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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갱 Sep 20. 2016

계절과 조깅

그리고 나이 듦에 대하여

계절의 심장 위를 뛰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조그만 강이 있고 나는 무료한 하루의 끝 혹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에 조깅화를 챙겨 그 강 옆을 뛴다. 시간이 많으면 매일이라도 뛰고 싶지만 바쁘고 나태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만족하며 강변을 달린다.

이 길을 달린 지 벌써 6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바쁜 도시남자로 살다 보면 계절 감각이 떨어져 지하철과 회사 사이에서 어렴풋하게 바뀐 계절을 체감한다. 하지만 조깅할 때만큼은 계절의 심장을 뛰는 듯 온몸으로 계절을 느낀다. 


사계를 달리는 기쁨


에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 콧물로 샤워를 할지언정 조깅을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봄에 달리기를 하는 행위는 내 삶에 몇 안 되는 사치이기 때문이다. 왼쪽엔 강, 오른쪽엔 거대한 벚꽃을 두고 뛰는 기분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벚꽃은 날리고 나는 멋있다. 어느새 따듯해진 햇볕에 등에는 기분 좋게 땀이 베인다. 이제 녹기 시작해 질퍽이는 땅의 질감도 훌륭하다. 모든 생물이 다시 소생하고 있고 겨우내 떨어졌던 체력도 올려야 한다. 온 우주가 생기를 더하는 계절이다.


여름의 조깅은 나만의 올림픽이다, 우거진 신록 사이에 비 오듯 비지땀을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성큼성큼 뛰어야 한다. 한증막 안을 뛰는 것 같은 괴로움이지만 조깅 후 마시는 얼음 포카리 스웨트, 혹 차가운 캔맥주를 생각하며 그 고통을 감내한다. 그것이 나의 금메달. 괴로움이 쾌락과 등가 교환해 삶의 감정이 더 풍요로워진다. 나는 나만의 치열한 올림픽에서 1등을 하고 상을 받는다. 이것이 여름 조깅의 묘미다.


가을은 조깅하기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 봄볕처럼 따갑지 않은 햇살에 시원한 바람이 더해 뛰기 완벽한 조건을 만든다. 가을에는 재즈가 좋겠다. 음악 사이사이에 사브락 부서지는 낙엽 소리가 들린다.  끝나가는 조깅이 아쉬워 5km 뛸 거리를 10km를 뛰고 15km를 뛰게 만드는 매력 있는 가을이다. 그리도 더웠던 지난여름을 버텼다는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가을을 뛰는 행복함은.


겨울은 사실 뛰기에 적당한 계절은 아니다. 마스크도 써야 하고 모자도 써야 하고 장갑도 껴야 한다. 무엇보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내가 왜 이 칼바람을 맞으며 뛰어야 하는지. 해가 쨍한 2~4시 사이에 뛰면 금방 열이 올라 또 뛸만해진다. 목적지는 분명하다 5km 떨어진 목욕탕이다. 이 한파를 뚫고 온탕에 몸을 담글 때 입에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온다. 죽음의 문턱에서 엄마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안도감이랄까.


느려진 기록만큼 천천히 감상하기


달리기를 하며 만났던 수많은 계절과 인생의 시기들이 결합되어 머릿속에 선명하다. 나의 계절감각은 달리기에서 나오는 게 분명하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깅을 하며 나는 알게 모르게 바뀌는 계절처럼 늙어졌다. 달리기 기록은 내 노화의 바로미터다. 30초씩 1분씩 느려지더니 그토록 가볍게 뛰던 그 기록과 똑같이 뛰려면 이제는 죽을 만큼 노력해야 한다.


체형이 무너지고 있고 얼굴의 탄력이 줄고 있다, 아주 천천히. 늙는 건 서글픈 일이다. 내 곁을 지나갔던 다채로운 계절을 생각하면 기록이 떨어질 만도 하다. 하지만 달리며 만났던 계절의 풍경이 머릿속에 앨범처럼 남아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된다. 내 목표는 이제 예전만큼의 스피드로 달리기를 마치는 것은 아니다. 육체가 노화하며 느려지는 속도만큼 천천히 계절 위를 뛰면 그만이다. 더 오래 이 계절을 감상하겠다. 그러기 위해 최소 5km, 10km를 달릴 수 있는 체력과 마음가짐만큼은 항상 단련해 놓아야 한다. 앞으로 겪게 될 더 아름다운 계절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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