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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Jul 07. 2020

아마추어의 두려움 가득한 손길이 좋아

02. 인생은 디딤돌

피부과. 이곳에 가면 누구나 산송장이 된다. 일인용 침구에 누워 숙련된 관리사의 손길로 내 피부가 재탄생될 수 있지만, 그건 관리사에 따라 재탄생될 수도, 송장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무더운 여름. 나는 잔뜩 올라온 피부 트러블로 동네의 어느 피부과를 찾았다. 일인용 침구에 눕는다. 헤어 밴드로 한 올 한 올 삐져나온, 감지 않은 머리카락을 꼼꼼히 올려 싸맨다. 아, 이 정확한 손길. 이 자신 있는 손길. 이건 숙련된 관리사의 손길이 분명하다. 마음이 놓인다. 자, 이제 재탄생될 가능성이 20% 상승했다. 만족스럽다. 꼼꼼한 클렌징과 간단한 스킨케어. 클렌징을 어루만지고, 닦아내는 그녀의 손길. 스킨케어를 내 피부 깊숙이 침투시키겠다는 저, 힘 조절이 정확한, 손목 스냅. 만족스럽다. 재탄생될 가능성이 40%가 되었다. 이제 대망의 압출이다.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나. 머리 위에서 잠깐 자리를 비우는 회전의자 소리가 들린다. 그래, 잠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마음을 놓고 있는 나. 머리맡에 놓인 무거운 공기. 그녀가 돌아왔다. 압출도 무사히 완성해주세요. 그럼 더블 찬스가 되어, 무려 80%가 됩니다! 

“압출 시작하겠습니다” 앳된 미성의 목소리. 그녀가 아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 나. 감은 눈꺼풀 안에서 눈알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 피부 위로 올라온 그녀의 손길... 낯설다.. 서툴다... 확실히 나 아마추어예요, 라는 손길이다. 조심조심 내 피부 위를 걸어 다니는 그녀. 종종걸음이다.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는, 부들부들 떨리는 저 손가락.


정신이 없는 남양주 한옥 세트장. 그 가운데를 질주하며, 테이블 바로 걸어가는 20대 초반의 나. 헐렁한 위아래 옷에 양손을 겨드랑이에 딱 붙이고 걷는다.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테이블 바에 도착했다. 종이컵에 맥심 한 봉지를 뜯어 넣는다. 취업 전부터 익히 들어온, 유명한 감독님의 커피 심부름이다. 그는 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다. 자, 그렇다면 뜨거운 물을 넣어야 할까, 차가운 물을 넣어야 할까. 푹 눌러쓴 등산 모자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가 쨍쨍한 무더운 여름날. 그는 평소 뜨거운 것만 마시지만, 오늘은 특별히 차가운 것을 마시겠지. 확실해. 차가운 물통으로 손을 뻗는다. 아, 아냐, 사람의 취향이 이깟 날씨에 휘둘리겠어? 오늘도 여전히 뜨거운 것을 선호할 거야. 그래. 확실해. 뜨거운 물통으로 손을 뻗는다. 귀 옆으로 땀이 흐른다. 그래, 이렇게 더운 걸? 하, 도저히 모르겠다. 테이블 위에 종이컵을 내려놓는다.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찰랑찰랑.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안에 맥심 한 봉지를 탄 커피잔을 부여잡고, 세트장을 가로지른다. 기술 스텝들과 회의 중인 감독에게 손을 뻗어 종이컵을 건넨다. “어 그래, 땡큐” 흐뭇하다. 해냈다. 그런데 종이컵을 잡은 그의 눈빛이 이상하다. 나를 천천히 그리고 지긋이 바라보다, 조감독을 바라본다. 의아한 나. “이게.. 무엇이냐...?”는 감독의 물음에, 장금이처럼 조목조목 커피 레시피를 말한다. “날씨가 더워 차가운 물을 넣자니, 감독님의 평소 취향이 뜨거운 것이고, 뜨거운 것을 넣자니 또 날씨가 너무 더워... 그 둘을 섞었습니다...” 조감독에게 종이컵을 건네는 감독. 아 난 망한 거구나. 조감독이 감독 몰래 푸하하 웃으며, 나 대신 커피 심부름을 갔다. 후에 힐끗 보니, 정답은 뜨거운 물.


압출이 끝났다. 화끈거리는 나의 피부. 나의 고통도 끝났다. 미숙한 그녀는 나에게 마무리 스킨케어를 해준다. 아이 엉덩이를 다루듯 섬세하고, 공기를 쓰다듬는 건지, 나의 피부를 쓰다듬는 건지 모를 힘으로, 전혀 흡수되지 않은 마무리 스킨케어.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녀의 손길이 나의 피부로 닿는다. 잘하고 싶겠지? 잘하고 싶을 거야. 실수하고 싶지 않겠지? 실수하고 싶지 않을 거야. 아마추어의 섬세한 손길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당찬 목소리의 관리사. 


두려운 티를 벗어던지려는 듯 마무리 대사를 확실하게 하는 그녀다. 

관리사처럼 나 역시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타인에게 전해진 적이 있겠지. 그때 그 감독은 다 알고 있었겠지. 나의 두려운 티를. 그래서 나무라지 않았던 거겠지. 


이제는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나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되는 나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이 아마추어의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는, 다정한 이 손길이 참 애틋하게 느껴졌다.  


이제 나는 마무리 스킨케어 따윈 셀프로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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