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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베리(Peaberry) 이야기

by 허니베리



커피 실습 시간.

‘윙’ 하는 기계 소리와 함께 갈색 에스프레소가 샷 글라스 안으로 흘러내렸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학생들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본 장면이 바로 ‘정상추출’ 양상입니다.”


에스프레소에서 진한 커피 향이 퍼져 나왔다. 잠시 커피 향에 취하려던 순간, 내 앞에 반원 형태로 서 있던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들더니 과격한 몸짓으로 항의했다.


“선생님! 그 ‘정상’이라는 말 좀 다른 단어로 바꾸어 표현하시면 안 되나요?”


수업 중반부터 자꾸만 얼굴을 찌푸리던 진희였다.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닌지 신경 쓰였는데, ‘정상’이라는 단어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나 보다. 진희의 얼굴에는 분노와 고통, 불안과 공포감마저 어려 있었다. 평상시 늘 상냥하고 예의 바르던 진희가 보인 낯선 모습에 몹시 당황했다.




진희는 난청인이다. 다시 말해,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인과 달리, 보청기를 착용하면 말소리를 어느 정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청각장애인이다. 하지만 진희는 수어를 모어(母語)로 여기며, 자신의 정체성을 농인으로 규정한다. 발음과 억양이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말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진희가 ‘말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떠나온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짐작은 하고 있었다. 비록 이 학생이 겪은 구체적인 사건은 알 수 없지만, ‘정상’이라는 단어에 이토록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진희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 받았을 상처와 아픔이 느껴졌다.


“‘정상 추출’에서 ‘정상’은 ‘비정상’의 반대개념이라기보다는, 추출 속도가 너무 빨라서 커피 성분이 제대로 추출되지 않은 ‘과소 추출’, 반대로 추출 속도가 너무 느려서 커피의 부정적 성분까지 추출된 ‘과다 추출’이 아닌, 원두의 특성, 맛, 촉각을 잘 드러내는 에스프레소 추출을 뜻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 단어가 거슬린다면 수어 표현이라도 바꿔볼게요.”


‘정상 추출’에서 ‘정상’을 무슨 단어로 대체할까? ‘바른’, ‘정확한’, ‘적합한’, ‘옳은’, ‘좋은’. 가치판단 적이거나 부정적인 반대 의미가 존재하는 단어로 바꾸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자기 잘못이 아닌, 타고난 장애로 인해 부정적으로 판단받으며 살아온 학생을 위한 고민이니까. 그렇다면 ‘적당한’은 어떨까? 휴, 어렵다. 한국어에 비해 수어 어휘가 몹시 적다는 사실도 안타깝다. 결국, 상황에 따라 적절한 단어를 골라서 사용하거나, 풀어서 설명하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잠시 쉬자고 한 뒤, 피베리(peaberry)가 많이 섞인 생두를 선택해서 쟁반에 담았다. 생두는 쉽게 말해 커피 열매(coffee cherry) 안에 있는 씨앗이다. 일반적으로 커피 열매 안에는 반구를 길게 잡아 늘여놓은 듯한 형태의 씨앗 두 개가 편평한 면을 맞대고 들어 있다. 가끔 둥근 형태의 씨앗이 한 개만 들어있기도 한데, 이것을 피베리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피베리를 ‘정상’이 아닌 ‘결점두’ 즉, 결점이 있는 생두로 취급하여 골라내어 버렸다. 하지만 요즘은 피베리를 ‘특징 있는’ 생두로 보고 있다. 또, 언젠가부터 커피 애호가 사이에서 피베리 특유의 향과 맛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며 양적 희소성으로 인해 높은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피베리에 관해 설명하자, 진희는 아무 말 없이 동글동글 귀여운 피베리를 손끝으로 굴리며 어루만졌다.




학교를 졸업한 진희는 기업 사내 카페에 취업했다. 이 회사는 장애인을 고용하여 이들에게 자립의 기회를 주고 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희는 특유의 인내심, 성실함, 리더십, 기술력으로 본사 내 카페의 부점장이 되었다.


오랜만에 진희와 만나 식사도 하고 일하는 모습도 살펴볼 겸 진희가 일하는 카페에 방문했다. 카페 사업 총괄 책임자가 반가이 맞았다. 그는 진희가 이대로 잘 성장한다면, 향후 신규 오픈 매장 책임자로 세우고 싶다고 했다. 진희가 일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서울 중심에 높이 솟은 빌딩 안에서 화려한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일하는 진희가 참으로 대견했다. 언론을 통해 소개된 진희의 모습도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볼 때, 이미 진희는 ‘정상’ 또는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세상을 딛고 올라가 우뚝 서 있었다.


'이제는 네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향과 맛을 마음껏 발현할 차례란다, ‘피베리’처럼.'

바쁘게 오가는 진희를 바라보며 주문 걸듯이 중얼거렸다.




(이야기에 등장한 졸업생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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