을 물으며 자판기를 툭툭 두드리고 돈을 넣으니 표와 잔돈이 자판기에서 나왔다.
'나왔다!'
기쁨도 잠시, 그 아저씨가 표를 나에게 주고 5유로나 되는 잔돈을 가져가더니 "이것은 나에게 줘. 내가 너를 도와줬잖아"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아차!’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사람들이 그렇게 조심하라던 집시를 내가 만난 것인가. 나는 "안돼! 그건 내 거야"라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나 배고파. 내가 가질게"라며 돈을 꼭 움켜잡는 것이었다. 나는 "싫어"라면서 그 사람을 째려보았다. 잠깐의 정적.. 그 아저씨가 말을 꺼냈다.
"화내지 마. 네가 이 돈을 원하면 줄 수 있어. 너의 기분이 그렇게 나쁘다면. 그런데 나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어. 배가 너무 고파. 네가 이것을 주면 내가 뭘 먹을 수 있어. 나 줄 수 있어?"
결과는 정해졌다. 나의 참패였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내키지 않고 억울한 감정이었지만, 절대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을 되돌려 주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내며 그래도 어떻게든 나를 기분을 달래려고 노력하는 그 아저씨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즐거움과 행복하고자 이렇게 먼 타국까지 날아와서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내 모습도 못나 보였다. 그냥 내가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래 누군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리 나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고마워!" 그러면서 환한 얼굴로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너 괜찮지? 진짜? 네가 기분 나빠하지 않길 바라. 고마워"
"안녕"
한 순간이었다. 간단한 한 끼 식사도 가능한 돈을 허무하게 잃었다.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와 마주했던 그 아저씨와의 만남이 썩 나쁜 기억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럽 여행의 첫 도시, 이탈리아 로마에서 녹록지 않은 이번 여행의 첫 신고식을 치렀다.
<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 이탈리아 기차를 이용하는 첫 날부터 45분 연착이라는 경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