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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May 12. 2020

렌즈 삽입 수술

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았던 기억

대학생 방학은 꽤 길다. 그 기간에 학생들은 흔히 스펙을 쌓는데 열을 올린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붙은 홍보 포스터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대학생 라식수술 EVENT!’. 그렇게 나는 지방의 집에서 굳이 서울로 올라와, 하나의 스펙을 쌓고자 안과를 찾게 되었다.  


빌딩 숲 속, 한 안과의 엘리베이터 안. 빨갛게 발광하는 꼭대기 층의 버튼 하나. 고요 속에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잽싸게 내리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내린 나. 두꺼운 뿔테 안경에 김이 서린다. 안경을 벗어 소매로 알을 닦는다. 여전히 뿌옇게 보이는 시야. 대충 형태가 보인다. 짜증 섞인 간호사들의 말투와 속삭이며 말하는 내원자들, 그리고 앉을자리가 부족해 괜히 벽면의 눈(目)이나 원장의 이미지를 감상하는 사람들까지도.

접수를 마치고, 한 코디네이터의 안내로 상담을 받았다. 각막이 얇아 라식이나 라섹 수술이 어려워 내 눈에는 ‘렌즈 삽입 수술’이 적합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벤트는 무용지물... 하지만 벽에 붙여진 화려한 이력들, 거기에 화려한 학력은 원장님에 대한 나의 신뢰감을 높였다.

평범한 눈 크기가 안경을 만나면 건포도로 변하는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게다가 도수 높은 무게를 견디느라 통증이 끊이지 않는 콧대와 무표정으로 있으면 화났냐고 묻는 인상까지! 그의 스펙은 이 모든 것을 탈바꿈할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더 가격이 나가고, 생소한 이 수술을 나는 하기로 결심했다.


눈 상태를 확인하고, 실밥을 풀기 위해 다시 안과를 찾았다. 눈을 가렸던 보호 안대를 푼다. 한쪽 렌즈가 동공에서 좀 벗어났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는(?) 진단을 받고 나왔다. 시야는 선명했다. 하지만 무언가 개운하지 않은 이 기분. 실밥을 풀지 않은 이 느낌. 나만의 착각일까? 다시 진료실로 들어가려고 하니, 남자 간호사가 앞을 막는다. 하는 수 없이 데스크 쪽으로 갔다. 눈이 마주친 한 코디네이터. 이미 짜증이 가득해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물으면 안 됐었다.

“제가 실밥을 안 푼 것 같은데요.”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푸셨어요!” 단호하고 확실한, 짜증 가득한 그녀의 대답에 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벽면에 붙여진 원장님의 스펙이 다시 눈에 띄었다. ‘의사 선생님이니깐 알아서 잘해 주셨을 거야.’ 나를 다독이고, 지방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며칠 뒤, 나는 굉장한 어지럼증을 느껴 지방의 집 근처 안과를 찾았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안압이 상당히 높으신데요? 실밥은 왜 풀지 않았죠?”하고 상황을 말씀해 주셨다. 역시 그랬었구나. 나는 다시 서울로 먼 길을 올라갔다. 실밥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새 세상을 보고 있었을 텐데.


다시 찾은 빌딩 숲 속, 꼭대기 층의 안과. 원장님은 아무 말 없이 실밥을 풀어주었다. 나는 그때 실밥을 풀었어야 했지 않냐고, 까칠하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랬죠.” 원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뒤로 보이는 화려한 스펙. 더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진료실을 나와 억울함과 분통함에 가득 찬 나는 내원자들을 제치고, 데스크 앞으로 갔다. “저번에 실밥 풀었다고 하지 않았나요?”라는 나의 물음에 한 코디네이터와 눈이 마주친다. 그때 가장 짜증이 가득했던, 그때 그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정확히 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라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나는 곧장 뒤돌아 엘리베이터 타고, 건물 1층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을 쾅 닫고, 목이 터져라 울었다. 마치 삼류 영화 속 발성과 연기가 다듬어지지 않은 배우처럼.


원장님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어떠한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 짓밟힌 듯한 기분이었다. 지방 대생인 내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 상황'을 맞닥뜨린 느낌이었달까.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 나 자체가 건포도가 되어가는 이 기분. 그 상황 속 나의 행동이 후회스러우면서도 참 미웠다.


밖에서 안과에 다녀온 듯한 모녀가 노크를 했다.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준 안과를 다녀왔다니! 그러면 안됐지만 나는 애먼 데 화풀이하듯 신경질적으로 문을 세게 두드리며, “여기 사람이었어요!”를 외쳤다.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빛 반사가 좀 느껴지지만, 깨끗한 새 세상을 보고 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이후, 정기검진은 그 안과로 가지 않았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는 법이라지. 이런 식의 잃는 것이 생긴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수술을 절대...!


그래도 할 거 같다. 아! 물론 다른 안과에서.


화려한 스펙에 주눅 들지 말자. 짜증이 난 사람에게 확인을 바라지 말자.

내가 미심쩍었다고 느꼈다면 나를 믿자. 나를 믿고 확실하게 말하자.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깐.


그렇게 난 하나의 스펙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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