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편지(To. Viktor Lowenfeld)
2021년 10월 15일
덕수궁에서
친애하는 로웬펠드 님,
글을 쓰다 보면 이어서 주욱 쓰고 싶은 작업이 있어요. 지금 이 작업이 그러한데 현실은 한 가지 일만 하고 살 순 없잖아요. 로웬펠드 님은 그 길고 고된(?) 338페이지 작업을 어떻게 마쳤나 궁금합니다. 로웬펠드 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당신 또한 열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윗 문장의 '고된'이라는 단어는 제가 좀 잘 못 선택한 것 같아요. 로웬펠드 님은 글을 쓰는 시간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진공의 상태로 들어가 있지 않나요? (오늘 주제도 '공간'과 '주관적 공간' 입니다.) 자신이 고된지 고통스러운지 잊어버리고 타이핑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안 나요. 저는 편두통 환자인데 여러 작가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잃으면 위로가 많이 됩니다. 왜냐면 다수의 작가들이 편두통 환자인 경우가 많아요. 작가 특유의 맬랑콜리 기질을 가진 우울증 작가 숫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두통 환자 또한 많았더라고요. 작가 특유의 기질적 섬세함도 한 몫할 테지만 제가 21세기에 병원을 다녀본 결과 편두통은 일정 % 군에 드는 사람들이더군요. 그게 꼭 성격이나 환경적 요인으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의 경우 호르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물론 유전도 더해서요. 그런데 두통도 우울감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작 활동 같은 것을 하면 그 작업에 매몰되서 잠시 잊게 되는 효과가 있잖아요. 편두통군의 사람들( 수학자 파스칼, 프랑스 문학 대문호 프루스트, 교육학자 칼 필립 모리츠 등 다수)이 작업 결과물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는 말이 편두통 tmi로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라고 해서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입니다.) 이어졌군요.
흔들선 문:
로웬펠드 님이 그림을 그렸다면 어떠했을까 자주 상상한답니다. 왜냐면 조형요소와 원리에 대해 쓴 뒷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당신이 살았던 시대상을 알기에 붓까지 들었다면 당신은 이런 글을 마무리하지 못했겠죠. 로웬펠드 님의 글을 보고 있으면 당신은 정말로 미술 그 자체를 무목적성을 두고 사랑했을지도 모를 사람이거든요. 미술교육을 집대성하기 위해 생애 전체를 연구자의 자세로 도전했던 터라 글로만 미술교육을 논하셨지만 '발도르프 미술교육'을 집대성 한 '슈타이너' 님은 그림을 제법 그려두었더라고요. 칸딘스키나 파울클레 만큼 그림을 그릴 필욘 없었겠지만. 로웬펠드님도 화가이면서 미술교육을 연구했다면 훨씬 풍부한 경험을 미술교육에 녹일 수 있었다는 부분이 안타까워요. 특히 당신의 글을 보면 파울클레와 맞닿은 부분이 많거든요. 그분은 그리기에 대한 재능 또한 굉장했기에 가능했을테지요. 하지만 글로만 접하면 로웬펠드 님의 드로잉도 분명 좋을 것 같아요.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논한 조형요소와 원리는 그려본 사람이 알 수 있는 감수성이 듬뿍 들어가 있는 문장들이거든요. 또 관찰력을 보면 당신은 그림을 못 그렸리가 없는데 안타깝습니다. 단 한장도 찾아 볼 수가 없군요.
로웬펠드 님 답:
글쎄요. 답을 하기 어렵지만 그림을 사랑한 사람이니 미술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요.
그림을 좀 그려볼 걸 그랬습니다.
제가 조형요소와 원리 부분은 그림에 빠져들어 쓴 글들이긴 합니다. 제 글에서 곰 프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느꼈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미술이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 감상론이 빠질 수가 없다 생각해요. 그것을 미술교육에 녹이라는 그러니까 미술교사들이 자신의 고유한 미적 감각을 활용해서 융통성 있는 미술 교육을 만들어가자는 글을 남긴 이유임을 책 곳곳에 언급해 둔 것이고요.
이 공간이라는 것도 저는 4가지 의미를 가진다 생각합니다. 무한한 것으로서의 공간, 제한된 테두리 안에서의 공간, 다른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의 공간, 인간과의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의 공간으로요. 예를 들면 무한성 때문에 우주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듯이 공간은 전체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공간이 우리 주위를 둘러쌌을 때나 우리가 공간에 한정된 의미를 부여했을 때만 공간은 우리의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죠. 우주를 하늘로 대체했을 때 우리는 시각적 감각으로 공간에 접근할 수 있죠.
흔들선 답:
공간에 대한 로웬펠드 님의 예시로 친구와 큰 방과 작은 방을 오가며 겪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문 밖에 친구가 있다는 가정하에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방 문을 열고 친구는 작은 방으로 나는 큰 방으로 옮겨가며 겪는 느낌에 대한 예시가 좋더군요. 특히 작은 방에서의 느껴지는 자유의 제한과 큰 방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또는 자유로움 등의 비유도 적절했고요. 낡고 어두운 큰 방에서 잘 꾸며지고 아늑한 작은 방으로의 이동과 주관적인 심리 변화와 공간감에 대한 주관적 해석은 그림을 볼 때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는 이 경험을 아이와의 숨바꼭질 놀이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집 안 구석구석 청소할 때 느끼는 공간감과 아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숨죽이고 숨어있는 공간감은 전혀 달라요. 집의 어둡고 뻔한 구석 장소일 뿐인데 그 안에서 아이가 찾기 전까지 멈춰서 있을 때면 전혀 다른 시공간에 있는 느낌이 들고요. 갑갑함을 느낄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해요. 갑갑함을 느끼는 날은 빨리 나가서 다른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런 놀이를 하고 있어야 하다니 하며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험까지 그 짧은 순간에 하게 되고, 편안함을 느끼는 날은 숨어서 쉬며 혼자 다른 상상을 하며 피해있는 느낌이 들 때 편안함을 느끼더라고요. 똑같은 공간에서 청소할 때, 갑갑하게 숨을 때, 편안하게 숨을 때 그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이 다 다른 거죠.
로웬펠드 님이 말하는 미술에서의 공간감은 주관적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했더군요. 그 맥락은 결국 그림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간을 인정하는 융통성 있는 교육까지 이어지고요.
오늘따라 유난히 로웬펠드 님과 드로잉 한 장 같이해보면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 조형요소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말로 당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싶네요.
더불어 로웬펠드님이 하늘에서 평안하길 빕니다. 조형요소와 원리는 제가 만난 그 어떤 미술이론 및 미술비평서의 글보다 명확하답니다.
존경과 진심을 담아
흔들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