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 2일 차
빳빳한 수건도, 티백도 있어야 하는 자리에 각을 맞추어 앉아 있고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아침이 준비되어 있다, 아침 먹으러 간 사이 방을 치워주는 우렁각시도 있다. 변기를 닦는 수고가 없고 자질 구레한 삶의 흔적들이 지워진 공간이 매력적이다. 있어야 할 것들이 제 자리에 있고 없어야 할 것들이 없는 것이 호텔의 가치다.
유럽을 여행할 때 나는 늙어도 호스텔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했는데, 불쉿이다. 호텔이 최고야.
밥을 먹고 일단 옷을 갈아 입고 러닝을 하러 나왔다. 도시를 구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조깅이라고 생각하여 여행 갈 때 러닝화 하나는 꼭 챙겨 간다. 난 전 세계를 뛰고 싶다.
1. 달리기의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주변을 구경하기 적합하다.
2. 달릴 때 나오는 도파민 같은 행복한 호르몬들이 도시를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3. 여행지에서 쌓이는 칼로리들을 스마트하게 태울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여행지에서의 조깅을 추천한다. 조깅하면서 보는 도시는 눈 부시게 선명하다.
조깅 코스를 미리 알아보고 가면 좋았을 걸 위 사진처럼 기분 좋게 시작한 길이 끊기고 시장도 지나고 차도에서 차와 함께 뛰기도 했다. 시장을 뛸 때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가로질러 뛰는 미친놈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날씨가 더워 뛰다 뒤질 뻔했다. 근데 살음.
찬물로 샤워하고 에어컨을 틀고 깨끗한 침대 시트 위에 누워 달궈진 얼굴을 식혔다. 개꿀.
나나문 반딧불 투어는 꼭 보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나 투어를 신청했다.
이런 거지 같은 버스를 타고 편도 1시간 30분, 왕복은 3시간을 타는데 힘들었다. 나는 간이의자에 앉아 허리도 아팠다. 다른 투어 버스는 좋아서 부러웠다.
그래도 코타 키나발루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현관 앞 해먹 위에서 어린아이의 한가함이 흔들거렸다. 언젠가 가슴이 답답할 때 그 아이의 천진난만한 태평함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여행의 큰 수확이다.
나나문 반딧불 투어는 3가지를 본다.
원숭이, 선셋, 반딧불.
작은 보트를 타고 원숭이를 찾아간다. 원시림 같은 강을 누비고 있으니 정말 어릴 적 꿈꾸는 모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디애나 존스가 되어 원숭이를 찾고 있다. 잡아서 원숭이 골 요리를 먹어볼까. 하지만 약 한 시간 동안 헤매도 원숭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이드도 포기하고 '오늘은 원숭이가 없습니다~' 했는데 처음 보트를 탔던 장소로 되돌아오니 원숭이가 한 부대는 있었다. 이것이 인생의 맛. 원숭이가 생각보다 귀엽고 멋있었다.
날씨가 좋아 코타 키나발루의 석양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정말 엄청나게 숨 막히고 그러진 않았다.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사라지는 게 노을의 매력인 것 같다. 사진만 보면 살짝 대부도 느낌도 나는 게 함정이다.
Like a sunset
Dying with the rising of the moon
Gone too soon
마이클 잭슨의 Gone too soon을 들으며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반딧불을 보러 강을 따라갔다.
반딧불이 많았다. 반딧불을 보고 난 소감은 자우림의 반딧불이란 노래의 가사로 대신하겠다.
우리들은 젊었고 여름이었고 여름밤은 길었고 아름다웠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밤의 사이를 반짝이는 빛을 따라 거닐었었고
떠다니는 별과 같은 반딧불, 손에 쥐면 사라지리 애처로운 반딧불.
손에 지면 사라지리 아름다운 시간들 여름밤 반딧불처럼
반딧불/자우림
버터 새우, 칠리크랩, 타이거 맥주, 그릴드 치킨.
여자친구님은 새우 먹다가 죽은 귀신이 들려 가끔 빙의가 되어 나를 긴장하게 하는데 나 혼자 맛있는 새우를 먹으니 좀 미안했다. 해산물 가격이 저렴해 부담 없이 맛있게 먹었다. 신실한 이슬람 국가라 맥주 가격이 비싼 것이 인상적이었다. 조금씩 먹으라고 맥주잔도 작다. 마음에 든다.
코타 키나발루가 마음에 든다.