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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Feb 29. 2024

당근 사랑해!

나의 중고 거래 이야기

 ‘아이 물건 중고 거래’ 방학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다. 책을 비롯하여 각종 교구, 장난감 등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을 팔고, 아이의 발달에 맞춰 새로운 것들을 들여놓는다.


 아이 출생 무렵부터 시작한 중고거래 이력은 실로 화려하여 이제 나는 이 세계에서 프로라고 자부한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고, 오늘도 무림고수와도 같은 프로와 시원한 거래를 했다.


 택배 발송을 위해 물건을 포장하려고 했는데 아뿔싸, 박스가 없다. 방학이 되면 판매 업자 수준으로 박스를 모아놓는데 그걸 다 친정어머니께서 갖다 버리셨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럴 때 쓰는 비상 방식이 있다. 물건을 일회용 보냉 백에 담은 뒤 두툼한 쇼핑백에 넣어 박스테이프로 둘둘 감싸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각이 잡히지 않는 데다가 테이프로 쇼핑백을 비뚤비뚤 감아놓고 보니, 소포라기보다는 황토색 붕대를 칭칭 감은 저주인형에 가까운 형태가 완성되었다. 이걸 들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식겁할까 봐 에코백에 쑤셔 넣었다.


 편의점에 도착했다. 송장을 출력하여 택배에 붙여서 아르바이트생에게 가져갔다. 내가 내민 인지 쓰레기인지 구분되지 않는 물건을 본 아르바이트생 눈이 동그래졌다.


“저기, 손님. 이거 접수해 드리기 곤란한데요.”
“왜요? 저 예전에도 이렇게 해서 보낸 적 있는데요.” 부끄러움을 숨기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반값 택배는 박스 아니면 반송처리 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제가 접수하더라도 기사님께서 반송하시면 손님이 더 번거로워지실 것 같아서요. 죄송한데 박스 구하셔서 재포장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저희 매장에는 알맞은 박스가 없어서요.”

아르바이트생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스 구해 올 동안 이것 좀 잠깐 맡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르바이트생에게 물건을 맡기고 길 건너 마트에 갔다.


 마트에서 박스를 그냥 주워오면 직원에게 혼쭐난다. 내 경험담은 아니고, 그런 장면을 몇 차례 목격한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직원은 그렇게 크게 고함쳤나 보다. 따라서 매장에 들어가서 박스테이프를 한 개 사서 박스를 집어 들었다. 근처에 서 있는 직원이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길래 손에 들고 있던 테이프와 영수증을 당당하게 흔들었지만, 왠지 거지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금 편의점으로 갔다.


 아르바이트생에게 가위를 빌려서 물건을 칭칭 감싸고 있는 붕대, 아니 테이프를 자르기 시작했다(라기보다는 도려내기 시작했다.). 테이프로 얼마나 도배를 해놓았는지 구들장 뜯어내는 것 마냥 힘들고 땀도 흘러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점퍼를 벗으려던 순간, 속옷을 갖춰 입지 않은 사실이 생각났다. 여기서 점퍼를 벗는다면 저 착한 아르바이트생이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아저씨였어!’하고 충격받을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에베레스트 추위도 막아줄 만한 롱패딩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박스테이프와 사투를 벌인 끝에 내용물을 구출했다.


 기쁨에 겨워 물건을 옮겨 담는 순간, 박스가 힘없이 사방으로 푹 찢어지고 말았다. 학창 시절 수학 시간에 길이를 어림하는 게 그렇게나 어렵게 여겨지더니, 나이가 들어도 수학 머리에는 발전이 없다. 담을 물건보다 큰 박스를 구해왔어야지! 너덜너덜해진 박스로 인한 참담함보다도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는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으로 인한 부끄러움이 더 컸다. 당분간 이 편의점 근처를 피해 다녀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나는 이곳을 빨리 탈출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박스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른 후 찢어진 박스를 테이프로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조금 전 마트에서 박스테이프를 살 때 50미터와 75미터가 있었는데 두 개의 가격이 같았다. 합리적 소비자인 나는 당연히 75미터를 선택했다. 물론, 75미터는 좀 얇다는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좀 얇은 게 아니었다. 박스 포장에 매우 미흡한, 뭐랄까 폭 좁은 랩 같은 느낌이랄까. 합리적 소비가 아니라 거지 같은 결정이었다. 찢어진 박스를 봉합하기 위해 부실한 테이프를 절반 가까이 써서 칭칭 휘감았더니 이 박스 역시 저주인형 형태가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손길로 택배를 내밀자 아르바이트생 역시 내 눈을 피한 채 물었다. “송장 재출력 도와드릴까요?”이 친구는 등에 솟은 날개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천사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을 받아 송장 제출력을 하는데 개인정보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내가 쓰고 있는 알뜰폰 정보가 화면에 떴다. 알뜰폰 사용하는 게 뭐, 알뜰해서이지 뭐, 무슨 문제냐 만은, 그 순간만큼은 뭐, 좀 뭐, 거지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땀을 줄줄 흘리며 택배를 처리하고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는 중에 또다시 중고거래 앱을 통한 문자가 도착했다. “물건 구매하고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반값 택배로 부탁드려요.”


 곧바로 물건을 챙겨 마트에 들러 단무지 한 개를 산 후 박스를 얻었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앞에 다시 섰다. 헤어진 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박스를 들고 등장한 나를 본 아르바이트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거지 같은 느낌은 정리된 집안과 입금된 통장을 보면 금세 지워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다시금 거지 같은 느낌이 들까 봐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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