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통증이 심상치 않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통증이 2주 이상 지속되자 불안했지만, 바쁜 업무를 핑계로 병원 진료를 자꾸 뒤로 미뤘다. 주말 저녁, 통증이 3주째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덜컥 겁이 났다.
나, 죽으면 어쩌지.
아들의 동그랗고 작은 얼굴이 떠오른다. 꼭 끌어안을 때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살의 촉감과 온종일 몸에 묻혀 온 먼지 냄새도 훅 풍기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내 증상에 관해 검색하기 시작한다. 가슴 통증은 유방암과 상관이 없다는 글을 읽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불안감이 온전히 해소된 건 아니라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월요일 오전, 집 근처 여자 의사 선생님이 운영하는 유외과에 전화를 했다. 이전 검진 때, 주변에 암 환자 없어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오셨어야죠. 하고 책망했던 선생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때도 예약하기 어려웠던 것 같은데 검사 자리가 있으려나? 병원에 전화하자 예약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내년 초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한다. 부리나케 근처 병원을 검색했다.검사가 가능한 가장 이른 날짜로 예약했다.
평시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대기하던 이들은 진료실에서 호명하면 마스크를 쓰고 들어갔다. 코로나 감염에 대한 우려 때문이 아닌 듯했다. 얼른 가방을 뒤졌으나, 마스크가 없었다. 이런, 망했다.
압박 촬영은 상당한 통증을 수반한다. 다음으로는 초음파 검진. 차라리 물리적인 고통이 낫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마스크를 챙겨 오지 못한 내가 야속했다.
모니터를 확인하는데 물혹이 참 많이 보였다.머리에도, 가슴에도 내 몸 안에는 왜 이리 물주머니가 많을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속 작은 물주머니들이 찰랑이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화면을 멈추더니 물혹 몇 개를골라 사이즈를 쟀다. 아기집을 잴 때도 저랬지. 그중 커다란 걸 콕 집어 다시 한번 가로 세로로 크기를 재더니, 안에 뭐가 있다고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는 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럴 때마다, 가슴이 정말로 조금씩 내려앉는 걸까?
마취도 한다는 말에 검사가 아프냐고 묻자, 세 번 정도 따끔할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 느낌은따끔한 게 아니라 작은 둔기로 가격당한 것 같았다. 가운을 벗고 보니 검사받은 쪽 가슴이 커다란 밴드로 덮여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이에게 영양을 공급하여 키워낸 장한 신체 부위. 너는 너의 역할을 충실히 완료했으니,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너무 애통해하지는 말자.
검사비를 수납하고 주의 사항이 적인 안내지에는 5일 간 밴드를 떼지 말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5일이라는 말에 갑자기 큰 수술을 받기라도 한 것 같은 비장함이 느껴지고, 떼지 말라는 말에 밴드를 붙인 자리가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간호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정 간지러우면 떼었다가 샤워할 때만 방수 밴드를 붙이라고 했다. 약국에서 제일 커다란 방수 밴드를 샀다. 검사 부위 통증으로 인해 가슴을 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몸이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질 듯해서 운전대를 꼭 부여잡고 간신히 집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저녁에 예약해 놓은 필라테스 수업도 취소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밴드 주변을 살펴보았다. 밴드를 붙여놓은 피부 주위가 벌겋게 변해있었다. 거울을 보며 조심스레 밴드를 떼어냈다. 세상에나, 커다란 밴드 아래에는 딱 눈곱만한 상처가 보일락 말락 숨어있었다. 이깟 걸로 아픔을 크게 느꼈다는 생각이 들자,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며 움츠리고 있던 어깨가 쭉 펴졌다. 약국에서 사 온 커다란 밴드를 약서랍에 깊숙이 넣어두고, 아이 손가락 다쳤을 때 사용하던 작은 방수밴드 한 개를 붙였다.
4일 뒤에도 밴드에 피가 묻어 나왔다. 아이쿠, 엄청나게 깊은 곳에서 조직을 떼어냈나 봐. 호들갑 떨며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밝게 불을 켰는데 검사 자리주변에 주먹만 한멍이 들어 있었다. 아악. 내가 처음에 아팠던 건 엄살이 아니었어. 정말 아팠던 거라고. 다시 가슴 부위 통증이 느껴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드디어 검사 결과를 하루 앞두고 있다. 별거 아니었을 거야. 선생님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잖아.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아줌마들을 위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게시글을 쓱쓱 넘겨보다가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암이라는 내용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모양이 나쁘지 않아 암이 아닐 거라고 했다는데.
또 잠이 오지 않았다.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근심은나의 특기이다.실재하지도 않는 출렁이는 물소리에 둘러싸여 밤을 꼬박 지새웠다.검사 결과에 따라 나의 삶은 두 갈래로 나뉠 수 있겠구나. 안 좋은 결과를 받게 될 경우 일단 병가를 내야겠군. 내년에는 휴직해야 하나? 여의찮으면 보직이라도 내려놓아야지. 수면과 식습관의 변화도 필요하다. 일찍 자고, 건강식을 섭취해야겠다. 잠깐, 좋은 결과를 받아도 생활 습관은 이렇게 바꿔야하는 거잖아!
다음날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뚫고 병원에 갔다. 의사가 가볍게 입을 뗐다. 섬유낭종입니다. 양성이예요. 그래도 6개월에 한 번씩 꼭 추적검사 받으셔야 합니다.
병원 밖을 나섰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과 동일한 굵기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우산에서 튕겨져 나가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내 몸에 나쁜 것이자리 잡고 있지 않은 것이 병에서 완치된 것보다도 더 큰 기적임을 아는 나이다. 잔치국수를 사 먹으며 조촐히 축하했다. 기특한 내 몸아, 고맙다. 배가 불렀음에도 단 디저트를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카페에 들어가서 조각 케이크와 디카페인 커피를 시켜놓고 통유리창을 통해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소소한 여유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아니면 너무 게을러서인지 살아오며 이러한 시간을 누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앞으로 비 오는 날만이라도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스트레스와 분주한 마음을 씻어내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