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는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나누시겠습니까?’
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청각장애 이해교육’을 할 때 강의를 여는 질문이다. 백이면 백, ‘남자와 여자’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 뒤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답변으로는 ‘서양인과 동양인’, ‘어린이와 어른’, ‘남반구와 북반구’, ‘미혼과 기혼’ 등이 있다. 가끔 질문자의 의도를 살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고 답하는 이도 있다. 사람들의 대답이 잦아들 즈음 내가 제시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듣는 세상과 보는 세상’. 다시 말해 청각적 정보로 소통하는 세상과 시각적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
다음으로는 영어 등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는 소통이 불가한 지역에서 장기간 여행 또는 생활해 본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청중 중 대개 한 두 명의 경험자가 있기 마련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 가면 물론 크고 작은 어려움은 겪겠지만 먹고 자는 등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들은 결국 해낸다.(실패했다면 강의 자리에 오지 못했겠지.) 뿐만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현지인들과 깊은 인간적인 교류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들과 어떻게 소통했는지를 물으면 몸짓, 표정, 그림, 사전 등을 활용했다는 답변들이 나온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인류가 지닌 보편성 때문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언어’가 단지 음성언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광의의 언어는 앞서 현지인들과 소통의 방법으로 나온 답변에 열거되어 있다. 낯선 세계에서의 여행 경험을 통해 본인이 거주하던 곳에서 당연시 여겨왔던 기준들이 실로 상대적인 것이며,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이유 등등으로 무시해 왔던 지역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처한 고유한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존중할 만한 유무형의 문화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교류해 본 적이 없어 낯설기는 하지만 청각장애인들도 자신들과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며, 단지 언어·문화의 지도상 다른 지역에 머무는 이들임을 말이다. 또한 언어적 장벽 역시 음성언어 이외에 이미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다른 의사소통 방법들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인식한다. 이때 여행지에서 꼭 필요한 수어 어휘를 가르쳐주면 청중은 이를 마른땅이 비를 흡수하듯 받아들인다.
‘안녕하세요/반갑습니다/감사합니다/죄송합니다/괜찮습니다/좋아요/싫어요'
강의를 마친 후에는 임직원들에게 학생들과 함께 빵 또는 커피를 만들게 한다. 한 시간쯤 지나면, 그들과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보이지 않던 벽이 자연스레 허물어져 있다.
이십 년은 훌쩍 넘은 옛일이다. 한 선배와 술잔을 기울이며 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 꿈은 말이지, 장애인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거야.” “아니, 왜요? 주인공도 아니고 엑스트라라니요?”
“장애인들이 특별하거나 특이하게 비치는 게 아니라, 비장애인들과 어우러져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거지.”
이것이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선배의 꿈이었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고 선배는 ‘장애인 아무개’가 아닌, ‘평범한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작년에제자가 TV 드라마에 등장했다. 청각장애를 지닌 사랑스러운 마을 공동체 일원이었다. 나에겐 그가 주연이 아닌 것도 의미 깊었다. 대중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장애에 초점이 맞춘 것이 아닌, 장애를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인정하는 작가의 태도가 고마웠다.
교수 선배가 TV에서 독특하고 아름다운 음성과 수어로 연기하는 배우를 봤다면, 아마도 젊은 시절 꿈을 기억할 것이다. 선명한 경계들이 모호해지며 그러데이션 되어가는 세상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