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나

한여름 낮의 조우

by 허니베리


해가 지날수록 여름철 더위가 맹렬해지고 있다.

에어컨이 생명장치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고 생활한다.

환기를 위해 거실 창을 여니, 화단의 화초들이 허리를 휘청이며 이파리를 땅에 늘어뜨린 채 허우적거렸다. 바닷속 해초처럼.


때마침 들어온 남편에게 밖에 나가 식물들에 물을 주라고 부탁했다. 이러다가 다들 말라죽겠다고.

“그냥 두자. 나도 더워서 죽을 것 같아. 식물이 죽는 게 내가 죽는 거보다는 낫잖아?”

그는 이미 겉옷을 훌훌 벗어던진 채 벤치형 의자 위에 벌렁 누운 상태였다.


며칠 전 손목을 다친 나는 물 주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이 먼저지, 하면서.


다음 날, 남편이 새벽에 물을 주고 출근했는지 호수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여있었다.

'물 좀 잘 잠그지, 저 물 받았으면 잉어라도 키우겠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야외 온도는 30도가 넘었다.

무엇이든 엉망으로 흐트러뜨리는 생명체가 숨어있기라도 한 건지, 집안일은 마치고 돌아선 순간, 다시금 손길이 필요한 상태가 되어있다.

정체불명의 상대와 숨바꼭질하며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가방을 열어 노트북과 책 한 권을 쑤셔 넣고 집을 벗어났다.


다들 휴가를 떠나서일까, 아스팔트의 열기를 견딜 자신이 없어서일까. 머리 위에 태양이 내리쬐고 있음에도 한산한 도로가 스산했다.


더위로 철로가 휘어져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안전 문자 알림이 울렸다.

더위는 철로뿐 아니라, 내 팔다리도 엿가락처럼 늘려놨다. 팔다리만 흐느적거릴 뿐 아니라, 뇌도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목적지인 카페가 눈앞에 나타났다.

더위로 인해 늘어진 것이 또 하나 생각났다. 시간. 집에서 이곳까지 오는 시간도 종종걸음으로 오던 겨울에 비해 두어 배는 늘었다.

눈앞에 있는 작은 건널목만 건너면 에어컨 바람이 나를 식혀줄 것이다.


그때, 왼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

팔뚝에서 목덜미까지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잠시 발걸음을 늦추었다가, 두세 걸음 뒷걸음질 쳤다.

호기심이 시원함에 대한 갈망보다 컸다. 그 눈길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나를 향하는 그 눈은 실로 크고 오묘했다. 검은 눈동자는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듯 어두웠다. 지옥의 비밀을 봉인하는 인장 같았다.


둘은 마주 선 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검고 큰 눈은 태양이 지글거리는 계절도, 거리 한 복판이라는 공간도 삼켜버렸다.


그는 분명 내게 할 말이 있었다. 그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러한 나를 지켜보았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익숙한 얼굴, 익숙한 눈빛이었다. 가만있어 보자, 이 녀석을 어디에서 보았더라. 등허리로 땀이 한 줄기 흘렀다.


당혹감에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초록색 보행자 신호가 들어왔다. 습관처럼 횡단보도를 향해 발이 움직였다.


중간만큼 건넜을까, 등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야, 나!’


검은 눈동자를 휘휘 저은 듯 묵직하고 탁한 목소리였다. 심해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침을 맞은 듯 어깨가 움찔거렸다. 뒤돌아보지 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길을 건너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들어왔다. 차가운 냉기가 살갗에 닿았다. 다크로스팅 된 커피 향과 보사노바 선율이 나를 감쌌다.


하지만, 경쾌한 음악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

‘나야, 나!’


몸이 으스스 떨렸다. 에어컨 때문은 아니었다.


음악 아래로 베이스 음처럼 깔리는 또 다른 한마디,

'넌, 내가 필요했지.'


침을 한 번 삼키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 식당 앞에 광고용 사진이 펄럭였다. 그 속에서 잉어가 검은 눈으로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경을 닦고 사진을 다시 살펴보았다.


얼마 전, 보양식으로 집어온 녀석이 틀림없다.

사장님이 가장 좋은 녀석으로 준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바로 저놈이었어!


바람에 광고물이 날리며 잉어의 한쪽 눈이 찌그러졌다.

'그래. 나야, 나.'


어... 휴......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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