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룬 작은 돌
얼마 전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 중 귀하지 않은 손님이 어디 있을까 싶겠지만 그중에서도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고 싶은 제일 귀한 손님은 졸업한 제자다.
결혼 전까지 미혼에 자녀가 없다는 사실은 교직 생활에 있어 나름의 말 못 할 콤플렉스였다. 대학 동기 모임에서 ‘옆 반 선생님은 애도 없는 노처녀라 그런지 아이들한테 엄청 모질게 대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던 날, 학부모로부터 ‘애도 안 키워 본 선생님이 이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라는 말을 들었던 날 마음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자식에 대한 사랑과 학생들에 대한 사랑의 결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잉태와 출산이라는 고통을 수반한 기쁨, 밤낮 없는 고된 양육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깊은 정, 유전자의 힘에 대한 경탄 등 자녀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하고 고유한 사랑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장하고, 전적으로 잘되기만을 진심으로 바라는 대상, 그렇지 못할 때는 애통함에 가슴을 치게 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자식과 학생이라는 점에서 학생은 특별한 존재이다. 이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형제지간도 성공을 두고는 질투라는 것이 끼어드는 법인데 말이다.
내가 이십 대 초반 꿈꾸던 직업은 하나같이 어른들이 들으면 혀를 끌끌 찰만한 것들이었다. 희망 직업 리스트에는 NGO 직원, 대형 선박 승무원, 국제 첩보요원 등 다채로운 직업들이 적혀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리조트 직원’이라는 직업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햇빛 찬란한 바닷가 휴양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돌아가는 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나 역시 추억을 쌓아가는....
이토록 떠도는 삶에 대한 동경이 컸던 나는, 서른 넘도록 정착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나를 보며, 남들은 안정적인 직업인이라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땅에 박힌 채 점점 화석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다른 세계로 굴러가려고 애썼다. 삽 같은 연장을 들고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큰 소리로 나 좀 파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폭우가 쏟아지면 물에 어디론가 떠밀려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고, 이렇게 박혀만 있을 거면 차라리 흙을 덮어쓰고 땅속에 숨어버릴까 우울해하며 고민한 나날도 있다.
몸부림칠 힘도 다 빠진 어느 날 문득, 학교에서의 일상을 찬찬히 그려 보았다.
- 볕이 따스해지고 음지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할 즈음이면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한다.
- 나의 공간은 학생들의 움직임과 소리로 채워진다.
- 그들은 북적대며 지내다가 정해진 기한이 되면 멀리멀리 떠나간다.
- 또 다른 새로운 학생들이 들고 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때 졸업한 제자가 방문했다. 이 아이가 마치 지난 여행에 대한 추억을 안고 리조트를 다시 찾아준 고객같이 여겨졌다. 이곳에서 밝은 태양 아래 즐겁게 지내다가 떠난 학생들도 있지만, 지내는 기간 동안 태풍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괴로워하다가 떠나는 학생들도 있다. 축 처진 어깨로 멀어지는 학생의 뒷모습을 볼 때면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데 태풍 속에서 지내다가 떠났던 제자가 환한 얼굴로 다시 찾아올 때도 있다. 폭풍 속에서 얻은 인사이트와 전투력으로 더 거친 세상 풍파를 이겨낼 수 있었다면서. 이번에 찾아온 제자 역시 이의 경우였다.
제자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았다. 이 친구가 머무르고 사용했던 네모 반듯반듯한 교실, 모래 깔린 운동장, 체육관, 급식실은 리조트의 객실, 해안가 모래사장, 짐, 레스토랑과 다를 바 없었다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제자 아이는 가정과 바깥 세계에서 취할 수 없었던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을 정리했고, 즐겁게 에너지를 발산하며 체력을 단련했고, 영양을 보충하며 기운을 차렸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바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사람들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고, 다시 방문한 자식같이 귀한 손님을 환대하는 작은 사람, 나름의 꿈을 이룬 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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