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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n 18. 2023

Her

카페에 찾아온 묘한 손님



 겨우내 닫혀있던 폴딩 도어를 힘껏 당겨 열자, 카페 안으로 묘한 향기가 흘러들어왔다. 갓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꽃망울들이 꽃내음을 발할 리 없다. 호기심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은가루 같은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테라스 구석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남루한 행색, 아래로 축 처져서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배. 나도 모르게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목말랐는지, 몸 상태 때문인지 숨을 헐떡였다.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물을 건넸다. 순식간에 물 한 사발을 들이켠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풀었던 배는 푹 꺼져있었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지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번에는 내가 내민 물을 마신 뒤에도 그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깥 테이블에 힘없이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 필요한 거라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홀쭉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공복 상태 같았다. 우유를 내밀었다. "이번만이에요. 관리하는 분 눈에 띄면 곤란하거든요.”

 

 하지만 이튿날부터 그녀는 매일 출근하듯 찾아와 유리문 밖에서 서성였다. 그녀와 맞닥뜨리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외면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다가 그녀의 부푼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우리 아이 먹이기 위해 이곳에서 일하듯, 당신도 당신 아기 먹이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군요.' 그녀에게 남몰래 음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파라솔 아래 구석진 테이블은 어느덧 그녀의 지정석이 됐다.

 



 어느 날, 퇴근길에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내게 찾아올 때의 초췌하고 허기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배는 두둑했고, 걸음걸이는 힘이 넘쳤으며, 얼굴에는 윤기마저 돌았다. 이러한 그녀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거리가 좁혀지자, 그녀임을 확신함과 동시에 내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렇게 잘 먹고 돌아다니면서 종일 발 동동거리고 일하는 나를 찾아와 불쌍한 척하며 끼니를 해결했던 거야?’ 그녀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경쾌하던 발걸음이 둔해졌다. 그녀를 아는 척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뒤, 그녀와 나는 멈춰 서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힘주어 바라봤다. 활력 넘쳐 보여서 좋군. 실은, 그동안 그녀의 방문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많이 부담됐다. 부디 이렇게 잘 지내고,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말길.

 



 눈빛을 통해 내 생각이 전해졌는지, 그날 이후 그녀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그녀의 활기찬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안도감보다는 속은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녀의 젖먹이가 잘 크고 있는지 불쑥불쑥 궁금증이 찾아왔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유리문 밖을 흘끔거렸다.

 



 피곤한 날일수록 퇴근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집에 돌아가면 육아와 살림이라는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을 마감하며 잠갔던 유리문을 다시 열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앉아있는데,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였다. 그녀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그녀는 건조대에 걸린 행주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떼며 말을 건넸다. “육아가 쉽지 않죠? 저도 그래요. 잠깐만요!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요.”

 

 먹을 것을 꺼내왔다. 그녀는 음식에 이끌리듯 다가오다가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렸다. 퇴근길 그녀와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음씨 좋은 누군가가 맛난 음식을 제공했을 수도, 새로운 멋진 인연을 만났을 수도 있다. 행복에 취해 길을 걷다가 나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거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는 잠시라도 행복할 권리가 없는가. 지금 그녀는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상처받은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입맛이 없나요? 혹시, 어디 아파요?” 태연히 물으며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털과 꼬리를 삐쭉 세웠다. 뜻밖의 행동에 놀라 그녀를 살펴보니 군데군데 살갗이 파이고, 젖은 가뭄 든 땅처럼 메말라 있었다. "새끼들은 어떻게 됐나요?"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한기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내 곁에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다가 달빛을 따라 사라졌다.

 

 먼지 뭉치처럼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과 그녀를 비추는 달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가 나를 용서하길, 또한 내가 염려하는 나쁜 일들이 그녀의 삶에 일어나질 않길 고요히 빌었다. 그녀가 머물던 자리에서 묘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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